유선상의 듀엣

유선상의 듀엣

​​​​등장인물

제리 킴

팡파롱 브륌

때

1992년

곳

뉴저지의 어느 세탁소

*

팡파롱 브륌, 전화를 건다.

제리 킴, 전화를 받는다.

제리 네, 제리 킴즈 런드리입니다.

브륌 안녕하세요, 혹시 네불라 씨 되시나요?

제리 네불라요?

브륌 예예, 네불라 씨를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은데 연락이 안 돼서요. 여기서 일했다는 걸 수소문해서 알게 됐습니다.

제리 저기, 죄송한데 오늘이 며칠이죠?

브륌 11월 12일이요.

제리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만우절이 아니라요?

브륌 이 영화는 네불라 씨 없이 찍을 수 없어요.

제리 갑자기 왜 이러세요?

브륌 저는 지금 진지하게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제리 하긴, 왕년에 배우였댔으니까. 진짜로, 성대모사 같은 걸 잘하더라고요. 근데 아쉽지만 네불라는 한 달 전에 관뒀어요.

브륌 관뒀어요?

제리 네네, 꿈을 찾은 건지 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리데요, 그 친구.

브륌 잠깐 전화 괜찮으세요?

제리 아, 예예. 근데 누구세요?

브륌 제 소개를 안 드렸군요. 바바르픽처스의 캐스팅디렉터 팡파롱 브륌입니다.

제리 바바르픽처스?

브륌 처음 들어보실 겁니다. 워낙 작은 회사거든요. 아무튼, 네불라 씨한테 얘기 좀 전해 주실 수 있으세요?

제리 어……. 네, 뭐. 전화번호는 아니까. 아니, 그냥 연락처를 드릴게요. 이삼육에…….

브륌 혹시 이삼육 팔이팔삼, 맞아요?

제리 네, 팔이팔삼.

브륌 그 번호로 연락이 안 돼서요. 전화번호를 바꾼 것 같더라고요.

제리 그래요? 최근엔 전화를 잘 안 해 봐서 몰랐네요. 워낙 바쁘대서. 무슨 쇼를 하고 있는데 그게 생각보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은가 보더라고요.

브륌 블루 선셋 펍에서 하는 퍼포먼스 말씀이신가요?

제리 네네, 거기서 하죠.

브륌 거기서 네불라 씨를 발견한 거에요.

제리 그래요?

브륌 사실 이 영화 자체를 그 쇼를 보고 구상했어요.

제리 대단하네요, 참 네불라 녀석도…. 무슨 영화예요?

브륌 2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어느 독재 정부의 만행을 폭로하는 내용이에요. 자세한 건 아직은 유출되면 안 돼서,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리 엥?

브륌 왜요?

제리 우리 같은 쇼 본 거 맞아요?

브륌 블루 선셋 펍 맞다면서요?

제리 말씀하신 것만 들어 보면 되게 심각한 영화 생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

브륌 그렇죠.

제리 네불라가 하는 쇼엔 별로 심각한 구석이 없잖아요.

브륌 거기에 심각한 구석이 없다고요?

제리 그냥 바보 같은 짓 하는 게 내용의 전부잖아요, 말도 거의 안 하고.

브륌 아니요, 아니죠, 그건 제가 올해 들어, 아니 평생 경험해 본 것 중에서 제일 심각한 쇼였어요.

제리 평론가의 시각에서요?

브륌 파라디수스 국민의 시각에서요.

사이.

제리 파라디수스? 그 쇼가 무슨, 그 나라의 민속 의식 같은 거예요?

브륌 그런 건 아닙니다.

제리 하긴, 좀 이상한 옷을 입긴 하더라고요. 광대 쇼에 군복은 좀 안 어울리잖아요. 그게 선생님 고향의 역사랑 관련 있는 건가요?

브륌 그 군복은 파라디수스에서 10년 동안이나 독재 정치를 했던 미토스라는 사람의 옷이에요.

제리 어……. 그럼 정말로 심각한 게 맞네요. 왜 그런 걸 입는 걸까요? 네오나치 같은 건가?

브륌 그것보다 더 나쁜 거예요.

제리 그것보다 더 나쁠 수가 있어요?

브륌 네불라 씨는 미토스 정권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대역이에요.

제리 대역이요?

브륌 독재자의 대역이요. 파라디수스 국민 사이에서는 유명한 일이에요. 독재자의 완벽한 이미지를 위해 여러 대역을 뒀거든요. 뻔뻔한 건지, 간이 큰 건지 미국에 와서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제가 술집 코미디 쇼 포스터에서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거고요.

제리 선생님은 정말로 저한테 감사하셔야 해요.

브륌 뭘요?

제리 제가 장난 전화 하나로 법정까지 가는 쫌생이는 아니라는 걸 말예요.

브륌 장난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작업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사실은 수많은 학살과 범죄를 방조한 악당이라는 진실을 전해 드리고 있는 겁니다.

제리 대체 왜 이런 얘길 하는 거예요?

브륌 아셔야 하는 일이니까요. 파라디수스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쇼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할 거예요.

제리 무슨 생각?

브륌 저 무대 위의 쇼맨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사이.

네불라 씨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그는 그냥 대역을 일로 한 것도 아니에요, 가장 열성적인 대역이었습니다. 그 일에서 더러운 희열을 느꼈어요. 어린이를 학살하고, 종교를 탄압하고, 국민들을 우민화시키는 정부의 유지에 자발적으로 헌신했다 이 말입니다. 자, 이제 당신이 알고 있었던 성실한 세탁소 직원에 대해 생각이 좀 달라졌나요?

제리 제 생각이 중요해요?

브륌 아뇨, 아뇨, 아뇨,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고 난 소감을 한마디 정도는 듣고 싶네요, 궁금하니까.

제리 별로 진실 같지는 않은데요.

사이.

브륌 맞아요,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이건 우리 영화 줄거리예요. 다큐멘터리라는 것도 거짓말, 완전 픽션이죠. 사실 제가 시나리오를 썼어요. 하하하하! 군복을 입고 코미디 쇼를 하는 이민자를 보고 이런 얘기가 술술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네불라 씨를 캐스팅하고 싶은 거고. 아무튼, 이런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때요? 흥행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라고 판단하시겠어요?

사이.

제리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브륌 왜죠?

제리 제가 얼마 전 전화기를 바꿨거든요.

브륌 그랬어요? 그게 왜요?

제리 발신자 확인이 되는 모델로.

사이.

이삼육 팔이팔삼.

브륌, 전화를 끊는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