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변

<쇼맨> 2차, 네불라와 변호사

대역을 선 죄로 재판을 받을 때, 저한테도 변호사가 있었어요. 갈색 콧수염을 멋있게 길러서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는 젊은이였죠. 아마 국선변호사였을 거예요, 제가 고른 기억이 없으니까. 열정적인 사람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그 변호사도 절 처음 만나자마자 그 말을 했어요.

"운이 좋네요, 이길 수 있는 싸움인데요?"

변호사는 내게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직접적으로 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서 충분히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어요. 무엇보다 고의성이 없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말했죠. 변호사는 내게 수백 가지 매뉴얼을 주고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해 줬어요. 어떤 손짓이 동정을 살 수 있는지, 어떤 눈빛이 순진무구하게 보이는지 세심하게 짚어 줬죠.

"우린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네불라 씨는 아무것도 몰랐고 그건 사실이잖아요."

"네."

"사실 모든 재판은 쇼 비즈니스의 성격이 있어요. 이런 재판은 더더욱 그렇죠. 정치적으로 중요하고 사안이 흥미로운 경우니까요."

"네."

"판사한테도 그렇게 대답할 거예요?"

"네?"

"네, 네, 네만 계속하고 계시잖아요. 그런 태도는 청중들에게 대화에 성심성의껏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분위기를 줄 수 있어요."

"네.... 아, 죄송해요."

"저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죠."

"아니요, 변호사님께 죄송할 일이죠. 이번에 지면 신경 쓰이실 거 아녜요. 기록이 남으니까...."

"이기지 못하면 감옥에 들어가는 건 제가 아니라 네불라 씨예요."

껄끄러운 침묵이 흘렀어요.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고.

"네불라 씨,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그럼 무죄 충분히 가능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지금 네불라 씨 그대로 법정에 가면 그대로 서서 벌 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일 걸요."

"네...."

"그 '네'부터 어떻게 해결합시다. 단답 말고는 대답을 못 하겠으면 그냥 바리에이션이라도 여럿 만들어 놓는 게 좋겠어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맞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겠죠. 자, 어차피 중요한 말은 제가 다 할 테니까 긴장하지 마시고...."

"변호사님."

"왜요?"

"아까 '네'라고 한 거 취소하고 싶어요."

"좋아요. 그럼 다른 대답을 연습해 볼까요?"

그때 했던 바보 같은 얘길 다시 옮기려니 부끄럽지만, 전 이런 말을 했어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변호사가 커리어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하지만 그게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그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죠. 그래도 굳이 덧붙였어요. 변호사가 아니라 제게 분명하게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변호사는 절 안쓰럽게 쳐다봤어요. 솔직히 그런 눈빛을 바랐던 것 같기도 해요.

"네불라 씨,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

"이건 예스 오어 노 퀘스천이에요. '네'로 대답해도 괜찮아요.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니? 당신은 죄가 없어요. 아무것도 몰랐고 오픈카 위에서 손 흔든 게 다잖아요. 기소, 법정, 심문, 이런 것들이 피고를 위축시켜서 괜히 불필요한 죄의식에 시달리게 하는 거예요.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당신이 잘못했다고 치죠. 네불라 씨, 이걸 이해하셔야 해요. 친구한테 거짓말하는 것도 잘못이죠. 바람 피우는 것도 잘못이에요. 친구의 애인과 바람 피우면서 친구한테는 거짓말하는 것도 잘못이죠. 하지만 그런 잘못으로 감옥을 가서는 안 돼요. 그랬다가는 신성한 법치주의의 가치가 훼손될 것이고, 우리의 권리가 침해받을 거예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요? 최소한 제가 의뢰인을 믿는 것보다는 더 본인이 자신의 결백을 믿으셔야죠."

저는 그 말에 완전히 넘어갔어요. 그다음에 한 말에도요.

"무죄판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법망을 빠져나간다던가 죗값을 치르지 않으려는 게 아니에요. 자신이 자신을 얼마나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죠. 판단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직업인 제삼자, 그러니까 판사가 내리는 거고, 우리의 할 일은 그분을 도와드리는 거예요. 유죄 측 입장은 검사가 충분히 말할 테니, 우리까지 우리의 무죄를 의심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네불라 씨, 이 재판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변호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너무 달콤했어요. 저는 결국 변호사의 말을 따랐죠. 다시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해 버린 거예요. 동정 사기 쉬운 피고를 연기하는 건 대역 때 하던 일과 별로 다를 게 없었어요. 변호사가 짜 준 대로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래도 판사는 제게 4년 형을 선고하더군요. 재판이 끝나고 변호사를 다시 만날 일 있었어요. 좀 미안하더라고요. 제가 충분히 저의 무죄를 믿지 못해서 완벽하게 법정에 서지 못했고, 그래서 변호사의 무패 신화에 누가 된 건 아닌가 해서. 그런데 변호사는 절 보고 감격에 차서 말하더군요.

"네불라 씨, 축하드립니다! 4년 형에서 그쳤네요!"

저는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죠.

"독재 정부의 직속 기관에서 열성적으로 6년이나 일했는데, 4년 형이면 기적이에요."

"무죄를 원하신 게 아니었어요?"

"아, 제가 그렇게 말하긴 했죠. 전략이에요. 피고의 마인드컨트롤이 재판에서는 중요하거든요. 무죄다 무죄다 하는 자기암시를 걸어야 그게 태도로 나오는 거죠. 아무튼 네불라 씨, 좋은 싸움이었죠?"

아직도 그때 그 변호사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거나 한 마디라도 항의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워요. 아니, 최소한 감정에 복받쳐 울어 버려서라도 그 변호사가 내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날 얼마나 심하게 배신했는지 알려 줬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때 제 입에서 나온 말은, 소심하고, 조용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 한 단어였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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