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약처방

Regression

뮤지컬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

네불라는 간수가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난다. 아직 기상 시간 전이었고, 교도관의 호출이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끔벅거리며 네불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며칠 후면 출소인데 무슨 문제일까. 어쩌면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복역 기간이 연장된 건지도 모른다. 그편도 나쁘지는 않지, 네불라는 생각한다. 어차피 갈 곳도 없었다. 삭막한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차가운 새벽공기가 콧속으로 파고든다. 거기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간수의 걸음이 네불라의 앞에서 멈춘다. 무거운 노크 소리. 그리고 등 뒤에서 문이 닫힌다. 혼곤한 정신을 일깨울 틈도 없이 독대가 시작된다.

교도관은 지루한 기색이 역력하다. 마치 스스로가 왜 여기에 앉아 있는지, 네불라와 왜 이야기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네불라는 졸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본다. 교도관이 한숨을 쉰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네불라를 향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곧 출소라고. 자네를 위해 사소한 배려를 해줄 수 있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맥락 없는 ‘배려’에 당황한 네불라가 되묻는다. 만 사 년을 수감되어 있었던 범죄자에게 어떤 배려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 말을 들은 교도관이 어색한 움직임으로 이번에는 뺨을 긁적인다.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는 동안, 네불라는 자신이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라는 뜻이야. 자네의 고발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나는 그렇게만 들었네.

 

너무도 새삼스러운 질문이다. 이런 때에라면 더더욱 그렇다. 바란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언제는 존재했던가? 제게는 어떤 자격도, 의지도 없다. 그런데도 네불라는 떠올린다. 아름다운 파라디수스의 풍경. 싱그러운 나무에 통통히 맺힌 올리브와 포도, 바닷가의 짠내, 마을에 정갈하게 배치된 흰 건물들. 축젯날이면 산발하던 즐거운 웃음과…… 순회하는 유세 차량의 꽁무니를 쫓아 뛰어오던 아이들. 다정한 이웃들의 환성. 박수 소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 말은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튀어 나간다. 제 목소리에 놀란 네불라는 황급히 교도관의 눈치를 살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화난 기색이 없다. 교도관의 피곤한 눈 안에 들어찬 것이라고는 희미한 경멸과 그 뒤로 묻어나는 약간의 연민, 그리고 어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정리하고픈 바람이 전부다. 새 여권이면 되겠군, 교도관이 중얼거린다. 그걸로 끝이다. 네불라는 교도관의 성의 없는 손짓을 따라 문을 열고 나간다. 그를 여기까지 안내했던 간수가 아직 앞에 버티고 서 있다.

 

거센 바람이 들이친다.

소금기를 흠뻑 머금은 공기가 피부에 질척하게 들러붙는다.

여행용 가방 안에는 여권과 돈 조금, 갈아입을 옷가지 두어 벌이 전부다. 네불라는 낯선 거리 한복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휘청인다. 수감되어 지내는 동안 무섭도록 많은 것이 바뀌었다. 분명 그가 나고 자란 곳인데도, 처음 보는 이국의 풍경 속에 내던져진 것만 같았다. 어이, 길 막지 말라고! 누군가의 성난 외침이 귓가를 때리고 지나간다. 네불라는 연신 고개를 숙인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몇 번이나 어깨를 떠밀린 뒤에야 네불라는 구석진 건물의 뒤편으로 몸을 피할 수 있다. 그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신문 한 장을 꺼낸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낡은 물건도 아니지만 네불라에게는 그 세월이 억겁 같다. “파라디수스 공화국 해체”. 네불라는 굵은 글씨로 쓰인 헤드라인을 손끝으로 짚어 본다. 글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지금 파라디수스가 그렇듯이.

이름은 바뀌었지만 이 땅은 그대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기는 했지만, 어쩌면 남은 사람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겨우 지명이 달라졌다고 해서 여기에 살던 이웃들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증발해버리는 건 아니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저를 알아볼 수도 있다. 그들의 재판을 중계한 방송은 그 시절 최고의 화젯거리였으니까. 한 명이라도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 그 때 얼마나 많은 지역을 순회했던가. 그 트럭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네불라는 딱딱한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댄다. 바깥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그를 흘끔대며 지나간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왜 여기로 오고 싶다고 했을까. 이곳이 정말 아름다운 고향이었던 적은 있었나? 차라리 모두가 화를 낸다면, 저를 가차없이 때리고 욕한다면 기분이 좀 나아질 텐데. 그러나 그 기분이라는 것 또한 이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네불라는 신문을 다시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제법 나이가 든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본다. 이 손이 한때 그분의 손이기도 했다는 것을, 지금까지도 잘 실감할 수 없다. 그래서 네불라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늘 바깥, 도로 한복판으로. 퇴근 시간대의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나온다. 네불라는 허리와 어깨를 펴고 고개를 꼿꼿하게 든다. 누구나 자신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어떤 비난이나 멸시도 제게로 날아들 수 있도록. 그렇게 서 있는 동안 네불라는 또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저마다 몹시 바빠 보인다. 그들은 모두 정확한 방향을 향해 걷거나 뛰고 있다. 그때 저기, 저편에서 누군가 네불라가 버티고 선 쪽으로 씩씩대며 달려온다. 네불라는 손에 든 가방을 꼭 쥔다. 사탕이 든 상자를 몰래 뒤지는 어린애처럼 가슴이 뛰었다. 머리꼭지까지 피가 쏠리는 듯한 고양감이 휘몰아친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잔뜩 화가 난 여자는 그대로 네불라를 지나쳐 반대편 길목으로 사라진다. 네불라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누구도 네불라를 알아보지 못한다.

해가 진다.

거리에 밀물처럼 어둠이 차오른다. 내려앉기 시작한 땅거미가 네불라의 그림자를 덧칠하며 끝내는 그의 전신을 집어삼킨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아직 어렸을 적 가족들과 바닷가에서 놀던 때의 일이다. 간조였고, 조개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말만큼은 잘 들었던 덕에 목숨은 겨우 건질 수 있었지만. 네불라는 힘차게 밀어닥치던 파도를, 순식간에 주변을 둘러싸던 물의 장벽을 잊지 못한다. 머리가 다 잠길 만큼의 깊이에 갇혀 있는 동안 사무치던 절망과 무력감. 아무리 소리쳐도 그들끼리 웃고 떠드느라 듣지 못하던 가족과, 온몸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가던 그 순간의 아득한 공허감을. 네불라는 지금 다시 느낀다. 이번에는 그를 구해 줄 손이 없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네불라는 생각한다. 그가 알던 파라디수스에 대해. 그가 살았던 고향에 대해.

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까?

고향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결국 그리웠던 것은 ‘파라디수스’가 아니었던 거지. 네불라가 웃는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자신을, 그대로 버려진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가장 익숙하고 편하니까. 그런 비관이야말로 아주 오래된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네불라가 운다. 그는 어떤 노력도 무용하다는 것을 직시한다. 그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기적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네불라는 마치 투명한 수조에 갇힌 것 같다. 모두가 들여다볼 수 있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그에게 꼭 들어맞도록 맞춤된 관이나 감옥. 숨이 막힌다. 넥타이를 끌러내려던 네불라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편안히 숨쉴 수 있는 권리가 제게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넥타이를 느슨하게 한다. 셔츠의 단추도 두 개쯤 풀어낸다. 거리에 붐비던 인파가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렇게 길거리에 영원히 서 있을 수는 없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는 어디에서든 똑같이 비어 있을 것이었다. 네불라는 정처 없이 걷는다. 일단은 바다를 좀 더 보고 싶었다. 가없이 검은 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도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네불라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구겨진 신문이 만져진다.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이미 많은 배려를 받았다. 가정에서, 극단에서, 본부에서, 감옥에서. 그것들은 네불라가 이름을 잃어버린 지금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 어떤 증명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네불라는 발밑의 땅이 푹신한 모래바닥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낀다. 기회는 언제든 올 것이다. 어떤 기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언젠가는 확인받을 수도 있겠지. 끝없이 장대한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추운 바람이 불었다. 그게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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