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수정실록] 초혼(招魂)

Ulenflucht by 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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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을 기반으로 한 창작물이며 주관적인 캐릭터 해석 및 상상을 포함합니다.

※ 작품 전반에 걸친 스포일러 有.

※ 특정 캐스트의 노선을 참고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그 날 이후로 고이 챙겨두었던 붓을 꺼냈다. 제 명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나버린 벗의 유일한 유품. 남의 손을 타기 전에 제 손으로 거두고자 사람을 보내는 대신 잠행을 핑계 삼아 직접 가본 집은, 간소함을 넘어서서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눈썹이 처지도록 난처해 보이는 표정으로 완곡하게 마다하는 것을 모른 척한 채 이따금씩 자신이 바득바득 고집을 부려서 들려 보낸 서책이나 패물 따위만이 가지런히 방 한편에 정리되어 있을 뿐. 소명 하나만을 품고 살다 간 이가 남긴 흔적은 온 궐을 휩쓸었으나, 정작 그가 남긴 물건은 주인의 성정만큼이나 곧은 붓과 작은 무덤과 분통 어린 고변을 담은 상소문뿐임을 깨닫고 허허롭게 웃어버렸다.

   결국 옷가지와 남은 물건은 거두어 모두 태우고, 마지막까지 품속에 지니고 있던 붓 하나만을 남기어 유품 삼아 줄곧 보관해왔더랬다. 동궁전 처마 밑에 나란히 앉아 비를 보던 어느 날 갈 곳 잃은 채 말라비틀어지는 벗을 가까이 붙들어두기 위하여 자신이 건넨 이래로, 이제는 곁을 떠나버린 이가 하루도 빠짐없이 몸에 지니던 물건. 내 자네에게 주었던 것이거늘, 어찌 다시 내게로 돌아왔단 말이냐. 차마 소리 내어 꺼내지 못한 넋두리 대신 뱉어낸 한숨에 적막이 깨졌다. 결국 이 붓이 네게는 독이 되었을까.

   주인을 잃고 뽀얀 먼지가 쌓일 틈도 없이 비어버린 수찬직을 채우러 온, 이제는 다른 이의 자리가 되어버린 책상으로 손을 뻗어 손아귀에 그러쥐고 있던 붓을 올렸다. 매일같이 사초를 쓸 때도, 남몰래 역모의 증좌를 찾으러 다닐 때도, 내게 올릴 고변을 적어낼 때도 함께였을 터이니, 너도 홍수찬만큼이나 많은 것을 보았겠지. 오랜 세월 사람 손을 타 반질반질한 붓대를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피웅덩이와 불길을 거치며 본래의 냄새가 죄 빠졌을 법도 하건만 그간 내내 배어 있던 먹향이 섞여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홍주형,”

   끝내 감지 못하고 희뜩하게 뜨인 눈. 초점 없이도 끝까지 마주하던 눈. 내 아직도 그 올곧은 눈을 잊을 수가 없어. 뒷산에서 자규 울음이 들릴 때마다 잠을 깨어 자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붉은 진달래가 피어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걸음걸음 서성인다네.

   “홍주형,”

   돌아오지 못할 강이라, 내게 그리 이야기하였지. 허나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은 자네뿐인 듯하니 이리 통탄스러울 데가 없구나.

   “……홍주형.”

   결국 끝까지 불러주지 못하고 보낸 이름을 세 번, 한스럽게 연달아 토해냈다. 이제 와서라도 네 이름을 부르면 마지막 가는 모습조차 지켜봐 주지 못한 네 혼이라도 돌아올까.

   퇴청해도 될 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묵묵히 곁을 지키던 벗이 사라진 궐은 참으로 조용했다. 이 큰 궐보다 더 큰 왕이 될 것이라 약조하였는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는 사관의 본분을 숨이 끊어져서도 지키겠다는 양 뜨고 있는 눈을 감겨주려 손으로 덮었을 때의 감각이 여전히 맴돌았다.

   이마에 끓는 열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자 뜨거운 불길의 잔재 속에서 몇 번이고 아래로 툭 떨어지던 고개가 잔상처럼 눈꺼풀 뒤에 맺혔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구태여 막지 않으며 자리에 누웠다.

   “전하, 움직이지 마소서. 아직 열이 높습니다.”

   눈물에 젖은 채 까무룩 잠에 빠졌다가 다시 어렴풋이 눈을 떴을 무렵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언제 곁을 떠난 적이 있느냐는 듯 귀를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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