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同生
자운과 자하의 이야기
※ 소설 <진혼기>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해석과 상상을 덧붙인 창작물입니다.
※ 작품 전반에 관한 스포일러 有.
※ 김자하 생일 기념으로 쓴 글입니다.
零.
올해 정월 대보름은 자운이 태어나서 지낸 것 중 가장 조용한 정월 대보름이었다. 오기일(烏忌日)을 맞아 궁에서 주관하는 제사에만 참석하고, 뒤이어 나라의 괴이한 변고가 해결된 이래 새로 맞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성대하게 열린 연회는 몸 상태를 핑계로 빠져나왔다.
동지를 지났어도 해는 여전히 짧아 하늘은 이미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가마 밖으로 보이는 거리 곳곳이 쥐불놀이와 달집태우기로 환했고, 어린아이들은 구르듯이 뛰어다녔다. 자운은 먼빛으로나마 구경할 마음조차 나지 않아 곧장 집으로 돌아와 내실에 틀어박혔다.
닫아둔 창 너머로 떠들썩한 소리가 아득하게 넘어왔다. 자운이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금강경을 베껴 쓰다 고개를 든 것은 어느덧 함박눈이 소리를 집어삼키는 새벽이었다. 창을 열자 홀로 밝혀놓은 촛불이 바람에 가볍게 일렁였다. 그는 촛불만 불어 끄고 검과 피풍의를 챙겨들어 조용히 나섰다. 열린 채 남겨진 창으로 찬 공기와 함께 이따금 눈송이가 들이쳤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새벽잠 없는 늙은 종이 발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나직한 목소리에서 숨기지 않은 걱정이 묻어났다. 자운은 걸음을 늦추지도 서두르지도 않은 채 마구간으로 향했다.
“내 한 몸 건사 못 할까.”
“아무리 그래도 마차나, 하다못해 호위무사 하나라도…….”
자운은 피풍의를 살짝 걷어 검집을 내보였다.
“오늘 안에 돌아올 테고, 자네 말고도 몇몇에게 행선지를 일러두었으니 이만 되었네.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건 질색이야.”
“…….”
날서 있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으나 여전히 단호했다. 천천히 자운을 뒤따르던 종은 말을 더 붙이지 않고 그가 흑마 한 필을 내어 오르는 것을 잠자코 도왔다.
동이 트기 직전 어둑하게 시퍼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자운이 이내 말을 몰아 멀어졌다.
壹.
간밤에 내린 눈으로 걸음마다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설영은 끼고 있던 반지에서 온이 선배를 불러냈다. 초옥에 들어앉은 후 월계 영기를 본격적으로 수련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새끼 용은 몰라보게 생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근래 몇 개월간 기를 누르고 있던 존재가 사라진 데다 산속이라는 환경까지 더해져서인지, 새해를 맞아 기가 산 음귀들이 밤부터 지치지도 않고 기승을 부렸다.
“온이 선배.”
설영이 한 무리를 잡아 허공에 던지자 도철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삼키고는 만족스레 드러누웠다.
‘날은 날이구나.’
그는 내친 김에 온이를 데리고 식사를 겸해 인근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도철은 귀신들이 멋모르고 자신에게 달려들 때마다 덥석덥석 먹어치웠다. 그러고 보니 아주 조금 자라긴 했나? 설영은 먹는 양에 비례하지 않는 성장 속도를 눈으로 아리송하게 대중해보며 저만치 앞서가는 온이를 따라갔다.
오두막에 다시 가까워질 즈음,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러 채의 버려진 오두막 중 가장 아래쪽 집의 울타리에 까만 말 한 마리가 매여 있었다. 그 앞으로 눈 덮인 산길을 따라 찍힌 발자국 한 쌍. 설영은 온이를 반지에 집어넣고 흔적을 쫓았다.
숨을 뱉을 때마다 하얗게 김이 서렸다. 발자취는 설영의 오두막 앞을 지나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폐허가 된 무덤을 향했다. 무덤 입구 앞에 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바람에 펄럭인 어두운 피풍의 아래로 화려한 옷자락을 언뜻 본 것 같았다. 설마. 설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자운이었다.
“엉망이구나.”
설영이 다가오는 기척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냉랭한 감상을 한 마디 뱉었다. 이미 무덤을 한 바퀴 둘러본 모양이었다. 조금 해쓱해졌다는 점을 빼고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무너져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고하고 단정했다.
“직접 오시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대동하던 인원은 다 어찌하고…….”
“축하받을 이가 이미 세상에 없으니 팔 년간 어디 처박혔는지라도 확인해야겠어서. 번잡하게 다니긴 싫어 다 물렸다.”
“귀신날이라 오시는 길에 방해가 많았을 텐데요.”
“그 정도 요기(妖氣)를 헤치지 못할 정도로 경험이 일천하지는 않네.”
하긴. 설영은 자운을 마주쳤던 밤을 떠올렸다. 직접 검을 드는 모습을 본 것은 그 한 번뿐이었으나, 호위무사의 검을 뽑아 휘둘렀을 때의 영기와 실력이 그 정도였으니. 더군다나 피풍의 자락 사이로 드러난 검 자루는 고급스럽게 세공되어 있었다. 아마도 본인의 검인 듯했다.
“게다가, 아무리 귀신날이라 해봐야 내게는 그저 동생 생일일 뿐이지.”
한때 놓였던 진묘수의 빈자리, 무덤이라 부르는 것이 무색할 만큼 다 부서져 황폐한 터, 그 위를 덮은 채 아직 녹지 않은 눈. 자운은 마지막으로 그 모든 풍경을 눈에 한 번 담고, 더 볼 것 없다는 듯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터는 명당으로 골랐군.”
설영은 망설임 없이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자운을 뒤따랐다. 그는 자운이 사벌주에 온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곧장 월성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멈춰 선 곳은 설영의 오두막 앞이었다.
“설영랑이 지내는 곳이 이곳이지.”
“예.”
뭔가 용건이 더 있는 건가? 내심 긴장한 설영은 먼저 들어가 자운을 안내했다. 작은 상 앞에 마주앉은 자운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윽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빛바랜 비단에 싸인 금령(金鈴) 한 쌍. 금으로 된 작은 몸체에 섬세한 장식이 붙어 있었다. 그는 그중 한쪽을 설영에게 내밀었다.
“설영랑이 맡아주게.”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연 자운은 반지를 영사해달라고 가져왔을 때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내놓았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이번 용무는 영사가 아니었으므로 설영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맡아…달라고요?”
“원래는, 제 손으로 죽을 자리를 만들었다기에 넣어주려 가져온 것이다.”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망과 한탄을 비롯한 여러 심경이 뒤섞인 복잡한 눈동자였다.
“한데 무덤이 너무 망가졌더군. 해서 설영랑에게 대신 맡기려 하네.”
“상선께서 쓰시던 물건입니까?”
설영은 금령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같이 다니던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인 데다 어른이 장신구로 차기에는 다소 크기가 작은 듯도 했다.
“어린 시절에. 그 해 드물게 고뿔에 걸려 앓아누운 동생을 두고 혼자 시장구경을 나갔다가 내가 사다준 것이지.”
자운은 토라져 이불 속에 파묻혀 있다가도 선물을 받아들고는 열이 덜 내린 얼굴로 기뻐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남들이 아무리 천랑이니 뭐니 떠들어도, 제게는 늘 시장구경 좋아하는 철없는 동생이었다. 딱 한 순간을 빼고.
듣자 하니 청룡진도의 서검랑과 죽은 서준랑 사이를 푸는 데 일조했다 하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자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집안사람과의 해묵은 응어리도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주제에. 생전 동갑내기라며 내심 즐겨 어울리던 벗의 일이었으므로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반길 만한 것이었으나 그로서는 기가 차는 노릇이었다. 명색이 화랑도의 수장이라는 자가 혈육과의 사사로운 다툼으로 왕경의 주요 인사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으로 공공연하게 반목을 했으니. 팔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남매의 관계를 둘러싸고 앞뒤로 오가는 말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을 뿐. 상대등 부인에게 낮 말을 가져다줄 새와 밤 말을 가져다줄 쥐는 왕경 도처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런 일에 신경이라고는 쓰지 않을 것 같은 동생이라고 소문을 몰랐을 리 없었다.
그래. 차라리, 제 집안의 일조차 가지런히 하지 못하는 이에게 나라의 대소사에 관여하는 국선 자리를 계속 맡길 수는 없다며 누군가 끌어내기라도 했다면. 강산의 팔 할이 변할 시간 동안 은거하다 돌연 나타난 이가 상선 자리에 올라앉아 지금의 세상물정에 나서도록 둘 수는 없다고 누군가 강변하기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내 동생은 목숨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운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제멋대로 잠적해버린 줄로만 짐작하고 내내 미루었던 팔 년치의 회한이 숨 막히도록 밀려들었다.
“편지에 집안의 가보를 넣어 돌려보냈더군. 그것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며 옛날 물건을 정리하다 마침 이것이 나왔네.”
“…….”
“어릴 적에는 그렇게 지내다가도, 의사와 상관없이 날 때부터 얼굴 맞대고 좋은 꼴 싫은 꼴 다 보며 자란 동기(同氣)간이니 그리 된 것이겠지. 둘 다 마냥 살갑게만 굴 성정도 아니고.”
한 번 말없이 사라졌던 자하가 두 번째에는 남긴 마지막 편지를 받아들고 자운은 많은 생각을 했다. 진정 몰랐던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훌쩍 떠났다 갑작스레 돌아온 동생의 얼굴이 변함없다는 걸. 그게 몹시도 이상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몰랐던가.
상선이 서라벌에 돌아왔다는 소식만 전해 듣다가 처음으로 재회한 날을 끊임없이 곱씹었다. 나라에 닥친 큰 재앙을 해결한 후 속세와의 연을 끊고 마음 편히 지내다 온 것이라손 쳐도, 흐른 세월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여전’했다. 변함없는 성질머리로 물어뜯는 통에 그 생각도 일순 날아갈 뻔했으나 자신이 그 이질감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자운은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제 동생은 세간에서 그토록 떠들어대던 대로 ‘천랑성’이, 정말로 사람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는 셈이었기에.
꼬리를 무는 상념을 끊어낸 것은 종이 사이에서 떨어진 사슬 조각이었다. 돌아온 것은 원형의 극히 일부분뿐이었지만 팔 년 전 사라진 가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자운은 눈앞이 하얘졌다.
그는 또 다시 자문했다. 처음에는 그 애가 왜 그래야 했는지, 왜 그렇게까지 감수해야만 했는지를 물었다. 해답은 금방 나왔다. 다음으로는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를 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일이 걸렸지만 이 역시 답이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어떻게 했어야 그 애를 막을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자운의 머릿속은 거기서 무너졌다. 지나온 일 사이에서 질답하는 것은 고통스러워도 막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벌어진 결과를 놓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기란 독무(毒霧) 속을 헤매는 짓이었고, 가장 괴로운 것은 수많은 갈래 중 어떤 것이 바라는 답으로 이어지는지 결국 자운으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무엇을 생각해내든 이미 엎질러진 물은 흔적도 없이 증발한 뒤였다.
어쩌면 자하와는 언젠가 어긋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맏이로서 가족을 지켜야 했기에 늘 과거를 붙들었고 동생은 천랑성의 화신으로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누구보다 한 발 앞장서서 미래로 나아갔다. 그 끝에 몸을 담글 곳이 황천, 어쩌면 그보다 더한 지경일 가능성을 안 순간조차도.
기왕에 반대 방향을 보는 삶이라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기댈 곳이 되어주었어야 했는데. 천하의 국선이 그나마 등을 댈 곳은 누님이었음을 자운은 뒤늦게 깨달았고, 딱 한 순간 기둥이 되어주질 못했음에 자운은 때늦게 후회했다.
“사람 성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지. 다음에는 늦지 말아야지, 늦지 말아야지. 그리 생각해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기회는 이미 지나간 다음이니.”
피로를 품고 아득하게 먼 곳을 바라보던 자운의 눈매가 다시 단단해졌다. 그는 설영에게 건네고 남은 나머지 한쪽 금령을 다시 빛바랜 비단으로 감쌌다.
“설영랑은 동생의 혼을 부르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그 애가 돌아올 것이라 믿는가?”
“예. 약속을 남겼으니까요. 자운랑께서는요? 상선의 혼이 돌아올 것이라 믿으십니까.”
자운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뱉은 말은 늘 지켰다. 제 입으로 약조했으니 돌아올 테지, 나 역시 그러길 바라고. 하지만 돌아온 자는 내 동생이 아니야.”
“…….”
“내 동생 김자하는 출생부터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천랑이고, 국선으로서 목숨을 버린 화랑이며, 상선으로서 다시 한 번 혼(魂)을 바치고 백(魄)을 흩어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한 번으로 족한 삶이 다시 들이밀어지는 꼴은 볼 수 없네. 그러니 그 애는 ‘김자하’와 연관 없이, 나와도 연관 없이, 그냥 자하로만 살아야 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든.”
꾹꾹 눌러 말한 자운은 속이 막히는 기분에 잠시 멈추고 소리 없이 숨을 가다듬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은 침착하기 그지없었으나 눈 안쪽부터 지끈거리며 열이 오르는 듯했다.
“대신,”
다시 차가우리만치 잘라 말하는 자운의 눈빛이 형형했다. 그는 턱짓으로 설영의 손에 들린 금령을 가리켰다.
“그것만 전해주게. 사람은 살다가 언젠가 도무지 어찌할 길 없이 막막한 상황에 부딪힌다. 그때 그 금령을 들고 서라벌에서 ‘김자운’을 찾으면 된다고. 무슨 일이 되었든 기댈 수 있을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자운은 제 몫의 금령을 다시 품속에 넣으며 일어섰다.
“이곳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네. 간간이 서신이나 보내도록 하지. …잘 지내게.”
손에 쥔 금령이 묵직했다. 설영은 미련 없이 말을 매어둔 곳으로 가는 손님을 말없이 배웅했다. 윤기 나는 흑마가 자운을 태우고 멀어졌다.
貳.
「네 매형 앞에서는 비밀로 했다만, 오른팔을 다친 게 맞지? 남들은 속여도 누님의 눈은 못 속이지. 긴 말 하기 전에 들어와서 치료받아라.」
꿈이다.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지만 자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은 일어난 적 없는, 단지 뜻하지 않게 보았을 뿐인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이 아는 익숙한 자운의 얼굴이 그 모습 위로 덧씌워졌다.
‘국선.’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자하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목소리의 주인이 못마땅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누님?’
‘잠시 할 말이 있네만.’
그는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서준랑과 그를 비롯한 청룡진도 무리에게 손을 흔들어 먼저 풍류관으로 들여보냈다. 다시 돌아보자 시비들을 멀찍이 떨어뜨려둔 자운이 두 걸음 앞까지 성큼 다가와 노려보는가 싶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른 어깨더냐?’
‘……어디서 계시라도 받았습니까? 태천관은 누님이 되었어야 하는데.’
‘김자하.’
마지못해 긍정의 의미로 한숨을 푹 쉬자 자운이 뾰족하게 눈을 떴다.
‘스치기만 해 별 것 아닙니다.’
‘내 모를 줄 알았니? 속일 눈이 따로 있지. 오늘 중으로 집에 들러서 치료받도록 해. 의원에게는 미리 연통을 넣어둘 테니.’
‘하지만…….’
‘잔말 말고. 이만 들어가라.’
불평하기 전에 말을 끊은 자운이 쌩하니 돌아서서 시비들을 이끌고 가버렸다. 고집이 세기로는 남매 간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자운이 저렇게 나오면 황소 열 마리를 끌고 와도 못 이기는 날이었다. 나중에 시간을 빼야겠군. 덩그러니 남아 왼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던 자하는 한껏 성가셔하는 표정으로 발을 뗐다. 풍류관에 들어서는 순간,
자하는 깨어나 얼굴을 잔뜩 구겼다. 오락가락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는 장의자에서 일어나 앉았다. 옆 구석에 깔아둔 천 위에는 미리 받아 화랑도 전원의 이름과 마지막 말을 써넣은 책력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오랫동안 피워둔 향은 다 타고 연기만 남아 떠돌았다. 자하는 그 자취를 빤히 바라보다 걸어가 창을 활짝 열었다.
시린 바람이 들이치자 종이를 여러 장 올려두었던 책상이 어질러지고, 새장 속에서 윤기 도는 푸른빛 새가 깃을 크게 부풀리며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새장 밖으로 떨어진 파란 깃털을 주워 들여다보다가 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밖에서 날고 싶으냐?”
새와 눈을 맞추던 자하가 무심하게 새장을 열었다. 거세게 날갯짓하던 새는 문이 열리자마자 날아갔다. 날고 싶을 때 날다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와라. 그는 창과 새장 문을 열어둔 채 흩날린 종이만 주워들고 다시 돌아와 앉았다.
책상 위는 붓과 벼루, 가령 부부 앞으로 적어 봉한 편지, 미리 꺼내둔 사슬 조각, 먹칠을 해서 구긴 종이 몇 장, 그리고 새로 낸 종이로 어지러웠다. 자하는 한참 동안 비어 있는 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붓을 들어 마지막 편지를 써내려갔다.
參.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설영은 그간 쌓인 서신을 정리하다 온이와 눈밭에서 구르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세월에도 그다지 자라지 않은 새끼 용과 다르게 배를 곯아 핼쑥하던 아이는 일주일이 지나자 금세 건강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함께 지내며 매일 얼굴을 보고 있지만 여전히 그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신기해 그는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그때 옅은 기척이 느껴졌다. 초혼부는 그 대상이 돌아옴으로써 목적을 다해 곧 영기를 거두어들였으나, 아주 오랜 기간 꾸준히 흘려보냈던 기운이 그럼에도 잔류하는 모양인지 설영은 아직도 종종 초옥 일대에서는 미미한 변화까지 감지하곤 했다. 한창 노는 데 정신이 팔린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지만 제법 떨어진 다른 오두막 근처에서 누군가 서성이고 있었다. 방에서 서신을 확인하던 설영은 보던 것을 한쪽으로 모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올게.”
눈을 뭉치던 아이와 그 옆에서 눈더미 위에 주저앉아 있던 새끼 용이 손을 흔들었다. 설영은 그들을 뒤로하고 초옥을 빠져나왔다. 누구지? 둘의 소식을 궁금해 할 이도 많았고 설영 역시도 그 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의 근황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단은 돌아온 이가 이전 일을 기억하는지, 한다면 얼마만큼 떠올리는지, 왕경에 가도 괜찮을지 따위를 가늠하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기에 객을 받지 않은 채 조용히 초옥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다. 월성에 보낸 서신에도 차차 상황을 보고 조만간에 들를 테니 걸음하지 말라 일러둔 차였으므로 직접 이곳을 찾을 이는 별로 없을 터였다.
인영이 다가오는 것을 본 객은 세워둔 말 곁에 가만히 서서 초옥 쪽에 눈길을 두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가까워진 설영과 눈이 마주치자 담담한 목소리로 알은체했다.
“나오시길 기다렸습니다.”
그와 안면이 있는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아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려보다 몹시 닮은 이를 떠올린 설영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자 상대는 그제야 옅게 웃었다.
“어머님을 기억하시는군요.”
일전에 자신에게 부탁을 남기러 왔던 이의 수려하면서도 단호한 모습과 비슷한 듯하다가도 그보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깃든 인상. 장성한 자운의 첫째 딸임을 깨닫고 다시 보자 과연 언젠가 다른 세계에서 마주쳤던 어린 시절의 얼굴이 단연 눈에 들어왔다.
“자운랑께서는……?”
그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짙은 슬픔이 배어든 눈빛이었다. 그렇구나. 영원인 듯 찰나인 듯 흘러 그간 쌓인 서신만으로는 쉬이 체감하지 못하던 시간이 그제야 설영에게 조금씩 와 닿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아주 가끔 돌아가신 숙부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주로 해가 짧고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밤이었지요. 그리고 떠나시기 전 설영랑에게 전해달라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직접 가기를 바라셨기에 이리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품속에서 설영의 이름이 적힌 서간과 빛바랜 비단을 꺼내어 설영에게 건넸다. 설영은 그것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예전에 자운이 맡기고 간 금령. 그 나머지 한쪽이 제게 왔다. 설영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상대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드리기만 하면 알아보실 것이라 하셨는데, 말씀대로군요. 어머님의 부탁은 잘 마무리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번 만나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망설이다 던진 설영의 물음에 대화 상대를 비껴간 시선이 순간 초옥에 머물렀다. 그러나 호기심과 어렴풋한 그리움이 섞인 눈길은 금세 거두어졌다.
“이곳에서 본 것으로 되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는 짧은 목례를 남기고 말에 올라 떠나갔다.
설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손에 들고 있던 서간을 펼쳤다. 추위에 둔감해지기도 했고, 어쩐지 초옥으로 돌아가기 전에 읽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영랑과의 왕래는 이것이 마지막이 되겠군. 그간 부탁했던 것을 잘 보관해주어 고맙네. 하여 전에 맡겼던 금령 중 나머지 하나도 맡아주었으면 해. 이제 내 손을 떠나니, 후일 어찌할지 역시 설영랑에게 맡기지.]
자운답게, 짧고 간결한 내용이 달필로 적혀 있었다. 설영은 서간을 접어 품속에 조심스레 넣고 비단을 풀어봤다. 긴 세월이 지나 다시 본 금령은 손을 많이 탄 듯 반질반질하게 빛을 냈다. 그 모양이 재회한 금빛 눈동자를 꼭 닮아 있었다.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초옥에 돌아갔다. 이미 산길을 덮은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다시 함박눈이 날리기 시작해 발자국 위로 덧쌓였다. 아이와 도철은 눈 놀이를 실컷 했는지 사이좋게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설영은 그 곁에 앉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조용히 괴황지와 경면주사를 꺼내어 마루로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왕생부를 쓰기 위함이었다.
終.
“어머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겠니.”
“그래도, 그렇게나 기다리셨는데……. 초옥인에게 전하셨다던 약조는 저희가 이어받으면 되는 일이니까요.”
병색이 짙은 모친 곁에서 걱정하는 딸의 말에 자운은 옅게 웃었다.
“내 미련이고, 내 후회였다. 너희가 거기에 얽매일 이유가 없어. 게다가 그 아이가 하루라도 이르게 돌아왔으면 되었을 일, 그러질 못해 기회를 놓친다면 제 탓인 게지.”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하면 되었다. 그 일에 관해서는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으로 족하단다. 자운은 딸의 손을 맞잡은 채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
평생의 회한은 끝내 풀어지지 않는 앙금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따금씩 불쑥 고개를 쳐들 때마다 자운은 그것이 지독하게 굳어진 자신의 성정이라는 사실을 못내 인정해야 했다. 내 아직 열반에 들기에는 갈 길이 먼 듯하니, 돌고 돌다 언젠가 다시금 연이 닿으면 그 아이와도 만날 날이 있겠지. 자운은 선선한 가을바람을 쐬며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었다.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구나…….’
* 헷갈리는 부분은 찾아서 확인하고 썼지만 기본적으로 완독 자체는 한 번 하고 적은 글이라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금령(金鈴)은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모티프를 따 왔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전시회에서 봤던 것)
* 자운의 마지막 생각은 월명사의 <제망매가> 구절에서 차용했습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