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자하] 아주 작은 조각 글 (2)

진혼기 패러디

* 완결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초옥완자

자하가 아팠다. 온몸이 작신작신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고 했다. 열이 심하게 나더니 몸을 가누지 못했다. 드러누운 지 사흘째에 의식을 잃었다. 백호영도의 형님들에게 연락해서 도움을 청했다. 의사와 함께 서검랑과 효월랑이 왔다. 진림이 직접 오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해서 애가 탄다는 말과 함께였다.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원인을 찾지 못했고 해결책 또한 제안하지 못했다. 임시조처로 열을 내리는 약을 지어주며 신열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설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열일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설영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

손으로 휘저어 부적을 만들어 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이 유려했다. 의사와 서검랑과 효월랑은 벽 너머에서 자고 있었다. 설영은 잘 필요가 없었지만, 이 밤에 홀로 깨어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새벽에 자하는 설영의 곁을 지켰다. 설영이 깨어난다면 귀한 술을 내어주겠다고 말했고 설영은 그 술향을 잊지 않았다.

입을 벙긋거리다가 다물고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짓이겨져 피가 났지만 느끼지 못했다. 자하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엇을 해도 자하가 깨어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무력감과 두려움으로 심장이 썰려 나갔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자하의 손을 잡았다. 자하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고 따뜻했다. 그 온기 덕분에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자하는 성인이 되기 전 몇 달간, 매일 세어가며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어른이 되는 것이 그리 좋으냐고 물었을 때 ‘당연히 좋지, 설영은 안 좋아?’라고 답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자 굉장히 침착했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설영, 이제 난 아이가 아니야.’

설영은 무슨 뜻인지 알면서 모른 척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금안에 일렁이는 열기를, 장난스러운 행동에 담긴 지나친 다정을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설영은 자하의 보호자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둘만의 세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이 컸고 애착도 강했다. 자하는 드넓은 세상을 본 적이 없었고 다른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설영이 자하를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았다.

설영은 자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목덜미와 머리카락 사이도 땀범벅이었다. 괴로운 듯 어깨를 움칠거리다가 숨결이 거칠어졌다. 한참 쌕쌕대다가 호흡이 순해졌다. 자하는 싸우고 있었다.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하는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갔지만, 마음은 언제나 생을 향했다. 살고 싶어 했고 살 방도를 모색했다. 부서지고 흩어져 수천 조각이 되어도 푸른 불빛에 의지해 돌아왔다. 그리하여 설영은 느꼈다. 제 운명이 자하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무엇보다 자신이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설영은 자하를 위해서라면 어떤 위치에든 설 수 있었다. 부모든 형이든 연인이든 타인이든. 자하의 바람보다 자하가 소중했기에 정인이 되려 하지 않았다. 설영의 소망보다 자하가 소중했기에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았다.

이젠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했어야 좋았을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영은 그저 기다렸다. 자하, 자하, 자하, 나는 이곳에 있어. 돌아와요, 상선.

새벽 해가 새어들었다. 여린 빛이 곳곳을 비추어 방의 윤곽이 희끄무레 드러났다. 조금은 차고 조금은 따뜻한 공기를 폐부로 스몄다. 기묘한 확신이 섰다. 설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래 앓았지만 쇠하지 않은 금빛이 반짝였다. 설영은 다가갔다. 떨리는 손이 설영의 볼에 닿았다. 가볍게 쓰다듬고 입술 위로 옮겨갔다. 설영은 그제야 입술을 깨물어 피가 났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왜 상처를 내?

설영은 미소 지으며 눈물을 삼켰다.

- 사과 안 해?

사과? 설영이 의아해서 물으려 했지만, 그전에 자하가 말했다.

- 내 걸 다치게 하고선 사과도 안 하는 거야? 뻔뻔하기 그지없네.

- ...내 거라니?

설영은 무시로 거절했고 눈치 빠른 자하는 분명 알아들었을 터였다.

- 내가 정했으니 내 거지. 마음이 없다면 모를까 날 열렬히 원했던 주제에 아닌 척하는 걸 어떻게 그냥 둬?

혼란스러웠다. 자하는 빠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밀어붙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동시에 기시감이 들었다.

-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 거절해? 여전히 건방져. 설영랑.

몸에 힘이 빠졌다. 주저앉으려다가 간신히 침상을 짚고 섰다. 참았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울음과 신음이 섞였다.

자하는 손을 까딱거렸다.

- 이리 와. 힘이 없어서 못 일어나겠으니까, 네가 와.

설영은 자하 위로 무너졌다. 자하는 설영의 등을 안고 토닥였다.

- 결국 해냈구나. 수고했어.

자하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배어 나왔다. 한 덩이가 되어 오래 울었다. 자하가 눈물을 그친 후에도 설영은 한참 더 울었다.

설영은 진정하고 한숨을 내쉰 후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자하는 설영을 놓아주지 않았다. 설영의 긴 머리카락이 자하의 손가락 사이에서 흐트러졌다.

- 설영랑,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지금과 같은 관계로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그리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 ...네.

설영은 몸을 조금 일으켰다. 자하를 응시하고 놀랐다. 시간은 설영을 변화시키고 키웠기 때문에 상선과 백의화랑으로 만났던 때와는 달랐다. 그 당시의 설영이라면 눈치 못 챘을 것이다. 설영은 결연하고 강한 자하의 태도 밑에 숨겨진 불안과 애타는 기원을 읽을 수 있었다.

설영은 고개를 숙여 자하의 이마에 입 맞췄다. 자하는 잠시 굳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하는 자기 입술을 톡톡 쳤다.

- 여기도.

설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선을 피하자, 자하가 투덜거렸다.

- 난 일어날 힘이 없다니까. 네가 해야 해. 이제 일상다반사가 될 건데 뭘 그리 부끄러워해?

말문이 막혀 입만 벙긋거리는 설영을 향해 자하는 화사하게 웃었다.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설영은 귀를 막을 뻔했다.

- 어여쁜 부인에게 입 맞춰 주시죠, 낭군님.

자하는 언제나 설영의 상상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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