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자하설영] 春

惡月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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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 1월에 판매했던 자하설영 회지 <달이 지나가는 시간>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 완독스포일러 有 

※ 환자초옥

“설영.”

자하가 옷장 문을 열고 설영을 불렀다.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에 만나 자신을 거둔 남성은 자신을 ‘설영’이라 소개했다. 설영을 만난 모두가 그를 ‘초옥인’이라 부르니, 추측하건대 현 시점에서 그의 이름을 설영이라 부르는 것은 자하가 유일한 듯싶었다.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추운 겨울에 거적때기를 닥치는 대로 겹쳐 입은 자신을 거부감없이 거두었고,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도 그가 툭툭 내뱉는 반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하가 존댓말을 하려 할 때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릴 정도였다. 그는 자하가 만났던 다른 모든 어른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는 자하와 함께 장을 보러 마을로 내려가거나 집에 누군가가 찾아올 때 외에는 어지간해선 집을 비우지 않았는데, 자하가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로 간 줄 알고 주위를 둘러봤었는데, 몇 번의 경험으로 그가 보이지 않으면 먼저 옷장 문을 열어 확인하게 됐다. 지금처럼.

설영이 천천히 눈을 뜨자 자하가 말했다.

“밖에 누군가 온 것 같아.”

설영은 그 말에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좁은 곳에서 잠들며 헝클어진 머리는 풀었다가 다시 묶었고, 구겨진 하얀 옷 위에 얇은 겉옷을 걸쳤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다녀올게.”

“응.”

자하의 표정이 잠시 뚱해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설영이 그의 머리를 짧게 쓸어주고는 사뿐히 문을 열고 나갔다. 애 취급을 다 한다며 뒤로 발라당 넘어가 방의 한가운데에 드러누운 자하가 고개를 슬쩍 돌려 설영이 열고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 귀를 기울이니 두세 명 정도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나누는 말소리가 드문드문 새어 나왔다. 가늘게 뜬 자하의 눈이 언뜻 빛났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네. 일은 잘 끝났어?”

“그렇지, 뭐.”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자 자하가 툭 던지듯 물었다. 설영이 들어오며 선선히 대답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자하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설영랑.”

쿵.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호칭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았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으려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입술을 꾹 깨문 채 문을 닫은 설영이 느릿하게 몸을 돌려 자하를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기억이 났나? 제아무리 자하라지만, 그게 그렇게 쉬이 떠오를 수 있는 일인가? 놀란 표정의 설영을 바라보던 자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제 추리를 늘어놓았다.

“방금 다녀간 사람의 옷을 보니 현무신도의 화랑도인 것 같았어. 설영에게 그리 깍듯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대하지도 않았고.”

자하가 검지를 핀 채로 말하다가 중지를 피며 설영이 청예를 넣어둔 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에 저 상자를 살짝 열어보니 영검이 보이더라고. 그때는 영검인지 몰라 넘겼는데, 화랑과 대화하는 모습을 봤을 때 확신했지. 설영이 백호영도의 사람이 찾아왔을 때는 내가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나갔으니, 아마도 백호영도였던 것 같고.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 어때?”

나 똑똑하지? 라 말하는 듯 자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대단하네.”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설영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부러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몇 번 손뼉을 쳐주었다. 설영이 표정을 바꾸던 그 찰나마저도 놓치지 않은 자하가 생각했다.

‘…다음에는 농담으로도 못 부르겠네.’

그는 영특했고, 사람들의 성향을 판단하는 속도가 빨랐다. 짧은 시간 동안 매일같이 함께 지내며 설영을 꽤 많이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기억이 시작된 시점부터 많은 곳을 헤집으며 떠돌아다녔고, 이곳에서 지내기 전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 누구도, 저런 표정은…….

자하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화랑들이 설영한테 도움도 받아?”

“화랑도 내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

할 수 없는 일을 붙들고 끙끙대지 않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이를 찾아오는 것이다. 조금 진정이 된 설영이 창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악월이라 일이 많나 봐.”


 

아이는 잠이 많았고, 말도 많았다. 날이 어둑해지면 허름한 집에서 잘도 잤고, 해가 뜨면 냉큼 일어나 밤새 그를 살피던 설영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가끔은 설영을 졸라 부적 쓰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가끔 설영이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을 확인하고서 온이와 초옥 주위를 쏘다니곤 했다. 그리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와서는 종일 제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했는지 신나서 떠들어대곤 했다.

 설영은 초혼부를 그리기 시작한 뒤부터 잠을 자거나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해서 밤이 되면 잠들기보다는 제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이 제 환상은 아닌지 조심스레 자하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거나, 정말 가끔은 그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등 여러 방법으로 확인하고는 했다.

설영은 정말 오랜만에 자하의 옆에서 눈을 붙였다. 평소와 같이 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던 손길이 멈추고, 작고 조금은 허름하긴 하지만 사람의 온기가 머무르는 집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축시를 막 지날 즈음까지는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밤 같았다. 옆에서 작게 들려오는 억눌린 신음을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설영은 원래도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소리에 눈을 뜬 설영이 몸을 일으켜 다급한 손길로 자하의 몸을 누르고 있던 겁 없는 잡귀를 떼어냈다. 그러자 한결 숨쉬기 편해졌는지 자하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가위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자하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설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힘이 풀린 금빛 눈동자가 암흑 속에서 일렁였다.

“……화랑은 이런 일도 해?”

조금의 침묵 끝에 자하가 물었다. 설영이 대답했다.

“아마도. …이런 방식은 아니겠지만.”

한참을 얌전히 누워있던 자하가 땀범벅인 모습이 민망한지 연신 투덜거렸다. 그러다 입을 삐죽 내민 채 말했다.

“평소에는 이런 일 잘 없어.”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가 센 편이다. 게다가 곁에 설영도 있지 않던가. 어지간한 잡귀는 그들 주위에 접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월만 되면 자주 이래.”

“아까 낮에 말했지만, 악월惡月이라 그런 걸거야. 귀신이 해코지하는 일이 특히 많이 생기는 달이라서. 내가 옆에 있으니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방심했나 봐.”

설영이 평소처럼 그와 같이 잠들지 않았다면 가위에 눌릴 틈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근처에 올 생각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지금 제 옆에 있는 자하는 설영이 알고 있었던 자하이되, 알고 있었던 자하가 아니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설영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자하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고서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네 탓을 해?”

“……응?”

“그런 악귀들은 원래부터 사람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놈들이잖아. 설영의 잘못이 아니야. 이번 일은 그냥 일이 이렇게 된 것뿐이니까 탓할 거 없어.”

설영의 눈이 커졌다. 과거에 제가 자하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했던 말들을 지금의 자하가 제게 한 것이다.

저놈들은 원래부터 사람을 속이려고 작정한 놈들이다. 그저 그것뿐이다. 내 잘못이 아니다. 단지 일이 그렇게 됐을 뿐이다.

문득 떠오른 그때의 일에 설영이 힘없이 웃자 자하가 물었다.

“왜 웃어?”

“그냥. 상황이 웃겨서.”

그 말에 자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설영을 바라보았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

“또 잡귀가 나타날까?”

“나타나도 네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오늘은 더 안 나타날 거야. 다시 자도 돼.”

“정말?”

“그럼. 왜, 영 껄끄러우면 내기라도 할래?”

“……넌 정말 내기를 좋아하는구나…….”

잠깐 소란스러웠던 오두막에서는 이내 다시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따스한 바람이 불던 어느 봄날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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