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자하설영]잔향下

보존도서관 by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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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上] https://pnxl.me/grtduv

[잔항中] https://pnxl.me/djwtp8


20.

충동이다. 그저 충동이었다. 설영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팔로 제 얼굴을 가렸다.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다 보니, 절로 입술로 손이 갔다. ‘아니야.’ 설영은 변명했다. 환자와 입을 맞추다니. 정말로 비난 받아 마땅했다. 게다가 그것이 제 까마득한 상사라면 더더욱.

'하지만 상선도 괜찮아보였지. 그건 그저 하룻밤의 불장난이었어.'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이어갔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결과는 꽤 대단했다. 설영은 자하가 그리 접문을 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으므로.

…하긴, 꽤 많은 이들과 얽혀봤겠지, 그는. 그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으니까. 답지 않게 떨리는 손으로 제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숨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따뜻했고, 그리고…….

“…….”

마른세수를 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내 설영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속삭거렸다. ‘너는 그를 좋아하고 있잖아.’ 설영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눈을 가렸다. 눈이 부셨던 것이 차츰차츰 가라앉고, 설영은 차분해졌다. 사랑일 리가 없었다. 자신이 품은 감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보다도 얕았고, 하잘것없었다. 그저 호감일 것이다. 호감.

…그렇다면 자하는?

설영은 몸을 돌려 누웠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서,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자신이 접문을 요구했을 때, 자하가 자신을 보던 그 시선은 절대로 휘하의 부하에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이유 모를 열병으로 인해 각혈까지 하지 않았던가? 설영은 이제 정말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그저 열병인지. 정말로…. 정말로, 열병이 맞는지.

그는 정말로 자신을 그저 휘하에 둔 화랑으로 보는 것이 맞는가?

21.

천천히 허공을 가르던 손이 무의미하게 허공을 붙잡았다. 콜록, 기침하는 와중에도 공기로 비린 피 냄새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럼에도 혈향으로 지워지지 않는 짙은 향이 있었다. 자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상선.”

설영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왔을까. 그런 의문이 잠시 동안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웃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어떠랴. 이렇게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의 충동적인 입맞춤 이후로 오지 않기에, 그렇게 끝이구나 싶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화가 났다. 차라리 밀어낼 것을. 무어 득이 될 것이 있다고 거기에서 한참은 어린아이가 입술을 들이미는데 그것을 받아들여. 그렇지만 자하는 설영을 밀어냄으로 얻는 결과 또한 두려웠다. 밀어냈다가 설영이 다시는 저를 보지 않을까봐. 그렇게 이도저도 못하는 머저리 신세가 되어서는, 결국은 휘둘려버렸다.

그래서, 그렇기에 그는 설영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반갑고, 반가워서. 그 시간만큼은 아픔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해야 옳으리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도 자하는 웃었다.

“설영랑이 여기엔 무슨 일이야?”

“그냥요. 시중을 들라 하셨잖습니까.”

“어제까지는 얼굴도 보이지 않더니.”

지친 기색이 완연한 웃음에 설영은 입을 꾸욱 다물었다가 자하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열이 나시지 않습니까. 더 쉬시지 않고요.” “쉬기는 무슨. 이 정도는 멀쩡해.” 제자리걸음을 도는 대화였다. 설영은 더 쉬라 종용하는 것을 포기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붉은 피를 삼키며 자하는 눈을 휘어 웃었다.

“아직 춥지만, 미친 셈 치고 꽃구경이라도 할까, 우리.”

그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제안에 설영은 잠잠히 그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열을 앓는 이답지 않게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그 냉기는 필시, 짙고도 짙은 무엇인가의 그림자였다. 어쩐지 가슴이 저려서, 설영은 자하의 얼굴을 보지 않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22.

밝은 빛에 주변의 풍경이 물에 젖은 것처럼 찬연하게 번져나갔다. 아직 채 여물지도 못한 꽃이었지만, 자하는 즐거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까전까지 가라앉다 못해 메말라 바닥을 드러내던 기분이 기분 좋게 차올라서 일렁거렸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을 한 주제에 퍽 즐거워 보여, 설영은 차마 들어가시라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백이네.”

가만가만 아직 못다 핀 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차마 꽃봉오리가 떨어질까 싶어 손대지는 못하였으나. 그 조심스러움이 생소하여, 설영은 그 모습을 빤히 보았다. 동백꽃이 만개하면, 비로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곧 봄이 오겠구나.” 들뜬 목소리였다. 무엇이 그리 들떴는지. 자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에 꽃이 피면 다시 같이 보러오자며 덧붙인다. 함께함을 전제로 한 그 제안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작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설영은 한 번 품은 의혹을 어디에도 숨기지 못하고 결국 그 있는 그대로의 단면을 드러내었다. 숨기고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숨길 수조차 없는 당혹감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진다. 그 당혹이, 숨기지 못하고 애정을 가득 드러낸 눈에 비쳤다. 의아함. 그래, 그런 표정이었다.

“상선. 저를.”


금빛의 시선과 부딪힌다. 어디서 그러한 용기를 얻었는지, 설영은 숨을 들이쉬었고, 의문을 뱉었다. 내내 속으로만 삼켜왔던 것들. 차마 입으로 담을 수 없었던 그 짙고 짙은 것을.

“…상선은 저를 사랑하시나요?”

툭, 하고 꽃봉오리가 자하의 손에 닿았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손이 미끄러진 까닭이다. 우수수, 피어나기도 전에 채 피지 못한 여린 꽃들이 무참하게도 떨어진다. 분명 꽃을 샘낸 동장군의 마지막 심술이었을 게다.

23.

자하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알지 못했다. 떠오르지도 않았다. 굳어진 머리가 느릿하게 돌아가지만, 여전히 알 수 없다. 상선은, 저를, 사랑하시나요. 그 익숙하지만 절대로 들을 리 없다 생각했던 단어들의 조합에 머릿속이 눈보다도 더 새하얗게 물들었다. 침묵이 좋은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저 긍정이 되어 버릴 것이라는 것도…….

“…저를, 사랑하는 게 맞군요.”

그러나 자하는 뒤이어 들려오는 확신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못했다. 그렇게도 바보 같았다. 무엇이 바보 같냐고 묻는다면 셀 수도 없을 것이다. 감정을 제어하는 데 능숙했기에, 애정 또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

“……지금 무얼 착각하는 모양인데.”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다 못해 설영까지 밀어 넣었던가. 자조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 지금에라도 숨기면 된다. 그래서 설영을 밀어내고, 다시는 그 얼굴조차 보지 않으면 된다. 이 마음이 죽거나, 혹은 자하 그 자신이 죽어 사라질 때까지.

“…….”

“그때 입을 맞췄던 것은 너도, 나도 전부 충동이었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 드러내어서는 안 되었다. 자신의 약한 일면을, 그 추악하고 더러운 단면을 보여주어서는 안되었다. 그 질척하고, 노골적인 감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연정인지 뭔지 하는 그 감정은 그 어느 것보다도 순수하고, 어느 것보다도 드러내기 버거운 것이었기에. 자하는 웃었다. 감정을 내보여야 할 주인에게 보이지 않고서. 우매하고 또 우미한 감정을 부인해가며.

“상선, 저는.”

설영은 쩔쩔매었다. 자하도, 그도. 사랑이라는 전혀 무지한 감정에 휘둘려가며 당혹스러워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고 해도 그것만큼은 어린아이와도 다름이 없었기에. 그러나 설영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부정당하고 싶지 않아. 그런 마음이 불쑥 치고 올라온다. 설영은 자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

“…설영랑, 지금 뭐 하는 거야.”

거친 숨소리가 코앞에서 들린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입술이 닿을 것이다. 갈증이 차오르는 눈을 보면서 설영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정말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설영은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입을 맞추고 싶어요. 같이 있고 싶어요. 상선이.”

어떻게, 여기서 멈출 수가 있어?

그는 감정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저 감정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짙은 갈망을 담고 있는데. 한낱 휘하의 화랑에게 보이는 애정의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선 애정인데. 저것을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지? 그것은 정말로 미친 생각이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설영은 그제야 알았다.

“저는, 상선이 제게만 웃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호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그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호감 따위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작도, 끝도 전부 그 사람에게 귀결되는 그 위대하고 어리석은 감정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호감은 너무나도 가볍다는 것을.

“제가 감히 상선에게 연정을 품었습니다.”

죽음이 짙게 드리웠다. 그마저도 봄이었을 것이다.

24.

“제가 감히 상선에게 연정을 품었습니다.”

덤덤한 목소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고 달콤한 말을 싣고 전해져왔다. 자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꿈일까. 이제 너무나도 갈망이 심해져서 이딴 꿈까지 만들어내는 거지. 아니면 괴이의 짓일까? 약해진 몸이 감당하지 못하고 악한 것들의 장난질에 끌려온 게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하, 하며 메마른 웃음이 터졌다. 몸이 들썩거리며, 속에서부터 다시 비린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사랑인지 분노인지, 환희인지, 슬픔인지, 자괴감인지. 도무지 가려낼 수 없는 감정으로 범벅이 된 그것을 삼켜내며 제 얼굴을 쓸어내린 자하는 가만가만 입을 열었다.

“…사랑을 하게 된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 알아?”

“압니다.”

“알아? 네가 그들을 본 적이 있어? 어떤 끝을 맞이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말을 잇지 못했다. 설영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너무나도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아…….”

탄식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그다음은 비웃음이다. 그다음은 분노였고, 경멸이었다. 숨겼다고. 숨겨왔기에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멍청이처럼, 그렇게 믿었다고. 저렇게 훤히 드러나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전부 드러내놓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알아달라, 그리 외치고 있었던 주제에. 저 어린아이마저도 알아버릴 수밖에 없게끔…….

자하는 설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제가 마음을 자각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봤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을요. 저는…….”

설영은 드문드문 입을 열었다. 자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감고, 웃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사랑을 하는 이들을 이해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잘 안다고 자부해도, 정작 그들을 향해서 자하, 그가 느낀 것은 몰이해뿐이었기에.

처음 접문을 했을 때 그는 의문을 표했더랬다. 열병도 전염이 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상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은 본래 전염되는 종류의 것이라, 역병보다도 때로는 더 지독하기도 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전부 그리 쉽게 전염되는 것인데, 사랑이라고 하여 전염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대체 어디에 있었던가? 오히려 무엇보다도 지독해서,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전부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 연정인지 뭔지가 아니었던가?

“저를 사랑하시는 상선을 봤어요. 저는.”

자신이었다. 결국 모든 것을 망친 것이.

“…….”

“제가 본 것이 틀린가요?”

그러나 그는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너와 함께 죽어주겠다고 하잖아.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이야? 차라리 저 손을 잡아.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해.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함께…….

“……그래, 설영랑이 본 것이 맞아.”

그는 설영이 쏟아내는 사랑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래서?” 그리고 그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하는 퍽 쌀쌀맞은 투로 입을 연다. 자신의 감정으로 설영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에. 죽고 싶지도 않았고, 설영의 입에서 거절의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으며, 설영이 함께 죽어주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설영이 죽는 것을 결국에는 볼 수가 없어서.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겠어. 너 보고 사랑한다고, 사랑해서 미칠 것 같으니 너도 날 사랑하라고. 그래서 나와 같이 죽어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 했을까? 아니면 상선이라는 지위로 일개 화랑에 불과한 너를 찍어 눌러야 했을까? 나라고 너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건 아닌데 말이야!”

“……상선.”

“너를 죽이고 목숨이라도 끊어야 했어?”

상선, 저는. 그 말을 막았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입술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전부, 끝이었다. 봄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면, 함께 보러오고 싶었다. 두 손 가득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마냥 당과를 쥐여 주고 먹는 것을 구경하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할 수 없는 바람뿐인 일이 되어버렸다.

“설영랑, 설영랑. 아무것도 모르는 내 사랑스럽고 어린 화랑아.”

“…….”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내가 봐왔던 모든 사람이 전부 미쳐서 죽었어.”

이게 아니었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뱉은 말에 스스로가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뒤집혀오는 속에서 역겨우리만치 비린 숨이 올라왔다. 처음부터 금기를 어긴 것은 자신이었다. 설영이 자신에게 저를 사랑하라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제멋대로 설영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래놓고서는 숨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드러냈다. 기어이 자신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는 가장 처참하고 비참한 방식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내가 널 죽이길 바라?”

…이러려고 사랑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의 선택은 시작도, 끝도 전부 설영이었다. 그렇기에 그 감정을 호감이 아니라 연정이라고 명명한 것이었다. 절대로 자신은 저지르지 않을 듯했던 그 죄를. …그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죄였다. 그것만큼 끔찍하고 역겨운 죄가 없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함몰되어 소중한 이까지 죽이고야 마는 행위를, 죄가 아니면 무엇이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나라고 너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런게 아니었어. 나도 너를 죽이고 싶어서 사랑한게 아니야. 죽고 싶어서, 죽고 싶어서 사랑한게 아니야! 마음만 같아서는 전부 도려내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도록 태워버리고 싶어, 그냥, 전부…….”

사랑을 하는 것이 잘못이 아닌 세상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별세계가 있었더라면 그곳에 사는 나는 너를 품에 안고 몇 날 며칠이고 사랑한다고 진심을 다해 말해줬을 거야. 수백 번 네 눈가에 입을 맞추면서, 내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너를 사랑했을 거야. 그런 꿈과도 같은 일이 가능한 세계가 있다면…….

“내가, 그래서…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너는 내게 연정을 품었다고.”

그러나 그 세계는 그들의 세계가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것은 끔찍한 죄였다. 그저 그뿐이었다. 자하는 그렇게 외치면서도 손을 잘게 떨었다. 정제되지 못한 감정들이 날 것 그대로 역겨운 악취를 풍기며 쏟아졌다. 설영은 그 떨리는 손을 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자하는 곱씹었다. 네가……연정을 품었다고, 내게.

정말이지 지독했다. 열병도 결국은 전염이 되는 병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악질의. 달콤하고, 또 달콤해서. 차라리 눈을 가려버리고 싶을 정도로 황홀하고 뜨거운 병이었다. 자하는 그렇기에 설영을 밀어내지 못했다. 홀린 것처럼 설영을 막았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는, 끝까지 밀어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에는…….

“왜……내가 공과 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하고 무능한 인간이 되도록, 너는…….”

나와 같이 죽어주겠다는 너의 그 말이 너무 화가 나서, 미워서, 그리고 사랑스러워서.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것은 불신이었다. 왜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위해 죽어? 그는 웃었다. 진작 잘라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을 뿐.

“…설영랑, 나는.”

너를.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형태가 짓뭉개져 흐르는 말이었지만 벅찼고, 슬펐고, 아팠다. 결말이 정해진 감정이라는 사실에 눈가가 아려왔으나, 그럼에도 사랑했다. 사랑스럽고, 사랑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렇게도 사랑해서. 힘겨운 고해다. 고백보다는 고해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었다. 죄를 고해하듯이, 설영의 어깨에 제 머리를 묻고서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느릿하게 입안에서 맴돌다가 결국 바깥으로 새나오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손으로 뭉개려 해도 뭉개지지 않는 지독한 향이다.

25.

자하는 기어이 설영의 몸에 제 이름을 정성스럽게 한 획, 한 획 새겨넣었다. 만족스럽고도 아픈 일이었다. 상선, 하고 저를 부르며 제 옷깃을 절박하게도 잡아 오는 흰 손에,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 저를 부르는 입술에 입을 맞추며 자하는 웃었다. 뱉어내는 밭은 숨을 삼켰다.

간절하게 바라온 일일진대, 이상하게도 속이 울렁거렸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 기이하고 모순적이기도 하지.

26.

“설영랑.”

“…….”

“설영아.”

설영의 뺨에 제 입술을 부비며 자하는 조용히 읊조려본다. 콜록, 하고 뱉어내는 기침에 마음이 아렸다.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한 그도, 자신도. 전부 제정신은 아니었다. 고작 이런 감정에-아니, 고작은 아니겠지. 두 사람이나 그 감정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지 않았나.

그러나 미친 것은 확실했다. 정말로 돌아버린 것이다. 쌕쌕거리는 숨을 내쉬는 설영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포개었다. 그렇잖아도 하얗기만 한 사람이었다. 귀신으로 착각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리 열병에 앓으니 더욱 아파보였다. "예…." 힘겹게 눈을 뜨고는 기어이 대답을 한다. 열병을 앓는 이가 둘이라니. 그것도 귀마왕과-상선. 참 대단한 조합이다.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으리라.

비린 혈향이 가실 새가 없었다. 자하가 그러하면, 그다음은 설영이 그러했다. 죽음이 목전까지 찾아와 그림자를 들이밀었음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감정이 아리고 아렸다.

“설영랑, 나는.”

같이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이를 끌고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나, 두려웠다. 사랑스럽고, 밉고, 슬프다가도 기쁘다. 그러니 미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추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 이기적으로 굴고 싶어지다가도, 그렇게 할 수 없어지고. 죽음이 앞에 다다랐음에도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결국은 포기할 수가 없으니.

아름우나 추악하고, 이기적이나 이타적이고, 온갖 모순이란 모순은 다 끌어안은 감정이었다.

“사랑해.”

그러나 사랑했다. 스스로를 죽이는 감정이라도, 그것이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신조차도 막을 수 없으니, 당장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자하는 깊게 설영에게 입을 맞추었다. 죽음조차도 침범할 수 없게. 깊게.

27.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설영아.”

“화랑들의 정신적 지주시잖습니까.”

“너는 푹 쉬는 주제에, 나는 쉬지도 못하게 하잖아.”

푹 쉬고 계시잖아요. 어리광에 한숨을 삼키며 자하를 안아준다. 잠자코 안아주고 있자니, 눈이 졸음으로 천천히 감겼다. 그나마 선도를 수련해왔기에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음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졸음에 꾸벅거리는 때도, 각혈하는 일도 잦아졌으니.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몰랐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일 또한 잦아졌다.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고 있으니, 이 사랑이 우리가 기억하는 마지막이 될 수 있도록.

죽은피를 토해내는 것을 백호영도의 세 사람에게 들킨 날, 결국 설영은 해직을 청했다. 그렇잖아도 몸이 좋아보이지는 않았기에 진림은 이를 수락했고, 뒤를 이어 자하도 제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물론 자하의 그런 요청은 보기 좋게 기각 당했으나. “상선께서 물러나시면 선문이 흔들릴까 저어됩니다.” 그 말과 함께 진림이 워낙 간곡히 뜯어말리는 탓에 제 아무리 그라도 어떻게 밀어붙일 도리가 없었다.

“내일은 죽을까요.”

“오늘일수도 있지.”

차라리 같은 때에 죽으면 좋을 텐데. 숨을 삼키며 작게 속삭였다. 누가 먼저 죽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함께 숨이 끊어지는 것이 나을 텐데. 그러한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을 가지는 것이 싫었다.

“꽃을 함께 보고 싶었어.”

“같이 보았으니 만족하시나요.”

“역시 너무 부족한 것 같아.”

여름에는 함께 무엇을 해볼까? 꽃이 피면 같이 보러오자는 약속까지 지켰으니, 이젠 여름에 무엇을 할 지 생각해보자. 그다음은 가을을, 그다음은 겨울을. 계속 그렇게 약속을 하나하나 해가는 거야. 그리고 겨울에 눈을 보는 것까지 전부 끝이 나면, 다시 만개하는 꽃을 보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입에 담으면서도, 자하는 눈을 접으며 곱게도 웃었다. 헛소리 하지 말라는 매몰찬 대답이나 돌아올까. 그 말을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듣고 있던 설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요.”

죽어도 함께해요. 환생하게 된다면 환생을 해서라도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고, 그것이 여전히 죄가 되는 세계라면 차라리 귀신이 되어서라도 서로를 끌어안고, 그렇게 평생을. 그렇게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보내요. 나지막한 속삭임에 자하는 드물게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정신 나간 소리를 받아들여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설영은 자하의 속을 이리저리 뒤집어둔 주제에 노곤한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상선. 상선…….”

“그래, 설영아.”

“우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같이 끝을 맞을까요.”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대오는 부분부터 뜨거운 열이 번져나간다. 자하는 천천히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 울컥, 하고 속에서부터 무엇인가가 붇받쳤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자. 설영아….”

우리가 함께 끝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 속삭임 끝에 아주 짙은 향이 남았다. 처음 서로를 사랑했던 때와 똑같은 잔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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