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단편

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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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어둠에 점점 삼켜졌다. 빠르게 심연으로 잠식되어 가는 이를 보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풀벌레가 평온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 꿈이었다.

“상선, 듣고 계세요?”

“…아, 뭐라고 했었지?”

“…이번에 왕경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괴사건에 관해 설명드리고 있었는데요.”

“참, 맞아. 그랬지.”

설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자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퍽 무례한 눈짓이었으나 자하는 별말하지 않았다. 무례한 뜻으로 훑는 게 아니라 상태를 살피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필히 오해했을 행동이었으나 자하는 이미 이 건방진 백의화랑을 파악해둔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그럼 이제 제 얼굴 그만 보시고 집중 좀 해 주시죠. 얼굴 뚫어질 것 같습니다.”

자하가 먼저 설영의 얼굴을 보며 멍해져 있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계속 해 봐.”

“…제보를 받은 후 국선께선 괴변이 아닐지 의심되기에 제게 조사를 명하셨습니다. 마침 다른 괴변으로 보이는 일도 없고요.”

“오… 일리 있군. 그래서? 무슨 일인데?”

설영은 제가 들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푸른 눈동자로 스르륵 굴러 서류의 내용을 훑어보더니 이윽고 이어 말했다.

“흐음…. 그러니까, 눈앞에서 사람이 갑자기 실종 당하는 괴현상인 듯합니다. 실종자는 어디서도 찾지 못했고요.”

“최초 사건으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지?”

“일주일 정도입니다.”

“그동안 사라진 사람의 수는?”

“서너명 남짓이니… 하루 걸러 하나 정도인 것 같군요.”

“사라질 때의 특이점은?”

“단둘이 있을 때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라진 사람이 그걸 목격한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 혹은 연인. 그런 류입니다.”

“가만… 이거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자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언제였더라, 국선이 되기 전에…. 화랑이었을 적 같은데. 눈을 내리뜨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자하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뻗어진 손이 설영에게 향했다.

“설영랑!”

“네? 갑자기 왜….”

그런 표정으로 절 부르세요? 그 말은 끝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발밑으로 그 끝을 알 수 없을 듯한 심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늦게 발견하고서야 몸을 물렸으나 이미 어둠은 설영의 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설마…! 설영은 빠르게 서류 속의 내용을 복기했다. 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땅속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고 했던가. 제게로 뻗어지는 자하의 손이 보였다. 그 손을 마주 잡기 위해 팔을 뻗은 순간, 훅 몸이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아래에서 올려다 본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상선, 그런….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소리가 되어 나가지 못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자하가 허공을 잡아채는 순간, 언제 그런 구멍이 생겼냐는 것처럼 심연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자하는 이를 으득 갈았다. 감히, 내 앞에서. 금빛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을 담고 활활 타올랐다.

자하는 낭도 시절을 거치지 않고 화랑이 되었고, 남들이 화랑이 될 나이에 국선이 되었다. 그렇게나 잘난 그였지만, 결국 화랑이라는 불완전한 시절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여도 처음은 존재하고, 처음은 분명 실수하기 마련. 눈앞에서 직접 당하고 나니 자하는 바로 괴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화랑으로서 처음으로 맡았던 사건. 분명 그 사건의 범인인 요마는 해치웠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했을 때 석연찮은 점이 하나 있었지. 혼자 벌인 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사건의 흐름이 빨랐다는 점. 한 놈이 더 있었는데 놓친 게 틀림 없었다. 그리 큰 실수는 아니었어도 지금의 그가 허를 찔리기는 충분한 실수였다. 그 탓에 원한을 사버리고 말았으니까. 십 년도 더 지났음에도 이제와 일을 벌인다는 건 분명 그를 겨냥한 것일 터. 사건을 벌이며 화랑도의 반응을 살피고 그의 곁을 조사한 게 틀림없었다. 꽉 쥔 주먹에서 실같은 피가 흘렀다.

자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실종자는 단 한 명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는 어땠더라. 분명… 실종자를 전부 찾긴 했던 것 같다. 당시 실종자도 서너 명. 기력이 크게 쇠하긴 했어도 그 외의 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었다. 찾기 어려웠던 건… 하나같이 기상천외한 장소에 있어서, 였었지. 자하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곧장 어딘가로 향해 바로 나아갔다. 실종자들은 전부 한 곳에 모여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질이 나쁜 장소에 있었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존재….”

진림이 조사한 내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 요마의 주술은 서로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어야만 발동한다. 왜냐하면 실종자가 갇히는 곳이,

“두 사람 모두 싫어하는 장소니까.”

다만 그리 멀리까지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필히 이 왕경 내일 터. 그럼 짐작가는 곳이 하나 있었다. 일전에 설영에게 들어둔 것도 있었으니. 올려다 본 하늘이 새카맣다. 마치… 꿈속에서 설영을 집어삼키던 그 어둠처럼. 별 하나 없이 온통 칠흑같은 밤이었다.

도착한 장소에는 빛무리가 일렁였다. 어둠 한 가운데서 찾은 빛은 마치 사막에서 찾은 물 한 방울과도 같았다. 물론 사막에 직접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월정교의 한 가운데에 올라선 자하는 난간에 두 팔을 걸친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은은한 빛에 반사되는 수면에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룽거렸다.

‘…물은 싫어….’

그때…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자하도 딱히 물에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자하는 이런 잔잔한 강 따위가 아닌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였지만, 왕경에서 바다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그 주술은 그만한 거리를 감당할 수 없다. 정답에 가까울 만한 곳은 분명 이곳이었다.

“하….”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별 짓을 다 한다, 설영랑. 자하는 훌쩍 난간을 뛰어넘어 강 속에 몸을 던졌다. 누가 봤더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와줄 사람을 부른답시고 난리를 피웠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땅거미가 어스름히 내려앉은 늦은 시간에는 그의 기행을 보고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속에 들어가자 요사스러운 기운이 침입자에게 날을 세웠다.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다만 복수심에 이를 갈고 있을 요마가 한 가지 놓친 게 있다면, 자하는 더 이상 영력만을 가지고 있는 화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순식간에 풀려나온 마기가 요사스러운 기운을 잠식했다. 사방으로 마기와 함께 금빛 영력이 분출되었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서 막히자 모든 기운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쾅!

물속에서 부딪힌 것치고 큰 굉음이 울렸다. 분명 아무것도 없어야 할 물속을 무형의 무언가가 막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덩굴로 얼기설기 가려진 곳 아래 영력을 얻어맞고 희미하게 반투명해진 결계가 보였다. 요마는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 결계를 쳐 사람을 숨겼다. 아마 다른 실종자들도 그들이 싫어하는 곳에 이리 갇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하에게는 지금 눈앞의 결계가 가장 중요했다. 주인의 거친 손길에 적멸이 뽑혀나왔다.

쿵! 콰앙! 쿠웅…!

자하는 연신 결계를 내리쳤다. 영기와 마기를 섞어 내리치자 결계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결계 안으로 순식간에 물이 차올랐다. 새카만 물에 삼켜지는 하얀 인영이 보였다.

“컥…!”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물에 설영이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몸이 아주 느렸다. 이미 기력을 빨릴대로 빨린 모양이었다. 이대로 놓아줄 수는 없다는 듯 설영의 몸을 꼼꼼하게도 감싸고 있던 덩굴이 그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감히. 자하는 거칠게 설영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몸에 들러붙은 덩굴을 힘주어 잡아뜯었다. 뜯긴 덩굴이 몸에 들러붙어도 신경쓰지 않았다. 설영을 끌어안고 수면을 향해 박찼다. 어느새 수면 위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촤악-!

오랫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눈이 갑작스러운 빛을 마주해 가늘게 찌푸려졌다.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물가에 걸터앉은 자하는 끌고 나온 설영을 제 품에 두었다. 가물거리며 뜨인 두 눈 사이로 힘을 잃지 않은 푸른빛이 선명했다. 그 눈을 확인하고서야 낮게 숨을 내쉰 자하는 설영의 머리칼을 느리게 쓸었다. 뭘 해도 설영의 반응이 느렸다. 이어 나오는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히 내 것을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어딘가에서 숨 죽여 듣고 있을 놈에게 재판장이 선고를 내렸다. 설영은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내뱉어지는 자하의 숨결이 무척 거칠었다. 피부에 닿아오는 손길이 어쩐지 설영보다도 차가웠다. 물속에 오래 있었던 걸까. 설영은 느리게 팔을 뻗어 자하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 빌어먹을 놈을 혼자 잡게 두진 않을 테니까. 아주 조금만… 조금만 쉬고 나서. 느릿하게 자하의 손을 가까이 끌어왔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조심스럽게 손등에 닿았다.

혼자… 혼자 둬서 죄송해요.

다시는…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손등에 붙은 입술이 한 글자씩 띄엄띄엄 말했다. 언어로 나오는 소리는 없었어도 이 입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자하는 화내다가도 어이가 없어져 설영을 내려다보았다. 화랑도의 상선에게 이리 말하는 건방진 화랑은 이 백의화랑뿐일 것이다. 설영은 감기기 직전인 눈으로 자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 얼굴에 걸린 미소가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아서, 설영은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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