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검] 동경
망량의 피리편 서검이 속마음 날조 짧은 글입니다. 4권을 읽고 와주세요.
“검아, 물러서…!”
두려움에 얼어붙은 내 앞에서 뱀 요괴를 향해 검을 겨누던 형님의 모습을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었던가. 그때 보았던 형의 등이 얼마나 크고 넓었던지.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형을 돕지도 못 하고 지켜만 보다가 뱀 요괴가 쓰러진 뒤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발 한 자국조차 쉬이 떼지 못 하던 나를 업어들었던 그 등이 얼마나 크고 넓었던지. 겨우 일곱 살 난 아이가 봤던 형은 그토록이나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를 지켜주었던 그 손에서, 검을 놓아 버린 것인지. 그 전에도 검술보다는 피리부는 것을 좋아하던 형이었지만 전에는 하는 시늉이라도 했던 검술 연습을 빼먹고선 바깥으로 나돌기만 하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형은, 형은. 나를 지켜준 것처럼 양민들을 지키고, 청룡진도를 이끌어야 할 사람이잖아? 다들 겨우 열두 살에 요선에 가까운 뱀 요괴를 처치한 형을 대단하다고들 했는데! 어째서!
“서검아, 그렇게 검만 휘두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같이 이 형님이랑 왕경에 나가서….”
“시끄럽습니다! 형님은 생각이 있는 겁니까? 시장에서 소란을 일으킨 게 채 일주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국의 화랑으로서 정진하지는 못할 망정 청룡진도의 이름에 누를 끼치고 다니기나 하다니!”
“잠깐 나갔다오면 오히려 더 정신도 맑아지고 검술 연습이 잘 될 수도 있….”
“형님!”
“…알았다, 알았어. 난 간다! 다음에라도 놀러가고 싶으면 형님한테 이야기 하는 거 잊지말고!”
“……!”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밖으로 나돌기만 하는 형을 보면 분이 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형님만 보면 화를 내곤 했다. 청룡선원을 울리는 형의 피리 소리가 들려올 때면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가도, 검은 내팽겨치고 피리만 불어대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 나 귀를 기울인 적 따위 없었던 것처럼 굴곤 했다. 그렇게 나는 형님에게 화를 내는 데에도 지쳐, 점점 더 형님과 말조차 거의 섞지 않게 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형님을 그렇게 여기게 되어버렸던 것 같다. 피리에는 조금 재주가 있을지 모르지만, 신국의 화랑으로서 정진할 마음 따위는 없이 한량처럼 돌아다니기만 하는 화랑답지 못한 화랑으로.
그렇게 나는 내 스스로 형님을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형님이 같이 임무에 나간 화랑들을 죽이고 본인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망량화라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같은 것이라고는 하나, 청룡진도를 이끄는 수장의 장남이 다른 화랑 다섯을 죽이고 본인은 자결했다니 이보다 더한 수치가 있을까. 차라리 자결이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을까. 몸 전체가 노기로 부들부들 떨렸다. 평소 형과 가까이 지냈던 다른 화랑들 또한 참담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망량화로 인한 일이라 다른 선문에서 죄를 묻지 않았다고는 하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준랑의 물건은 모두 태워 없앤다.”
“대랑…! 아무리 그래도 형님이시지 않습니까?”
“선문의 화랑이 다른 화랑 다섯을 죽였다! 그런 자의 물건을 남겨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 화랑의 명예를 더럽힌 자다. 영검도 검총에 안치할 수 없다. 녹여버려라.”
“대랑….”
그래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먼저 나서서 남은 형의 유품을 모두 태워버리고 영검마저 없애버렸다. 형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폐관에 들었다 나왔을 때는 그나마 청룡선원의 물건이라 남겨 두었던 악보나 형이 심었던 나무마저도 귀마왕이 습격해온 덕분에 전부 사라졌다. 그렇게 형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형이 다시 돌아왔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모습으로. 결국은 그 한심한 작자가 죽어서도 또다시 선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형이 하는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고. 그런 한심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어서 무엇하느냐고. 영사 따위 해봐야 결국 형님이 다른 화랑들을 죽인 모습이나 보게 될 텐데!
다시 형이 살아있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한 분노와 초조함에 휩싸였다. 선문의 수치. 화만 불러일으키는 존재. 다시 형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형은 생전에 화살을 몹시 무서워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버릇을 고친다고 기둥에 묶어놓고 활을 쐈기 때문이지. 그러니 화살이 날아오면 꼼짝 못 할 거이다. 얘들아, 어서 쏴라!”
그래서 내 진기를 태워서라도 형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냥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제발 끝내게 해주십시오!”
…대체 나는 무슨 짓을 할 뻔 한 거지?
“안 돼! 보지 마!”
형은.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줬던 그때의 형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는데. 내가 되고 싶었던 그 모습은 언제나 그대로였는데. 도저히 평소의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었을 다섯의 화랑들을 막아서고 죽음 후에 겪게 될 그 모든 모욕과 수치를 알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내버린 그 모습은, 어린 동생 앞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뱀 요괴를 보고도 물러날 줄 모르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청룡선원까지 동생을 데려왔던 그 때의 형과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일단 거기서 나와! 얼굴을 가리면 되잖아!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하란 말이야!”
이 모든 외침이 이미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멈출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나와. 도와달라고 해. 그러지 마. 형. 이게 형의 마지막이라니. 안 돼. 안 돼…!
“안 돼! 형!”
괴성이 울려퍼졌다. 그 죽음의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만드는 소리.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고 싶은지 모르면서 형을 찾았다. 그러나 마지막 대화조차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 같이 여기던 상선의 명마저 무시하고, 그 상선께서 훌륭한 화랑이었다 말씀하시는 형의 마지막을 다시 한 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애먹인 줄이나 알긴 알았어, 형? 왜 마지막까지 이래. 날 여기까지 불렀잖아. 내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어? 형, 형….
이미 죽었는데도, 사람조차 아닐텐데도, 상선의 검이 형을 찔렀을 때는 왜 그리도 살아있는 형을 찌르는 것만 같았는지. 괴물의 비명이 형의 비명처럼 느껴졌는지. 모든 걸 내려두고 평온히 잠든 형을 도무지 더는 바라볼 수가 없었다. 형을 보낸 뒤 한 번도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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