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자하] 아주 작은 조각 글 (3)
진혼기 패러디
*완결 후의 이야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초옥완자
설영은 눈을 떴다. 밤은 깊어 사방이 어두웠다. 옆으로 누운 채 일어날까 말까 망설였다. 움직이면 아이가 깰지도 모른다. 아이는 설영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차분하고 닿은 손발이 따뜻했다. 생명의 온기는 화로의 열기와는 달라서 마음이 아렸다.
너는 어떤 요마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이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설영은 이제 자신이 무엇인지 몰랐다. 잠을 자지도 않아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고 시간의 흐름조차 비껴가는 ‘것’을 어떻게 명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설영이 누구인지 몰라도 아이는 쉽게 마음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설영 곁에 머물렀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설영이 자신의 이름과 한자 뜻을 알려주자, 입 안에서 굴리듯 발음해 보더니 씨익 웃었다.
- 마음에 들어.
농담이 아닌지 아이는 수시로 설영을 불렀다. 아무 일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설영은 나무라지 않고 늘 같은 어조로 대답했다.
- 응.
자신을 바라보며 간결하게 내뱉는 그 한마디에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이는 이름이 없다고 했다. 불러주는 이들이 제멋대로 지어 붙이긴 했지만,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니 제 이름이 아니라고 말했다. 뜻을 알고 스스로 이름을 짓기 위해 한자를 배우기로 했다. 설영은 좋은 스승이 아니었지만 아이는 지나치게 습득력이 좋은 학생이었다. 아이는 단순히 문자를 아는 정도를 넘어 책에 몰입했다. 쉽게 문맥을 읽고 저자의 숨은 의도를 헤아렸다. 아이를 위해 책을 구비했고 그 책을 두기 위한 책장을 샀다. 설영은 눈만 돌려 책장을 바라보았다. 빈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설영은 이 집이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겐 애초에 필요한 물건이 얼마 없었으므로 이 크기로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이 집이 작았다. 설영은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이 많았고, 당연하게도 이 집 안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왕경으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설영은 아이를 왕경의 화랑들에게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되는 상상을 했다.
설영은 아이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 자하.
그렇게 불러본 적 없었다. 상선은 늘 상선이셨기에 직함 외의 호칭을 입에 담을 일이 없었다. 목이 아프고 가슴이 옥죄였다. 불러보고서야 한 번만이라도 이름으로 불러보고 싶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히 그렇게 칭해도 된다면. 자하, 나의 자하.
나지막하게 딱 한 번 소리를 내었을 뿐인데 아이가 눈을 떴다.
- 설영?
- 일어났어?
아이는 잠을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털더니 또렷한 눈동자를 맞춰왔다.
- 응. 설영은 언제 깬 거야?
- 조금 전에.
- 혼자 깨어있기 심심하면 날 깨우지 그랬어.
-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아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영의 밀어내는 듯한 화법이 마음에 안 든 탓이다.
- 설영은 그렇게 해. 하지만 난 심심하면 설영을 깨울 거야.
- 그래.
설영이 조그맣게 미소짓자, 기색으로 눈치챈 아이가 덩달아 웃었다. 설영은 속삭였다.
- 왕경으로 갈래?
- 설영도 같이 간다면 갈래.
같이 가서 혼자 돌아오겠지. 그저 여행이라고 생각한 아이는 들떠서 설영을 끌어안았다. 설영은 마주 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원컨대 당신의 삶이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거칠 것 없고 닿지 못하는 곳 없고 얻지 못하는 것 없으며... 행복하기를.
설영은 손을 멈췄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거짓으로 스스로를 속이기엔 설영은 너무 결백했다. 불안과 서러움이 짓쳐 들어왔다.
‘당신은 나 없이도 완벽한 분이시죠. 이번 생에도 그러시겠죠.’
설영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챘지만 아이는 조용히 설영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설영이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영이 얕은 한숨을 내뱉고 자세가 편안해지자 아이는 이불 속을 더듬어 설영의 손을 찾았다.
- 정했어.
- 무엇을?
- 이름.
그토록 고심하던 이름을 지었다니 반가워해야 할지 야밤에 느닷없이 하는 말에 당황해야 할지 몰랐지만, 설영은 온화하게 물었다.
- 뭘로 할 거야?
아이는 설영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는 명료하여 의심할 바가 없었다.
- 자하.
- ...
- 내 이름은 자하야.
설영은 혼란스러웠다. 너무 오랜만에 머리가 엉키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아까 자신이 자던 아이에게 자하라고 속삭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 ...이름은 제대로 정해.
- 제대로 정한 거야. 설영이 나를 그렇게 불렀어. 설영이 부른 이름이 내가 인정한 내 이름이야.
설득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눈물이 차올랐다. 앞으로 아이의 생에 관여할 수 없어도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영은 티 내지 않고 목을 가다듬었다.
- 자하.
- 응.
그 짧은 화답에 설영은 옅게 웃었다. 이제 갓 몽우리를 맺은 꽃처럼 봄빛이 어린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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