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설영]잊힌 이들의 겨울下
[자하설영]잊힌 이들의 겨울上 https://pnxl.me/s00a1c
얽힌 숨을 생각했다. 주체할 수 없이 아린 애정과 함께 기어이 그를 옭아매었던 그 날의 입맞춤을. 시린 겨울 공기가 무색한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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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온기, 충동.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고 술렁이는 감정. 설영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얼굴을 굳히고 자하를 밀어냈다. 당연하게도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 밤의 일을 겪었던 것은 둘이었지만, 기억하는 것은 오롯이 설영 홀로이기에. 그는 이윽고 확인하려는 듯 제 입술에 손을 대었다가, 여전히 느껴지는 자하의 온기에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질문이었지만, 혼잣말 같기도 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할 수 있다며.”
“……할 수 있다는 게 하자는 뜻은 아닐 텐데요.”
정녕 미친 건가? 설영은 이제 슬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자꾸 이상한 일들만 벌어지는 게 정말 자하에게 걸린 저주 탓이 맞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뭘?”
“사실 홀린 게 저일지도 모릅니다. 정심곡淨心曲이라도 연주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제가 홀린 것 같은데요?”
“아닌데? 이거 현실이야, 설영랑.”
“말도 안 돼. 사실 당신이 귀신이고 제가 홀렸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홀려본 적이 있으니 두 번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죠. 아마 제가 홀린 게 분명합니다.”
“설영랑, 정신 좀 차려볼래?”
“그럼 이게 현실이라고요?”
……아, 그래. 현실이라고. 현실. 거기까지 되뇌고, 설영은 굳은 낯으로 일어났다. 현실이라는 사실에 무엇인가가 뱃속에서부터 울컥 올라온 것도 같다. 속이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차라리 홀린 것이라고 했다면 이렇게 화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보았다. 입을 맞추던 도중, 찬란한 금빛 영력 아래에서 숨을 웅크리고 잔존하고 있는 마기魔氣를. 그것은 자하가 맞았으니, 다른 사람이 그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도 하지 못할 것이라.
“장난이 심하셨습니다, 상선.”
“뭐? 설영랑.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난 장난이…….”
장난이 아니라면, 기어이 저주를 받아 미친 것이 틀림없겠지. 감히 상선에게 하기에는 불손한 생각이었으나……. 설영은 기어이 얼굴을 와락 찡그리고야 말았다. 그래, 온기가 있었다.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은 열기가 맴돈다.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듯. 정말이었다. 이 온기의 주인은 정말로, 자하였다. 미친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상선의 탈을 쓴 웬 요괴가 상선 행세를 하고 있거나! 자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영의 반응은 자신이 낸 답이 명백히 오답에 가깝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잠깐, 설영랑.”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이렇게 가겠다고?”
“…….”
설영은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비천택에서 빠져나왔다. 설영의 팔을 잡으려던 자하가 허무하게 빠져나가는 그를 우두커니 응시하고 있던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그는 빠르게 빠져나와 위용을 자랑하는 금입택을 눈이 아프게 노려보다가, 코웃음을 치듯 웃었다. 아까 전, 본당에서의 일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자신의 뺨을 감싸던 손, 겹쳤던 입술, 반짝거리던 금빛의…….
“…….”
눈을 힘주어 밟자 적당히 쌓인 눈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뭉개졌다. 설영은 몸을 돌렸다. 어차피 기억의 조각은 거의 다 맞추었고, 기억의 일부를 찾았다는 것은 괜찮은 신호였다. 이제 나아지는 일만 남았을 테니 내일은 일이 있어서…아니지, 병에 걸려서 오지 못했다고 하자. 아니면 대랑께 부탁드려서…….
갈피를 잃은 걸음이 비천택 앞에서 부산스레 맴돌다가 멈추었다.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설영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는 결국 목적지를 잃고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뚝, 걸음을 멈추었다.
“……입도 맞출 수 있는 사이라고?”
아까 전, 자하의 말을 곱씹던 설영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전부 틀린 말이었다.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다. 장난이거나, 착각이거나, 혹은 홀렸거나. 그렇게 뇌까리는 와중에도 아까 전의 일은 화인처럼 선명하여 설영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정말 이상했다. 입술에 닿아오던 온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그 모든 것들이. 왜 당신은, 진심이 아닐 것이 분명한 그 말이 한 치의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인 것처럼…….
‘설영랑, 나는…….’
‘설영랑을 좋아하지 않아.’
“……당신이 그럴 리가 없지.”
입도 맞출 수 있는 사이라. ……어디에서 또 이상한 장난을 생각해와서는. 설영은 한참 후에야 자하의 행동에 대해 명확히 정의 내렸다. 장난이 틀림없다고. 명백한 체념의 형태다. 자하가 그 밤의 일을 기억했다면 이딴 장난은 치지 않았겠지. 입맞춤으로 삼킨 온기가 도리어 싸늘하게 식어서 설영을 춥게 했다. 설영은 옷을 조금 더 여몄다. 아까의 입맞춤은 그렇게 달았는데, 정작 그것이 설영을 한겨울, 맑은 못의 저 깊은 곳으로 빠트린 것처럼…….
“…….”
혹시, 당신이 정말로.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부풀어 올랐다가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펑, 터졌다. 설영은 숨을 들이켰다. 차디찬 공기에 목이 아렸다. 숨을 삼킬 때마다 현실이 그를 내리눌렀다. 정말로 난처하다는 듯이 웃고 있던 얼굴과, 자신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반짝거리던 얼굴이 상념 위로 겹겹이 겹쳤다.
‘내가 보기에, 우린 정말 친밀했어.’
‘뻔하지. 내가 이런 분위기를 읽지 못할 리가 없잖아? 아마 우린 입도 맞출 수 있는 사이였을 거야.’
그날의 자하와 지금의 자하. 자신과 함께한 기억이 있던 자하는……. 설영은 자하가 섣부르게 재단한 감정을 지워냈다. 진실이 있다면 분명히 전자. 기억이 있던 그가 내보였던 난처함이 가득한 얼굴이 머리를 스치고, 그와 동시에 가정만으로도 술렁이던 가슴이 빠르게 식는다. 겨울의 냉기가 얼려오는 것처럼.
아,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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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영랑, 나를 좋아해?
차가운 공기가 숨을 얼리던 어느 날 밤, 자신이 이야기했다. 창백한 얼굴은 달빛 탓에 그렇게 보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자리에는 뭇사람들이 칭송하던 화랑들이 아니라,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감정에 떠밀려 어쩔 줄 몰라하던 청년 둘만이 있었다. 자신의 그 질문에 청년은 입술을 달싹인다. 눈 한 송이 내리지 않던 건조했던 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날이 하얗게만 느껴졌던 까닭은, 눈앞에 서 있던…… 온통 새하얗던 그가 시선에 걸려서였을까?
예, 좋아합니다 상선.
긴장해서 굳은 낯. 자신이 하는 말에 혼란스러운 낯으로 횡설수설 뱉어낸 그 한마디가 가슴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던지. 혼란스러운 낯은 점점 단단해졌고, 두서없었던 말과 떨리는 목소리도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점차 확신이 서렸던 그날.
그래요. 상선의 말씀이 맞습니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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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는 묘시卯時 즈음에 금빛 눈을 깜빡거리며 일어났다. 세상은 고요했고 흰빛으로 반짝거렸다. 날이 짧아 햇빛은 간신히 문턱에 걸쳐 있었다. 이불을 걷고 내려가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자 바깥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슬며시 내려앉은 눈이 손의 온기에 녹아 스민다. 자하는 그것을 보며, 꿈에서 보았던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래요. 상선의 말씀이 맞습니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겠죠…….’
기억은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데, 오히려 기억이 돌아오면 돌아올수록 자신만만했던 확신이 흐릿해지는 것만 같다. 그는 꿈속의 자신과 설영을 상기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던 그날의 밤을 생각하고, 또한 그때 그가 속삭인 고백을 떠올렸다. 자신감과 오만이 어우러져 반짝이던 금빛 눈에 혼란이 서렸다. 꿈속에서의 표정과 현실에서의 그 표정이 교차하고, 그 사이에서의 선명한 간극이 위화감을 불러왔다. 입을 맞춘 직후 보였던 표정과, 그날의 고백이 너무나도 상이해서. 그러나, 그리 말했던 것 또한 분명 너일 텐데,
……지금의 너는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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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저……상선.”
“……진짜 왜지. 혹시,”
“상선?”
의견을 구하고자 물었으나 되려 돌아오는, 넋을 놓아버린 듯한 반응에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던 다른 선문의 수장들도 자하를 흘금 돌아보았다. 요 며칠은 멀쩡해 보이시더니 왜 갑자기 저런 반응이란 말인가? 평상시에는 빛나기만 했던 금빛 눈동자가 조금 혼탁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기억을 잃었을 때도 이런 반응이 아니었고, 휘말렸던 괴변도 거의 다 해결했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시선을 주고받다가 곧 머리를 맞대고 자하에게 들리지 않게 수군거렸다.
“큰일이군. 당초 예상보다 저주에 심하게 걸리신 것 아닌가?”
“그건 분명 아니야. 분명 설영이가 상선께서 기억을 거의 다 찾으셨다고 보고했단 말이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자네들도 알잖나.”
“자네는 그 귀마……설영랑에 대한 그 맹신을 조금 내려둘 필요가 있어 보이네.”
“한 번만 더 불러볼까.”
“상선!”
자하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고, 갑작스러운 부름에 퍼득 정신을 차렸다. 평소라면 금방 알아챘을 시선을 아예 인지하지 못한 채로 한 가지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진림과 각 선문의 수장들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자하는 잠시 고민하다가 뻔뻔스레 고개를 드는 방안을 택했다. 겨울 햇살은 따가워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쏟아지는 빛에 눈이 아렸다. 그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아, 생각할 것이 있어서. 다들 무슨 일이지?”
“상선, 월성 한복판에서 괴변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괴변? 월성에서 일어나는 일 중 어지간히 심각한 것이라면 자신이 아직까지 모를 리가 없었고, 그렇지 않은 이상에야 다른 선문의 화랑들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텐데 왜 자신에게 보고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실 그리 위험하게 보이는 것 또한 아니었다. 사상자가 있는 것은 아니고, 밤만 되면 피투성이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월성을 빙빙 돌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말을 걸곤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아도 거리가 떠나가라 같은 말을 외치고 있다고.
“말하는 새? 그런 걸 화랑들이 잡아내지 못했다고?”
“예, 워낙 신출귀몰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새가 하는 말이 기이하여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했길래?”
“대재앙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계속 외친다고 합니다. 헌데 입 가벼운 낭도 몇몇이, 그 얘기를…….”
자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재앙신이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확실히 소멸시킨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나 그것은 오롯이 설영에 대한 것뿐. 대재앙신에 관련한 것은 선명히 기억했다. 수많은 희생과 노력 끝에 결국 완벽하게 진혼했고, 다시 그것이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만큼은 확연했다. 설영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하여 그것이 달라질 리가 없었다. 기억……. 자하의 심경이 자연스레 복잡해진다. 자연스레 목소리에 약간의 날이 섰다.
“본디 그런 죽은 것들은 두려움을 먹으면서 성장하지. 그런 낭설에 휘둘리지 않고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화랑도에서 앞장서서 그런 말을 유포하다니? 그러고도 선문의 낭도라고 할 수 있나?”
알아서 하라고 말하며 손을 저으려던 그는 문득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를 떠올리고 입술을 옹송그렸다. 대재앙신이라……. 그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 중 긍정적인 것은 없다. 허나 마침 자신을 괴롭히던 그 문제와 엮인 이가, 대재앙신과도 함께 엮여있지 않던가? 그는 곧장 마음을 바꾸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와 설영랑이 같이 가서 그 소리가 뜬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오도록 하지.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은 걸 어쩌면 그 괴변을 해결하다보면 해결할 수도 있으니까. 전에 그랬던 것처럼 함께 다니다 보면 기억이 더 잘 날지도 모르잖아?”
“예, 상선. 그러면 낭도들의 입단속은 확실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다가 자연스럽게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는, 화랑들을 쭉 돌아보았다. 딱히 괜찮은 대답이 나올 것이란 기대는 없었지만 혹시 모르지 않나. 작금 설영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것은 다른 화랑들일 터이니.
“이봐, 백언랑.”
“예?”
“분명 서로 마음이 같을 텐데도 상대를 거절하는 이유가 있다면 과연 뭘까?”
“예?”
“……아니, 됐어. 어쨌거나 설영랑에게 말해둬. 이따가 해가 지기 전에 비천택으로 오라고 말이야.”
난데없는 애정사라니? 할 말을 마치고선 생각난 일이 있다며 사라져 버리는 자하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상선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것은 항상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뜬금없었다. 월성 내에서 어울려 다니는 여인도 없으셨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거, 좀 당사자성 발언처럼 들리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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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뺨을 훑었다. 설영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되어서 비천택 앞에 선다. 화려한 저택의 앞까지 이르자,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던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이 집의 주인.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비겁하게도 상선이라는 지위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이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피해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설영랑.”
“……빨리 처리하고 가죠.”
자하는 휙 스쳐 가는 설영을 보며 혀를 찼다. 이 한겨울에 바깥에서 기다리기까지 한 보람이 없었던 것이다. 말을 걸 틈조차 없게 아주 찬바람이 쌩쌩 부는군! 이게 겨울 바람 탓인지, 설영의 태도 탓인지 알 길이 없었다. 과연 기억을 잃자마자 보였던 태도도 그렇고, 이름 그대로야! 그는 스쳐 지나가며 얼핏 보였던 서늘한 얼굴을 생각하고, 입술을 감쳐물며 기억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는 당위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선이 하는 이야기인데 신경은 써야 하는 것 아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설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자하를 돌아보았다. 해는 기울어 지평선 아래로 넘어가고, 그 뒤를 좇아 깔린 푸른빛 어스름 속에서 분노로 얼어붙은 눈동자가 금빛의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는 상선의 사과도, 그 ‘정인’ 같은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설영랑. 어제 일은…….”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빠르게 이어지는 말에 자하는 채 하려던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아야 했다. 설영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빨랐지만, 조금 헐떡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문득 한 장면을 떠올렸다. 시선을 피하는 창백한 얼굴의 화랑. 자신. 그리고 머리 위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새하얀 달빛…….
“기억이 온전치 않기 때문에 착각하시는 겁니다. 절대로.”
“설영랑.”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설영랑을…….’
왜냐하면 그 눈조차 내리지 않던 메마른 겨울,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설영은 그 말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그는 구태여 그날의 일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 날은 이미 지나갔지만, 그 일의 발원은 아직까지도 과거가 아니었으니. 설영의 말과 함께 또다시 떠오른 과거의 편린에 자하는 황망히 눈만 깜빡였다. 출처 모를 난처함이 문득 고개를 들어서.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평소처럼 유연히 넘기지 못하고 결국 부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그러니 설영랑, 들어 봐.
“내 말은, 우선 그 새를 잡고 유언비어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두려움이 괜히 월성 전체로 퍼지면 곤란하니까요.”
서로 불편한 이야기를 지금 꺼내 봐야 아무도 이득을 얻을 수 없기에 그 뒤로는 계속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눈을 밟는 발걸음 소리만 적막 속에서 선명했다. 자하는 설영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비스듬히 시선을 기울이며 걸었고, 설영 또한 고개가 앞에 고정된 것처럼 꿋꿋하게 시선을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 한참 입을 닫고 있던 설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재앙신이 돌아온다! 대재앙신이 돌아온다! 대재앙신이 돌아온다!”
입을 떼기 무섭게 들려오는, 귀를 찌르는 듣기 싫게 갈라진 소리에 둘 다 얼굴을 찡그렸다. 갑작스럽게 밤 중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푸드덕, 하는 소리와 무엇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은 빠르게 소리가 나는 근원지로 달렸다.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무엇인가가 부패하는 듯한 역한 냄새.
“대재앙신이 돌아온다! 대재앙신이 돌아온다!”
“……새가 신출귀몰해서 도통 잡을 수가 없다기에 날아서 도망치는 줄 알았는데. 저건 오리잖아?”
“다른 방식으로 도망쳤나 봅니다.”
“방법을 들었어야 했는데. 당연히 날아서 도망쳤겠거니 했지.”
“딱히 다른 화랑들도 방법은 모르는 모양이던데요.”
설영은 청예를 뽑아 들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다면 진작 잡았겠지. 저건 대재앙신과는 어떤 연관도 없는 것이 분명한 귀신이었다. 힘이 제법 강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연관된 괴변이라 하기엔 모자랐다. 아마 불안감과 두려움을 키우고 그로부터 힘을 얻기 위해 대재앙신의 이름값을 이용한 듯 했다. 아니면 강한 귀신을 본능적으로 따라서 저렇게 하고 있거나.
어쨌거나 진짜 대재앙신으로부터 비롯된 괴변은 더욱 재앙에 가까웠고, 여러 화랑들이 달라붙어도 쉬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뿐이었다. 당장 생각나는 일들만 하더라도……. 설영은 생각을 멈췄고,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달려오는 그것을 향해 청예를 휘둘렀다. 깔끔하게 양단된 새가 땅으로 떨어지더니, 잘린 주둥이를 달싹달싹 움직였다.
“대재앙신이 돌아온다! 대재앙신이…….”
“형체를 처리해도 그 안에 있는 영혼이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모양인데.”
부패한 지 오래인 껍데기를 적멸로 꿰뚫은 자하가 얼굴을 찡그렸다. 영혼이 아닌 겉껍데기만을 꿰뚫은 느낌이 수중에 선연하다. 본래라면 이런 느낌이 아닐 텐데. 썩어가는 냄새와 버석거리는 질감에 질색하는 자하의 손안에서 적멸도 웅웅 떨렸다. 검령도 불쾌한 것은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확인을 마친 자하가 설영 쪽을 돌아보았다.
“역시 대재앙신과 관련된 건 아니네.”
“예. 아마 계속 새에서 새로 옮겨가는 모양입니다. 사람과 관련된 비슷한 일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계속 같은 말을 외치고 다니니 찾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오래 묵은 것 같긴 하지만 해결하지 못할 만큼 강한 것도 아니니 마주치면 다른 몸으로 옮겨가기 전에 소멸시키면 되는 문제군요.”
애당초 화랑도의 상선씩이나 되는 인사가 나설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보고에서부터 확연했는데. 설영은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가, 떫은 것을 삼킨 얼굴로 자하를 마주 보았다. 아까전보다는 분노가 덜한 미적지근한 시선은 왜 그가 자신을 되도 않는 핑계로 여기까지 불렀는지 다 알고 있다는 눈초리였다. 자하는 모르는 척 외면했다.
“자, 빨리 찾아보자고 설영랑. 계속 이상한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불안하게 내버려 두고도 신국의 화랑이라고 할 수 있어?”
“예…….”
‘……지 않아.’
설영은 다시 앞서나가는 자하의 뒤를 따른다. 자하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정확히는, 설영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달빛이 비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밤이기에 주변은 어둡다. 달빛을 등지고 선 설영의 얼굴 위로 어슴푸레 그림자가 드리우면, 조각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에서 비롯된 기시감이 그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자꾸만, 복잡하고도 갑갑한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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꽥꽥거리는 소리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남겨진 흔적을 따라 월성의 대로변을 따라서 걷던 그들은 아까 전에도 들었던 익숙한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것을 듣고 달려갔다. 악귀는 아까 전 자신을 양단해버린 청년이 또 다가오는 것을 보며 달아나려는 듯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어딜 또 도망가려고.”
설영은 싸늘한 목소리로 검을 내리그었다. 영력이 번뜩이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악귀가 괴성을 질렀다. 뒤에서 팔짱을 끼며 구경하고 있던 자하가 눈을 깜빡였다. 저것이 자신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로를 찾고 싶은 것은 알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향해 달려들다니? 아까 전에는 설영랑에게도 그렇게 했지.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꽝인 악귀라고 할 수 있었다. 자하는 코웃음을 치며 적멸 위에 손을 올렸다. 가까이 오는 순간 일도양단할 심산으로……. 문득,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하는 당연하게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설영과 눈이,
‘나는 설영랑을 좋아하지 않아.’
눈이……. 동공이 크게 부풀었다. 자하는 적멸 위에 올렸던 손이 무색하게도 발검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아, 이런 날이었다. 달빛이 눈부시던 겨울밤. 호흡마저도 희게 얼어붙던 그날.
아, 그래서. 차곡차곡 쌓아왔던 의문이 해소되고서야 찾아오는 것은, 그러니까…….
‘그렇지만 지금의 관계가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야. 같이 대재앙신을 물리친 사이이니, 이 정도의 거절이 우리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
‘예. ……그럴 겁니다.’
“상선! 뭐하시는 겁니까, 갑자기!”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청예가 다급하게 허공을 갈랐다. 달려들어 자하의 손을 잡아 끌어낸 설영이 그려두었던 귀멸부를 던졌다. 끼이이이이익! 쇠를 긁는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망가진 몸을 버리고 새 몸을 찾아 도망치려던 귀신이 바닥을 뒹군다. 이윽고 귀멸부가 붙은 부분부터 타들어 가는 냄새와 소리가 주변을 메우고, 완전히 잿더미가 되는 것까지 확인한 설영은 숨을 몰아쉬며 자하의 손목을 잡은 상태로 그의 몸을 살폈다. 악귀가 달려들고 있는데 눈만 뜬 채로 반격조차 하지 않는 자하라니, 이건 정말로 이상했다. 성질머리를 따지자면 화랑도 제일을 다투는 이 아닌가.
“갑자기 뭡니까? 저주라도 또 걸린 겁니까? 왜 평소에는 잘만 하던 사람이…….”
“설영랑.”
멀쩡한 목소리에 설영의 맥이 탁 풀렸다. 이 사람은 이런 순간까지……. 무어라 한마디 하려던 찰나 손이 잡혔다. 자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혼란에 젖은 눈을 보며 설영은 얼굴을 찌푸렸으나, 잠자코 다음으로 나올 이야기를 기다렸다. 방심에 대한 위험성 설파는 하지 않아도 자하 또한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 “미안하다.” 설영은 갑작스러운 사과에 말문이 막힌 채 입술을 벙긋거렸다. 허나 눈앞에 있는 사람 또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경솔했어.”
“……무엇이 경솔했습니까? 멋대로 입을 맞춘 것? 좋아한다고 제멋대로 재단한 것? 아니면, 그 이후에도 계속 저를 불러내서 사람을…….”
“나는 너를 좋아하고.”
“…….”
“지금의 관계만으로는 족하지 않아.”
그러나 먼저 다가오고자 했던 이를 내친 것도 그였고, 잊어버린 것 또한 그였으니, 이제 와서 다가와 사랑을 속삭인다고 한들 설영이 믿을 리가 만무했다. 감정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으나 때가 맞지 않아서. 그는……. 자하는 설영의 손을 잡았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 그래서 그는 결국은, 그날 밤 자신조차도 자각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제야 간신히 정의했다. 고작, 이런 곳에서.
“나는……설영랑을 좋아해. 아니, 사람들은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겠지.”
이상하다. 설영은 생각했다. 방어기제로 드리웠던 태도에 금이 가는 것 또한 어쩌면 자연했다. 이 급작스러운 고백도, 지난 날의 입맞춤과, 지금의 그의 눈빛이. 정말로, 거짓이 아닌 진심인 것만 같아서…….
“그럼 그게 정말로……장난이 아니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설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당신은 그날 밤 내게 왜 그렇게 했지? 왜 하필이면 나를 잊었지? 왜……. 말문이 막혔다. 왜, 라는 물음만이 남아 그들의 주위를 맴돈다. 설영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당신은 왜…….
“……정말 장난도, 홀린 것도 아닙니까?”
“정말 장난이 아니야. 홀린 것도 아니고.”
자하는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듯 확실하고도 확고한 애정을 어찌 그날의 자신은 알지 못했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던 자신은 설영의 고백을 거절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은 그조차 모르고 제 사랑을 멋대로 고백했다. 그렇다면, 설영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장난 때문에 사람과 입을 맞춰?”
그날의 기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제아무리 사랑을 입으로 주워섬겨봤자…….
“하지만 상선은,”
“알아.”
“이젠 전부 기억났어. 그때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자하는 중얼거렸다. 말 한마디로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맑은 겨울. 겨울의 그 밤을 떠올린다. 조각조각 단편적인 기억들이 짜 맞추어지고, 자하는 그제야 망각이 가렸던 그날을 알게 된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새하얀 낯을 떠올리고,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던 그 거절을 상기했다. 어둠이 가렸으나 결국은 채 가리지 못하여 마주했던, 거절 앞에서의 설영의 표정을……. 제멋대로 날뛰는 감정을 외면하려 하다가 기어이 여기까지 왔다.
“너에게 입을 맞춘 건,”
그래, 그 감정을 지각知覺하지 못해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사랑이라 함은 무릇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에, 귀신의 장난에 휘말려 다른 무엇도 아닌 설영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설영랑을 사랑해서야.”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정말로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설영랑, 나는……그때도, 지금도.”
겨울의 월광은 그들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자하는 설영과 눈을 맞추었다. 차가운 바람이 달아오른 뺨을 식혀주었다. 설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각났던 감정을 주워 맞추어 자하는 기어이 온전한 형태로 만들었다. 겨울밤, 비추는 달빛은 지나치게 맑았고, 들이쉬는 공기는 차가웠으나 어느 순간 열기를 머금었다.
설영은 자신의 것과 결을 같이하는 감정을 결국 읽어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선명한 감정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없으므로. 자하는 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애정을 실어 속삭인다. 그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애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설영랑을 사랑하고 있어.”
눈이 내린 후였다. 눈을 쏟아부은 것이 언제냐는 듯이 맑아진 하늘 아래에서, 메마른 겨울은 그렇게 습윤한 기운을 머금는다. 추위 속에 겨울잠을 자기 위해 숨을 죽인 것들 사이에서, 기어이 살아 숨을 쉬는 것이 있다.
찬란한 겨울의 월색이 눈에 반사되어 비산하며 그들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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