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랑성이 저무는 날
진혼기 완결 스포 있음
명려님( @hsgh_bright )의 썰을 기반으로 한 글입니다.
자하의 숨이 멎었다. 잠이 들듯이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끝이다. 초옥인은 가만히 자하의 머리맡에 앉아서 그의 이마를 쓸었다. 살아있는 이의 것이 아닌 차가운 체온이 손끝으로 감겨든다. 닫힌 눈꺼풀이 열리지 않음에, 초옥인은 실감했다.
아아, 이것이 세 번째구나.
그리고 자신이 겪는 것은 두 번째다.
초옥인은, 설영은 입술을 벌려 웃었다. 어떤 감정일까. 글쎄, 그도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을 견뎌오며 감정은 무뎌졌고, 설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의 모든 것들이 오늘로 끝이 났으므로.
자신의 형님들, 자신이 알고 지냈던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 부를 수 있는 무언가를 버리게 한 저 사람도. ……그리고 신라도.
신국을 지키는 천랑성의 환생으로 태어난 사람.
신국의 별이니, 신국과 함께 지는 것은 무릇 당연했다.
초옥인은 멍하니 자하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로 앉아있었다. 비현실적인 감각이 그를 덮쳐 와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
한참 후에야 그는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그래도 나가보아야지. 세상이 어찌 변했는지, 그는 보아야 했다. 이제 더 이상 설영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초옥인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새까만 눈 안 가득히 하얀 세상이 담겼다. 환생한 그가 찾아온 그날과도 같다. 눈이 소복이 쌓여 세상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모든 것이 눈에 묻혀 있으니, 눈의 무덤일까.
아아, 눈은 왜 이리도 시리도록 새하얀 것인지.
초옥인은 잠시 시간을 헤아렸다. 그래, 눈이 내릴 때가 되었구나.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으니 찬바람이 제 몸을 스쳤다. 초옥인은, 잠시 제가 살던 초옥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 달칵.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리는 눈이 이 초옥마저도 전부 묻어버리기를.
이것으로 설영이 남긴 마지막 인간다움이 영영 눈에 묻혀 사라지기를. 설영의 마지막 집념 또한 그렇게 진혼鎭魂되기를.
초옥인은 그리 바랐다.
**
“신국은 어찌 되었습니까.”
“허, 이사람 신국이라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가? 김부金傅도, 견훤도 전부 고려에 귀순하지 않았나.”
“그렇군요.”
대강 이번 대의 왕이 어떤 이름이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몇 대가 지난 것일까. 초옥인은 그것까지도 헤아려보려다가, 관두었다. 천기를 읽는 일은 그만둔 지 오래였다. 어차피 자신은 인간을 이미 벗어난 몸. 설영의 삶이 전부 끝났다고 하여, 초옥인은 설영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걸고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그런 일을 하기에,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보이시나요.”
사박거리며 눈이 밟힌다. 가벼운 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초옥인은 웃었다. 설영이 태어나고 자라오며, 모든 것을 배웠던 나라가 이제 없음에도,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나부낀다.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선택이었으니까요.”
그래,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자 했던 모든 일을 했으니까. 차가운 눈이 뺨을 스친다. 이것이 신국의 끝이로구나.
그래도 괜찮았다. 초옥인에게는 설영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더 이상 남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흐르며 부스러진 것들 사이로 설영이 포기 할 수 없어 끝까지 쥐고 있던 것들이 있다.
그러나 초옥인은 남아있던 그 모든 것들을 전부, 초옥에 내려두고 왔다.
“눈에 묻혀 사라질 겁니다.”
기억하는 이는 자신 홀로 남은 채로, 그렇게 눈 속에 스며서…….
“그렇지만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곳을 찾을지도 모르지요.”
아주 먼 훗날 누군가가, 자신이 내려두고 온 그것들을 찾을 지도 모른다. 무슨 의미인지도, 어떠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그거면 됐습니다.”
모든 것이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누군가가 찾아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것이면 충분했다.
초옥인은 천천히 거닐었다. 사람들이 흥정하는 시장을.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대화하며 스쳐지나가는 길거리를. 어니젠가 화랑들과 함께 괴변을 해결했던 산을.
그렇게, 천천히 거닐었다.
눈이 그의 발자국을. 그가 남긴 모든 것들을 삼켜서,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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