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설영] 冬
함께 맞이하는.
※ 23년 1월에 판매했던 자하설영 회지 <달이 지나가는 시간>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 [자하설영] 春 ; 惡月 https://pnxl.me/n0eau0 글과 시점이 이어지지만, 읽지 않으셔도 이해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 완독스포일러 有
※ 환자초옥
두툼한 겨울 이불을 덮고 엎드려서는 온이와 장난을 치고 놀던 자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동지가 다 되어가네. 설영, 동지에 팥죽 쑬 거야?”
그 물음에 설영이 잠깐 미간을 좁혔다.
“팥죽은 싫은데…….”
“팥죽 싫어해? 귀신이야?”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자하의 말에 부적을 그리던 손이 잠깐 멈추었으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바삐 손을 놀렸다. 그러다 설영이 붓을 내려놓고서야 자하가 물었다.
“여태까지는 어떻게 보냈는데?”
“팥을 넣은 떡을 먹었지.”
백언이 팥죽을 싫어하는 막내를 위해 팥을 넣은 떡이라도 꼭 챙겨 먹이려고 했었다.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에 설영이 옅게 웃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자하가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이번 동지에도 그렇게 먹을까? 팥을 넣은 떡 정도라면 시장에서도 팔 텐데.”
“난 안 먹어도 되는 거 알잖아.”
팥죽을 먹어도 된다는 소리다. 어차피 설영이 먹지 않으면 되니까. 그 말에 자하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설영의 등에 기대었다.
“이제까지는 팥죽을 얻어먹었으니, 나도 팥을 넣은 떡을 사 먹을래.”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서 설영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동지가 지나면 새해가 금방이다. 올해 딱히 생일을 축하한 적이 없는데, 그럼 이 어린 자하의 생일은 언제일까?
“내 생일?”
“응.”
설영이 알던 상선 자하의 생일은 정월 열엿새 귀신날이었다. 한때 천랑성의 화신이었던 이. 어쩌면 눈앞에 있는 자하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영의 예상과는 달리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자하가 심드렁하게 툭 내뱉었다.
“나도 잘 모르는데.”
“몰라?”
설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응. 알려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음…….”
자하의 말에 설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자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생일은 왜?”
“그냥. 챙겨주고 싶어서 그랬지.”
그가 자하를 만났을 때는 악월인 오월이었고, 헤어졌을 때는 동지였다. 설영의 생일은 지나갔고 자하의 생일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생일을 챙겨보지 못했다. 물론 생일을 맞이했더라도 둘 다 괴변을 처리하느라 바빠 잊고 지나쳤겠지만.
어쩐지 아쉬워 보이는 설영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자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렇게 하자. 설영과 만난 게 작년 이맘때쯤이니까, 다음 주를 생일로 정하는 거야.”
자하의 말에 설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누가 생일을 그렇게 정해? 그냥 빨리 선물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 맞지?”
설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으나 되레 뻔뻔스레 웃었다.
“아무렴 어때! 내 생일이 정해져서 좋겠네!”
좋은 건 설영이 아니라 자하 쪽인 것 같았지만 저 웃음에 어찌 딴지를 걸 수 있을까. 설영은 저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눈 내린 바깥을 떠올리며 자하의 머리를 빗겨주던 설영이 툭 내뱉었다.
“날이 좀 풀리고 나면, 여행이라도 갈까?”
“갑자기? 어디로 가려고?”
자하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설영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가 아득히 먼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자하는 모든 것이 끝나서 내년이 오고, 그다음 해도 오고, 또 그다음 해도 온다면 그냥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했었다. 그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다. 적어도 설영이 보기엔 그랬다. 귀시에서 서검랑에게 툭 던지듯 했던 말도 그랬고, 태후로부터 피풍의를 받은 날에도 그랬다.
“…어디든.”
어디든 좋다.
둘은 이제 책임으로부터 멀어졌으니까.
더 이상 이 세상을 대재앙신으로부터 지켜내지 않아도 됐으며, 흉신凶神이 아님을 타인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둘은 이제 부적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평범한 어린아이와 예전에 화랑이었던, 조금은 특이한 초옥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바다라던가.”
“난 물은 영 별로던데.”
자하의 투덜거림에 설영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다.
“왜?”
“그냥, 느낌이 별로라서. 어릴 때부터 싫어했어.”
지금도 어리면서. 설영이 그리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아마 본능적으로 물을 꺼리는 것 같았다.
“나도 물은 그렇게 안 좋아하긴 해.”
‘물’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많다. 하나같이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설영이 그 모든 일을 겪어 형님들과 스승님을, 정명을, 다른 인연들도 많이 만났으니까.
‘무엇보다 이제는 미화될 만큼 오래된 기억이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자하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러다 만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
“설영이 말했던 대로,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같이 여행 다니는 것도 재밌긴 하겠다! 마치 수배자라도 되는 것처럼 몰래 떠나는 거지. 아무도 우리를 알아볼 수 없는 곳으로.”
자하는 역할극을 하듯 주제를 잡아놓고 여행하자는 뜻으로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설영은 그 말을 장난처럼 가볍게 들을 수 없었다. 언젠가 최종 결전을 앞두고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던 탓이다. 결국 그가 그 모습으로 맞이하지 못했던 미래.
“천축국 같은 곳도 좋을 것 같아. 낙타도 타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두고 별을 보는 거야.”
“……그래, 그곳에 가게 되면 그것도 해보자.”
둘은 오랜 시간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함께 맞이할 미래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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