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목윤적련]제야除夜

이번 한 해도 당신을 그리며 지나갔습니다.

보존도서관 by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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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차 주제 : 종소리가 들렸다.

목표 글자수 : 5005/5000


종소리가 들렸다. 한번, 두번, 세번…….

 

길고 끝없이 이어지는 종소리의 울림을 들으며 목윤은 멍하니 그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버석한 흙이 발끝에 밟힌다. 비릿한 혈향과, 불어오는 먼지. 죽은 이 또한 향을 맡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영혼으로 느껴지는 것? 끝없이 탑을 돌고 있던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느려진 채로 그는 생각했다. 나는 이미 죽었을진대, 어째서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 문득 목표를 위해 하릴없이 반복하던 행위 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의문이 떠올랐다. 애초에 나의 목표가 무엇이기에 나는 아직도 구천에서 떠돌며 이렇듯 탑을 돌고 있나.

 

“---!!!”

 

문득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익숙한, 아주 익숙한……. 종소리가 방해하는 탓에 걷는 발은 느릿해졌으나 멈추지는 않고 계속해서 탑을 돌며 목윤은 기어이 그 답을 떠올렸다. ……맞아. 적련. 그녀를 만나야지. 그런데 왜 만나고 싶은 걸까. 그녀를 만나고 싶다면, 나는 왜 이곳에서 탑을 돌고 있지? 목윤은 언젠가의 나날을 생각했다. 국사의 당부, 자신의 제안, 그녀, 적련. 그 사랑스러운 여인과 처음 마주 보았던 그 어느 날. 그 어떤 나날을 생각한 목윤은 다시, 종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발밑 버석이는 소리가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섞여 귓가로 들려온다. 아, 웃는 이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그녀의 웃음소리. 목윤은 다급해지려는 발걸음을 바로잡았다.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대신 탑을 돌며 그는 적련을, 그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났을 아이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녀는 자비심을 되찾았겠지. 우리 아이는 행복하게 자랐을 거야.

 

이 탑을 돌면, 그녀를 만날 수 있겠지…….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을 물어뜯고 있는 것 같았다. 고통으로 아득했고, 종소리가 자꾸만 발목을 잡아채 번거로웠다. 그럼에도 목윤은 단정한 모습을 버리지 않고 탑을 돌았다. 언젠가의 약속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래, 전쟁이 끝나면 같이 탑돌이를 하기로 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자신은 탑돌이를 하고 있으니까. 그녀 또한 하고 있겠지. 그녀는 진실을 알게 된 후로 변했을 테다. 그녀는 자신을…….

 

“…….”

 

자꾸만 들려오는 웅혼한 종소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그를 옥죄려 드는 것 같아 목윤은 간신히 그것을 떨쳐냈다. 종소리가 들리면 자꾸만 가라앉으려던 정신이 수면 위로 올라왔으나, 그것 이상으로 그를 방해하려고 들었다. 고통으로 아득한 것 또한 종소리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저 종소리를 몇 번째 듣고 있는 거였지.

 

 

*

*

 

 

“벌써 한 해가 다 지났네.”

 

목윤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의 길게 늘어진 머리로 손장난을 치던 적련이 문득 말했다. 서른세 번의 타종 소리가 새까만 하늘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왔다. 전쟁 탓에 날짜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 목윤 또한 그 말에 해를 셈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다. 이것으로 그녀와 몇 해의 시간을 보낸 걸까. 목윤은 적련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그렇군요.’ 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번 한 해는 종일 너와 보냈어.”

 

그러고 보면 전쟁을 할 때도, 하지 않을 때도 그러했다. 적련의 말에 그 사실을 상기한 목윤 역시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리 또한 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그 또한 괜찮은 것 같았다. 바깥 바람을 맞고 돌아와서인지 조금은 서늘한 손이 적련의 이마를 스치고, 그 냉기조차도 기꺼이 만끽하고 있던 적련이 즐겁게 입을 열었다.

 

“잠시 전선에서 빠지긴 했지만 곧 다시 돌아가겠지. 그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같이 탑돌이를 하면서 소원이나 빌까, 목윤?”

 

그때는 아마 아이 또한 함께일 것이다. 존재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유독 조심스러운 적련의 손길이 잠깐 배 위를 스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목윤의 눈가에도 또한 부드러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적련은 그의 이러한 부드러운 모습이 기껍고도 좋아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었다. 피먼지가 가득한 전장을 뒹굴었어도 그의 뺨은 여전히 그의 성정만큼이나 부드러웠다.

 

“탑돌이라면, 무엇을 빌고 싶으십니까?”

“너와 내 행복.”

 

……그리고 이 아이의 행복. 그 말과 함께 시선이 마주친다. 적련은 웃었다. 너만 곁에 있으면 난 행복할 테니 사실 그런 것을 탑에 대고 빌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목윤은 문득 일어난 충동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적련은 익숙하게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목윤의 머리카락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보통 사람들보다도 따뜻한 손, 그리고 입술과 호흡…….

 

 

*

*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목윤은 멍하니 생각한다. 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흐릿했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맑아지고, 이지가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걸음은 여전히 축 늘어질 것만 같고, 한 발을 떼어낼 때마다 기이한 고통과 탈력감이 따라붙었으나.

 

익숙한 서른세 번의 타종 소리. 그날 이후 그들은 전쟁터로 다시 돌아갔고, 그리고 오해로 인해 자신은 적련의 손에 죽었다. 그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목윤은 가늠해 본다. 죽은 이후라서, 그저 어떤 것도 살피지 않은 채로 기원하며 탑을 돌아왔어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벌써 또 일 년이 지났구나. 문득 사랑스러운 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타종을 마친 종소리가 남긴 기나긴 울음마저 점차 잦아들고, 그와 동시에 다시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목윤은 다시금 걸음을 서두른다. 적련, 적련, 적련, 적련……. 중얼거리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었다.

 

“적련…….”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제가 그립지는 않으십니까. 저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행복하십니까? 저희의 아이는 잘 자랐습니까? 당신은, 자비심을 되찾았나요? 당신이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잘 지냈으면 하고 바랍니다, 부디 저의 이 기원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결국 형태를 취하지는 못한 채로 입 안에서 맥없이 사라진다. 그녀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었기에, 헛되이 허공 중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 그리움과 기대, 뒤죽박죽 섞인 감정들과 제 행동들을 온전히 정의 내리지도 못한 채로 목윤은 무작정 걸었다. 부디 이 걸음의 끝에 그녀가 있기를. 그녀가…….

 

‘종소리는 ……라고 ……지요. 실로 ……지 않습…….’

 

언젠가, 국사에게 들었던 말이 뇌리에 떠오르려다가 맥없이 사라졌다. 무슨 말이었을까? 왜 그런 말이 떠오르려 했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고 하늘과 땅에 울려도 메아리의 근본은 알지 못하니, 신종의 원음圓音을 들었음에도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이미 미혹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된 까닭일까. 새하얀 눈이 그를 통과하며 바닥에 내려앉는다. 언제 이렇게 눈이 쌓였을까. 흙먼지가 아닌 눈을 밟는 감각이 느껴진다.

 

목윤은 자신의 상황도, 적련의 상황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그저 걸었다. 날씨가 바뀐 까닭은 그녀를 그리다가 벌써 일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종소리조차도 잠시나마 그의 상황을 환기시켰을 뿐, 그의 눈과 마음을 가린 미혹을 온전히 거두어 내지는 못하였다.

지난 수십 년간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늘 그러했듯이.

 

‘이번 한 해는 종일 너와 보냈어.’

 

즐겁다는 듯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던 바깥의 사늘한 바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기만 했던 손과, 살심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평이 무색하게도 자신을 보며 무구하게 웃고 있던 얼굴.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와 자신들의 행복을 빌고 싶다며 말하던 그 목소리는, 이미 오래 전의 일임에도…….

 

“탑돌이라면, 무엇을 빌고 싶으십니까?”

“너와 내 행복. 그리고 이 아이의 행복.”

 

목윤은 그래서 탑을 돌았다. 적련이 빌고자 했던 것을 자신 또한 함께 빌고 싶어서. 간혹 종소리가 들려올 때면 희미하게 돌아온 정신으로 그는 고작 그것이 구천을 떠도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를 자문했으나, 역시 답을 얻지는 못했다. ‘목윤은 어디 있나! 당장 데려와!’ 광기에 젖어 웅웅거리는 소리가 웃음소리와 함께 귓가를 스치운다. 검을 들고 대결을 하자며 활기차게 말을 걸어오던 여인이 떠올랐다.

 

“여기 있습니다. 당신을…….”

 

그래, 적련이다. 적련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목윤 또한 적련이 그리워서, 적련을 보고 싶었기에 그녀의 부름에 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이었기에, 아무리 부름에 응해 적련을 부르고 답을 해주고자 하여도 그녀에게 자신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괜찮아. 이 탑을 다 돌면, 죽어서도 구천을 떠돌며 비는 이 소원이 갸륵하게 여겨 하늘이 정말로 이를 이루어 준다면…….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지면, 나는 그때서야…….

 이상한 일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꽃이 피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가 떠오르는 붉은 꽃이었다. 그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알아 하늘이 피워낸 것일까.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아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울리고, 그녀를 닮은 사랑스러운 꽃은 탑 주위에 만발한다. 이제는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겨웠다.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고통이 자신을 얽매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이 왜 이렇게 되고 나서도 구천을 헤매며 탑을 도는지 목윤은 답을 구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지만……. 어슴푸레한 하늘 위로 다시금 종소리가 들려온다. 바람 탓인지 그 소리 탓인지, 붉은 꽃이 하늘거리며 흔들린다.

 

스물 여덟 번의 종소리. 그래, 벌써 새벽이구나. 종소리를 들으며 그녀와 그런 약속을 한 것도 벌써 일 년이 지났지……. 그녀는 자신이 이렇듯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켜야했다. 그녀와 약속 했으니까……. 목윤은 다시금 비척이는 걸음을 떼었다. 이 탑의 끝에 그녀가 있겠지. 다시금 만나면, 그때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말을 그녀에게 해줘야겠다. 그는 여전히 미혹에 취해 아무것도 정의 내릴 수 없었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탑을 도는 그를 뒤로하고 붉은 꽃잎 한 장이 툭 떨어져 바닥에 내려앉는다.

 

 

아, 적련. 이번 한 해는 비록 당신의 곁에 없었지만, 또한 당신을 그리며 지나갔습니다.

당신도, 저 꽃을 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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