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자하] 아주 작은 조각 글 (1)

진혼기 패러디, 현패

선배는 항상 내게 눈치가 없다고 말했다.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타박하듯 건넨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반짝거렸다. 교수의 의중을 못 읽어도, 술자리의 분위기를 파토 내도 그저 재밌어했다. 선배가 웃으며 중재해주었기 때문에 많이 일들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과실에 남아 과제를 하고 있다가 편의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가랑비가 저녁을 적셨다. 뛰어가려던 찰나 우산을 들고 마중 온 선배와 마주쳤다. 돌아오는 길은 짧고도 길었다.

- 내가 없으면 우리 설영이 누가 챙겨주지?

- 누가 선배 설영이에요?

반사적으로 대꾸하고 보니 한 문장이 걸렸다. 내가 없으면?

- 선배 어디 가세요?

- 어디 가볼까 하고.

선배는 한 번에 제대로 대답하질 않는다. 처음엔 짜증이 났지만 이미 익숙해졌다.

- 어디 가시는데요?

- 네가 없는 곳.

- 선문답 재미없어요.

- 선문답 아닌걸. 네가 없는 곳에 갈 거야.

평소와 같이 빙글 웃는 얼굴이다. 선배는 접은 우산을 팔에 걸고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과실에 오래 방치되었던 검고 큰 우산 끝으로 빗물이 톡톡 떨어졌다. 비가 그친 하늘엔 어둠이 가득했고 담배 연기 사이로 젖은 풀 내음이 났다. 점멸하는 담배 불빛이 사그라들어 흔적이 남지 않을 때까지 내가 없는 곳에 가야 할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 선배는 내가 옆에 있는 것이 괴로워요?

방어하듯 지나치게 빠른 답이 돌아왔다.

- 왜 그렇게 생각해?

-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요.

- 아닌걸. 농담인데.

화사한 웃음이 짙어져서 진심이라고 확신했다. 선배는 위급할수록 태연하고,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여유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걸 알만큼 함께 했다.

- 왜 괴로우세요?

웃음을 걷히고 차분한 음성이 내려앉는다.

- 네가 그걸 모르니까.

선배는 항상 내게 눈치가 없다고 말했다. 눈치가 없다는 것은 읽어야 할 것을 못 읽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 있는 걸까? 함께 한 시간이 엮어낸 맥락을 뒤져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 가지 마세요.

- 뭐?

- 가지 마세요. 제 옆에 있는 것이 힘들어도 가지 마세요.

-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황당해하는 선배의 손목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잡아야 한다. 선배를 떠나보내면 후회한다. 근거는 없다. 하지만.

- 제가 알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드물게 선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선을 돌려 한숨을 토해내고 다시 나를 바라볼 때까지 손목을 놓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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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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