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부제국선 설영자하 / 설영자하 쁘띠존 동지 해시태그 이벤트 참가
#백호랑이장가가는날 #부제와국선이문제다
아무것도안함 안사귐 적폐 캐붕 기타등등.. 주의
설영은 손가락으로 나이를 셀 수 없게 될 무렵에 자하를 처음 보았다. 자하가 막 화랑도의 국선이 된 참이었다. 키는 지금과 비슷했지만 조금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설영에게 말했다.
“나는 위대한 신국의 국선이니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들어줄 수 있지. 그러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봐.”
그때에 비하면 손 두 뼘 정도가 자란 설영이 대뜸 자하한테 물었다.
“그렇게 말했었죠?”
“뭐야. 갑자기?”
자하는 설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자하의 시선은 여전히 손에 든 두루마리에 꽂혀있었다.
“그땐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제가 국선이 해줄 수 없는 걸 말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한 말이지. 막 열 살 넘은 꼬맹이가 원하는 것 정도쯤이야.”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설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하는 그제야 두루마리에서 눈을 떼고 설영을 보았다. 설영은 언제나의 표정으로 자하를 보고 있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왜 또 불손한 표정이지? 그래서 내가 못해준 게 있나?”
없죠. 신기하게도 자하는 설영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고 설영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다. 설영이 모르는 때에도 자하는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자하에게 온 거지만⋯막 자하의 눈치를 보던 설영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럼 지금은요?”
“뭐가?”
“지금 제가 원하는 게 뭘까요?”
“실없는 소리나 할거면 가지그래?”
설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 말해야할지 고민중인 것 같았다. 답지않게 말을 고르는 것이 이유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자하는 한발 물러났다. 설영은 모르겠지만 자하는 확실히 설영에게 무른 부분이 있었다. 저 버릇없는 부제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침부터 찾아와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뭔데?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말해.”
엊그제 설영이 태천관과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 날 밤, 보고하러 올 줄 알았는데 설영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얘기를 하려는 건가? 아니면 백호영도의⋯
“그러니까, 제가 혼서를 받았는데요.”
이건 예상 범위를 벗어났는데. 자하는 두루마리를 내려 두었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설영에게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하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설영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눈치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네?”
“할말은 그게 끝이야?”
“⋯아. 괜찮으세요?”
“뭐가?”
“그러니까⋯국선은 아직 결혼을 못 하고 아니, 못하는 게 아니라 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죠. 아무튼요. 부제가 먼저 결혼을 하는 거라든가⋯그리고 제가 그만두면 아무래도 또 부제를 뽑으셔야 하니까요. 아, 비천택 창고에 잔뜩 사두신 술을 먹을 사람이 없다든가⋯그런 것들이요.”
설영이 횡설수설 말했다. 혼서만 받은 게 아니고 이미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건가? 그렇다면 아무리 설영이 숨겼다고 해도 자하가 모를 리 없었다. 혼자 어디까지 가는 거지? 혼서에 대해 듣고 나니 설영이 지금 묘하게 들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이상한 행동은 그 연장선일 것이다.
“괜찮냐는 질문이 이상한데. 내 허락을 받으러 온 거야? 신국에서 제일가는 망나니 설영랑이 장가를 다 간다니⋯이보다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국선으로서는 마땅히 기뻐할 일이지.”
“제가 화랑을 그만두는 게 좋은 일이라고요?”
“무슨 요약이 그래?”
“부제를 다시 들이셔야 하잖아요. 그동안은 일도 혼자 다 하셔야 할 거고⋯제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엄청 고생하셨는데⋯.”
“알긴 아네.”
“진림랑이 나간다고 했을 때는 그렇게나⋯”
“진림이 혼인한다고 그만둔 거면 반대 안 했어.”
“⋯⋯.”
“얜 날 뭘로 보는거야 진짜? 내가 할 일 많아진다고 네 결혼을 반대할 것 같아? 부제가 나가는 게 귀찮아서 뭐라 할 것 같았던 거야?”
그렇다기보단⋯설영은 대답대신 마음에 안 들어. 그런 표정으로 자하를 볼 뿐이었다. 지금 황당한 게 누군데. 자하는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설영랑 나름은 걱정하고 있는 걸지도. 자하는 말투를 부드럽게 바꿔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지.
“내가 걱정돼? 설영랑이 없으면 조금 고생하긴 하겠지만 네가 신경 안 써도 돼.”
“국선은 신경 안 써도 돼. 그런 말을 들으면 바로 신경을 끌 수 있는 모양인데 저는 아니거든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말을 똑바로 해야 알지. 설영랑이 원하는 게 뭔데?”
⋯
”국선은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죠.”
“아직까지는.”
“국선이 혼서를 돌려보낼 때마다 국선이랑 계속 이대로 비천택에서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안심이 됐었어요.
그리고 국선이 계속 계속 혼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무슨 열살짜리 어린애같은 소리야. 키만 큰건지. 혼인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자하의 눈에 열한 살의 설영이 겹쳐 보였다. 어린 설영은 자하의 손을 꼭 잡고 놔주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한 끝에야 놔 주더니. 백호영도에 들어가고 나서는 자주 찾아오지도 않았지.
“설영아.”
자하가 불렀다. 화랑도에 들어온 이후 자하가 설영의 이름을 이렇게 부른 건 처음이었다.
“네가 없으면 고생할 거야. 매번 뭐라고 하긴 했지만 설영랑은 능력 있으니까. 알고 있지? 그리고 창고에 잔뜩 채워둔 술은 다 누가 먹지? 전부 너 먹으라고 사둔 건데. 혼인한다고 못 오거나 하진 않겠지만 한참 동안 쌓여있겠지. 심심하지 않냐고? 심심할걸. 내가 한마디 하는데 열마디로 대답하는건 너밖에 없어.”
“네.”
“그런데 그게 네 결혼을 탐탁지 않아 할 이유는 아니지. 네 선택이니까. 나는 네 선택에 관여하고 싶지 않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돼. 늘 그렇게 해왔잖아.”
“왜요?”
“왜냐고? 별 말을 다 하게 만드네. 그야 그런 네가 좋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 비록 하고 싶은 일이 아침부터 일하는 국선한테 찾아와서 어린애처럼 구는 거라고 해도. 그냥 너답게 사는 게 좋으니까. 이제 됐어?”
“그런 걸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나도 몰랐다.”
설영은 여전히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혼인은 안할거예요.”
만나긴 한거야? 혼서가 들어온다고 다 성사되고 그런 게 아니야. 자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그래. 설영랑이 하고 싶은대로 해.”
하고 말했다.
설영에게 말려든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이러고 싶었다.
“비천택에도 더 있을 생각이고요.”
“그래. 그건 좋은데. 쫓겨나지 않으려면 일을 잘 해야 하지 않을까? 능력 있는 부제님이라 그런지 어제 준 일은 벌써 다 끝내신 모양이죠?”
“⋯아뇨.”
“오늘까지 끝내.”
이게 아닌데. 설영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안 할 거예요. 설영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 그래. 혼인을 안 한다는 뜻이겠지? 자하는 빠르게 사라지는 설영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쩌다 저렇게 자란 건지. 자하는 잔뜩 들뜬 채로 결혼해도 괜찮냐고 묻는 설영을 떠올렸다. 하지만 확실히 설영은 자하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설영이 저렇게 자란 데에는 자하의 탓이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설영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고백해온 것은 그후로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의 일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