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행

부제국선 설영자하 / 설영자하 합동지 참가


설영은 왜 자신이 지금 자하의 뒤를 밟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지금 그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형님들과 술을 마시고 있어야 했다. 국선이 시킨 일도 다 끝내두었고, 국선이 형님들과 같이 마시라며 준 술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들고 형님들과 약속했던 객잔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설영은 국선을 몰래 쫓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설영이 따라오는 것도 모르는 채로 앞서 걷고 있는 국선은 며칠 전 설영에게 엄청난 통보를 했다. 마치 시시껄렁한 농담이라도 하는 듯, 설영랑. 이제 그만 돌아갈래? 그건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통보였다!

그래서 설영은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자하는 설영을 보고 싱긋 웃더니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이만 백호영도로 돌아가도 좋아. 퍽 다정한 말투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바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게 맞았을 텐데. 설영은 그저 자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나 좋아? 자하가 물었다. 자하는 설영의 감정에 그렇게 이름 붙이기로 한 것 같았다. 좋냐고? 당연히 좋아야 했는데 좋지 않았다. 자하는 언제나 설영이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굴었으나 이번엔 확실히 틀렸다. 설영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니 못한 채로 가만히 서 있는 설영에게 자하는 술병을 내밀었다. 백 년 된 청빙정이었다. 자하의 방에 자랑하듯 전시되어 있었는데, 설영은 그걸 유심히 쳐다보곤 했었다. 자, 네가 그렇게 탐내던 술이야. 사흘 후에 형님들과 약속이 있다 그랬지? 그때 말하면 되지 않을까? 축하주로 같이 먹어.

어느새 설영의 손에는 백 년 된 청빙정 병이 들려있었다. 백호영도로 돌아간다, 청빙정을 형님들과 같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분명 둘 다 좋은 일일 텐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설영은 이 기분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설영은 자하의 금빛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장난, 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디 아파요?” 

하, 자하는 코웃음을 쳤다.

“윗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나니까 봐주는 거야. 나니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설영은 다시 한번 물었다.  

“왜요?” 

자하는 고개를 한번 젓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뭐가?” 

“왜 돌아가라고⋯” 

“그야, 네가 계속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설영은 이곳에 계속 남을 생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월계는 생각보다 좋았고, 부제 생활도 그런대로 익숙해졌지만, 설영은 여전히 자신을 백호영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백호영도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그 ‘언젠가’가 되어 설영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설영은 지금의 기분을 표현할 방법을 몰랐다.

“그럼, 국선은요?”

“나야 뭐 진림이 그만두고 설영랑이 부제가 되기 전까진 혼자 했었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지.”

“⋯⋯.”

자하는 설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해줄까 말까. 그런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까 설영랑한테만 특별히 말해줄까. 사실은 화랑을 그만둘 생각이야. 그 전에 국선의 간악한 꾀에 속아 억지로 부제가 된 불쌍한 설영랑은 먼저 돌려보내 줘야겠지.”

자하는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설영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하는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항상 다 아는 듯 굴더니 지금은 알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설영은 드디어 사사건건 자신을 괴롭히던 국선의 곁에서 떠나 비천택을 나가게 되고 백호영도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국선은 어떻게 되지? 설영은 자하가 국선이 아닌 화랑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설영이 화랑도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쭉 국선은 자하였다. 그러니까 설영에게 국선과 자하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국선은 상선이 되는 건가? 상선은 가끔 회의에 출석해 얼굴을 비치곤 했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것이 아닌가? 자하가 상선이라면 비천택은 여전히 화랑들로 가득 차서 시끄러울 것이다. 설영은 비천택에 가끔 들러서 상선에게 인사를 하는 상상을 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자하가 화랑을 그만둔다는 것이 그런 의미가 맞나? 설영은 이대로 돌아가고 나면 왠지 다시는 자하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영과는 크게 관계없는 일일 것이 분명한데, 왜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기분이 드는 걸까.

설영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자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자하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화랑들을 볼 때마다 소중히 여기던 물건들을 하나씩 나눠주곤 했다. 자하를 앞으로 볼 수 없게 된다. 그런 추측은 어느새 확신이 되었다. 자하가 설영의 손에 쥐어 준 청빙정도 하나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사흘 동안 자하가 그만둘 거라는 소식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다들 인사를 하러 와서는 서운한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다들 자하의 앞으로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걸까? 그들을 보는 자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설영은 자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신을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나도 서운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계속 함께하던 사람이 떠난다고 하면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하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설영에게 자하는 좋은 사람과 아닌 사람 중, 좋은 사람 쪽에 속했다. 정이란 건 무섭다. 설영은 사람의 온기를 좋아했고, 자하는 충분히 따뜻한 사람이었다.

며칠간, 거의 집에만 있던 자하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자하를 계속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설영은 자하가 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형님들과의 약속은 취소해 둔 지 오래였다. 술은 다음에도 마실 수 있으니까. 설영은 자하가 건네준 술을 백호영도로 돌아가기 위해 싸둔 짐 속에 소중하게 넣어두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형님들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자하는 빠르게 걸었다. 설영은 자하를 뒤따라가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자하의 뒤를 밟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자하가 설영의 미행을 눈치채고 설영을 따돌리려고 하는 것인데, 다행히 자하는 설영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설영은 문득 자하와 나갔던 첫 야행을 떠올렸다. 막 자하에게 속아 부제가 되었을 때쯤의 일이었다. 설영은 부제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진림랑이 왜 나갔는지 알 것 같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일을 보면서 생각했다. 부제가 된다는 게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설영은 부제가 되자마자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던 어느 밤, 자하는 설영을 억지로 일으켜 자신을 수행하라고 했다. 그냥 놀러 나가는 것 아닙니까? 자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말 말고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이길 수 없겠지. 잠시 고민하던 설영은 조용히 자하의 뒤를 따랐다. 도착한 곳은 아슬아슬한 누각이었다. 자하는 설영을 끌어당겨 하늘을 가리켰다. 시선이 자하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 끝엔 별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천랑성? 그날 본 별의 반짝임이 아직도 선명했다. 왜 자하가 이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설영은 정말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아마도 설영은 자하에게, 그런 것보다 저는 자고 싶은데요. 하고 말했던 것 같다. ‘같다’인 이유는 설영이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설영은 정말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떠 보니 침상 위였다. 설영이 보인 추태에 대해 몇 날 며칠이고 떠들어 댈 줄 알았는데, 자하는 의외로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어땠냐고 물었다. 설영은 좋았다는 대답 외엔 할 수 없었다.

자하는 한참을 앞서 걸었다. 점점 풀이 무성해졌다. 이쪽은 숲이었던가. 최근에는 와본 적이 없는 길일 텐데,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설영랑. 좀⋯”

설영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느새 자신의 뒤편에 선 자하가 설영의 귀에 속삭였기 때문이다. 대체 언제⋯, 자하는 놀란 설영을 보며 살짝 웃었다. 늘 그 웃음이 얄밉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미행을 할 거면 좀 몰래 해야지?”

“언제부터 아셨어요?”

“비천택에서부터. 내가 나가자 할 땐 그렇게나 무서운 표정을 하더니 막상 혼자 나오니까 몰래 쫓아오는 건 무슨 경우지?”

“아직 국선이시잖아요.”

“뭐?”

“부제는 국선을 보필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미행을 들켜 민망해진 설영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얼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 부제가 맞는 말을 했네. 하지만 나는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닌데. 바쁘니까 이런 쓸데없는 일에 부르지 말라고 한 건 설영랑 아니었나?”

설영은 못 들은 척 한 채로 자하의 뒤를 계속 따라 걸었다. 

“그런데 저희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습니까?”

민망해진 설영이 말을 돌리기 위해 꺼낸 화제였는데, 자하는 걸음을 멈췄다. 자하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왜인지 상선이랑 여기를⋯”

“상선?”

자하가 설영의 말을 끊고 물었다. 상선이라고? 그 순간 설영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설영은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설영의 옆엔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의, 자하가 있었다. 풍경은 익숙했으나 사람은 낯설었다. 설영은 그들이 금방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인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내가 빨리 그만뒀으면 좋겠나 봐?”

표정과 반응을 봐선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게 뻔했는데. 자하는 장난을 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설영은 그 장난에 기대보기로 했다.

“아니요.”

“그래. 알아. 여기서 네가 나를 그렇게 불렀었잖아.”

자하는 재미없다는 듯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이게 중요한 일이긴 했다.

“네.”

“뚝 뚝 끊기긴 했지만 그래도 기억이 조금 남아 있어서 그날 만났던 사람들하고 얘기했었거든. 근데 전부 기억이 없대.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나를 미친 사람 보듯 보던데? 그래서 꿈을 꾼 건가 했는데. 너는 기억하고 있네.”

“방금 기억났습니다. 상선⋯아니, 국선이랑 걸으면서요. 그러니까 상선이 멱리를 쓰고 이곳을 달리고 계셨었는데⋯”

“너도 썼잖아.”

“역시 그건⋯다른 세계의 저와 국선인 모양입니다.”

설영과 자하는 드문드문 떠오르는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자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안개가 낀 듯 흐릿했던 기억이 선명해져갔다. 자하도 그런 것 같았다. 설영과 자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과, 둘이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이 매개체가 된 것 같았다. 둘은 조각을 맞추듯 조금씩 기억을 맞춰 나갔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설영과 자하가 머물렀던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세계의 설영과 자하는 부제와 국선이 아닌, 백의화랑과 상선이었다. 백의화랑이라니. 그 세계의 국선은 이쪽보다 더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힌 모양이라고, 설영은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그들은 ‘대재앙신’이라는 것에 맞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사하다 모종의 이유로 이쪽 세계로 잠시 떨어졌고, 많은 사람을 만나 돌아갈 방법을 찾아 내 돌아갔다. ‘대재앙신’이란 그들의 세계에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이곳에는 실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이 설영과 자하가 사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그 백의화랑과 상선이, 어떤 무녀를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 있는 이곳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무녀가 있었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억나는 대로 이 근처로 와본 건데, 그 신단수도 사라졌고 무녀님도⋯”

지금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 때문에 이 밤에 나오신 거였군요.”

그럼 나를 데리고 오는 편이 낫지 않나? 설영은 자하를 쳐다보았다. 그때 커다란 어둠이 두 사람을 덮쳤다. 자하는 올 게 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자하가 말 안 한 것이 더 있었다. 설영은 자하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게 설영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설영의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설영을 뒤덮고 있었다. 밤의 숲이라면 마땅히 들려야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떤 영이 특수한 공간을 만들어 낸 모양이었다. 설영은 자하를 찾았다. 자하는 설영의 옆에 있었다. 자하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설영은 안심이 되었다.

“일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그거야 널 떨어뜨리려고 한 말이었지. 그런데도 끈질기게 따라붙어 버리는 바람에 혹처럼 달고 왔지만.”

“그래서, 뭡니까.”

설영의 물음에 자하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 대답했다. 마치 내가 상관에게 보고라도 하는 것 같은데,

“이곳에 오기 위해 조사하다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곳에서 최근 몇몇 사람들이 실종되었다고 하더군.”

“보고된 사건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응. 다들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런데 기억이 없대. 뭘 잃어버리거나 다친 것도 없고. 무사히 돌아왔는데 기억도 없으니까 다들 조심해야 한다는 말만 하고 있던데? 어젠가 시장에 갔다가 들었지.”

어제라면, 설영이 내내 자하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몰래 시장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시장을 참 좋아한다니까. 자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 덕분에 도움이 되는 일이 많긴 했다. 그렇지만⋯

“혼자 가서 어쩌려고 그러셨죠? 국선이 혼자 실종되기라도 하면⋯”

“그래서 둘이면 나아?”

“네?”

“너라도 남아 있어야 내가 사라져도 찾겠지? 소문에 대한 기록은 이미 해두었으니까. 그걸 보고 알아서 이쪽으로 올 거라고 생각했지. 아무리 설영랑이 국선을 싫어해도 부제라면 그 정도는 하겠지 싶어서. 근데 이렇게 바로 미행할 정도로 부제가 나를 좋아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그리고 오늘은 설영랑이 그렇게 좋아하는 형님들이랑 술까지 마시기로 하지 않았나? 아끼는 술까지 내주고 정말 완벽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설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당신을 이대로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줄 알고⋯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진 않았다. 특히 지금의 자하한테는 더더욱. 말해 봤자 뭔 상관이냐고 물어보겠지. 그리고 설영도 그 질문의 정답을 몰랐다. 그게 설영이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어쩌면 다른 세계의 자신에게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다친 사람도 없고 빼앗긴 것도 없다지만 문제를 알게 된 이상 해결해야 했다. 설영은 말을 돌렸다.

“혹시 그 사람들에게 더 들은 건 없었나요? 그러니까 시장에서요.”

“글쎄⋯”

그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소녀의 노랫소리였다. 자하는 뭔가 말하려던 것 같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게 상황을 해결할 실마리일 것이다. 소녀의 노래는 구슬프게 들리기도 하고, 즐겁게 들리기도 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설영과 자하 두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설영은 그 영이 원하는 대로 노랫소리에 빠져들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잘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 땐 그대로 하는 것이 좋았다. 설영은 그런 감이 좋아서 그것들은 결과적으로 설영에게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소녀의 기억이 그 노래를 타고 설영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가 죽은 소녀는 엄마랑 단둘이 살고 있었다. 소녀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엄마는 소녀와 소녀의 노래를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꿈을 꿨다. 숲속에 혼자 놀러 갔던 소녀가 노래를 부르다 죽는 꿈이었다. 엄마는 그날부로 소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무서워했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녀는 슬펐지만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엄마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소녀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다 엄마의 생일을 맞아 엄마에게 줄 꽃을 따러 산을 올라 숲으로 온 소녀는 노래를 부르다 발을 헛디뎌서 죽고 말았다.

소녀는 엄마를 걱정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약한 영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은 무녀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소녀의 영은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그저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소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그 노랫소리는 무녀에 의해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며칠 전, 무녀가 사라지게 되자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노력 끝에 드디어 소녀는 자신의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설영이었다. 소녀는 자신의 노래에 마음을 담았다. 그건 고스란히 설영에게 전해져왔다. 슬픔, 사랑, 미안함, 감사함 등의 감정이 흘러 들어왔다. 꼭 전해줄게. 설영이 말했다. 설영에게 화답하듯 소녀의 노랫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바람에 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실로 돌아왔다.

설영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소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기록한 후, 설영은 가만히 손을 모으고 소녀의 제사를 치러주었다. 

“왕생하시기를.”

자하도 설영의 옆에서 손을 모았다. 설영은 자하를 쳐다보았다. 자하는 작게 웃었다.

“이런 점은 변한 게 없네. 듣고 잘 달래서 보내주면 된다고 했었지. 어린애가 그것만큼은 똑 부러졌었어. 그래서 널 좋아했던 건지도 모르겠네. 이제 볼 일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저를 좋아하셨다고요?”

설영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래. 좋으니까 부제까지 삼아서 옆에 데려다 둔 거였지. 너랑 뭘 해보려고 했다든가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

“⋯그냥 네가 겉보기완 달리 따뜻한 사람인 게 좋았고 같이 있으면 재밌었던 것뿐이니까.”

설영은 자하를 보았다. 그런 말을 한 주제에 마음은 편해보였다. 그것도 자하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영은 자하에게 돌려줄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대신 자하가 입 밖으로 내어놓은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노래가 좋긴 했죠?”

“갑자기 무슨 말이야? 너를 몇 년이나 봐왔지만 정말 새롭네. 매번.”

“아, 감상에 젖으신 것 같아서요 저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고⋯.”

설영은 처음 화랑도에 들어왔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감상에 젖은 거구나. 내가. 내가 감상에 젖어서 너한테 지금⋯”

“그것보다 할 말이 있습니다. 꼭 지금 해야만 하는 말이에요.”

자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하의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니었기 때문에 설영은 그냥 말했다.

“국선하고 처음 만났을 때 말입니다. 저를 엄청나게 때리셨었죠.”

“막으려고 했던 거지. 막으려고.”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국선 덕분에 갚을 빚이 줄어들었다고 몇 번씩이나 말씀하셨으니까요. 국선 아니었으면 집이 날아갔을 거라고요. 그때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설영랑도 감상에 젖은 모양이지?”

설영은 자하의 말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돌아온 다음에 스승님과 부모님께선 엄청나게 걱정하셨습니다. 주술에 반감이 있으셨다기보단 주변 시선을 걱정하셨거든요. 보상을 다 했다고는 하지만 귀마왕이었을 때 주술을 써서 화랑도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 건 사실이니까요. 주술을 쓰는 사람은 모두 끝이 좋지 않다는 말도 무시하긴 어려웠을 거고요. 그래서 스승님과 부모님은 저와의 상의 끝에 저의 주술을 봉인하기로 하셨어요. 그게 화랑도 조직 내부에서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 좋았고, 형님들도 좋았으니까 주술은 앞으로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어도 소중한 게 많이 생겼으니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국선이 그때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자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른 표정으로 그저 설영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시끄럽다고 하셨습니다. 할 일들이 없으니 모여서 쓸데없는 얘기나 하고 있다고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국선이라지만 우리 형님들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한참 어른인 스승님한테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죠. 국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를 때이긴 했지만⋯ 어쨌든 국선은 그런 쓸데없는 얘기 할 시간 있으면 가서 할 일이나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 인생의 중대사가 국선 한마디에 쓸데없는 얘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주술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고요. 그 후로 국선이 월계 선배들, 온이 선배도 소개해 주시고 주술과 관련된 책도 이것저것 구해다 주셨었죠. 조금 크고 나서 스승님께 들었습니다. 국선이 뒤에서 설득하느라 고생하셨다고요. 책임도 다 국선이 지기로 했다면서요. 그러니까 국선한테 잘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었는데⋯국선 앞에만 서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건 전부 국선 탓이에요.”

“지금 감사 인사 하던 거 아니었어? 그냥 평소의 설영랑이잖아?”

설영은 자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자하는 놀란 눈치였다. 설영은 자하를 놀라게 했다는 데에 뿌듯함을 느꼈다.

“주술을 계속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술을 쓰지 못했으면 지금처럼 행복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건 제 일부분이기도 하니까요.”

“⋯아깝잖아. 잘 쓰면 분명 도움이 될 텐데. 주술을 쓰는 사람은 끝이 나빴니 어쨌니 재미없는 얘기만 잔뜩 하고 있는 것도 싫었고. 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게 좋다는 주의거든. 그리고 설영랑도 기억해서 알겠지만, 다른 세계의 설영랑도 주술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으니까. 내 덕분은 아니지.”

자하는 평소답지 않게 웬일로 한 발짝 뒤로 빠졌다. 제법 어른 같았다.

“나는 그냥 사소한 계기야. 네가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까. 계속 쓸 수 있었던 거야. 어떤 세계에서든. 네 마음이 중요한 거지.”

내 마음이 중요하다⋯

“이제 그만 일어나.”

자하가 설영의 손을 잡아당겼다. 설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하는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그 정도였었나? 설영은 어쩐지 조금 반성하게 되었다.

“진짜 적응 안 되네.”

“저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의외로요.”

“그래. 그래. 헤어질 때 되니까 솔직해지는구나, 설영랑도.”

자하는 손을 뻗어 설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췄다. 아까 자기가 했던 말을 의식하는 걸까? 좋아한다고 했었지. 설영은 그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떠나시는 데엔 다른 세계의 저희를 만난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없다고 할 순 없겠지. 하지만 원래 관직 같은 데 나갈 생각은 없었어.”

“그동안 국선한테 줄 댔던 사람들만 불쌍하게 됐네요.”

“누가 그러랬나. 줄을 잘못 선거지. 혹시 설영랑도 그쪽?”

“아니요. 저는⋯”

설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영은 관직에 나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연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설영은 그저 자하의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자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냥 좋지?”

“뭐가요?”

“백호영도로 돌아가게 된 거.”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뭐?”

“저는 백호영도로 돌아가지 않아요.”

순간 자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설영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오늘 설영은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자하의 여러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이유가 모두 자신 때문이라니.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설영은 자하를 쳐다보았다. 자하는 생각 중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지난 끝에 입을 열었다.

“뭐⋯ 설영랑이 남아서 국선이 된다고 하면, 좀 걱정은 되지만⋯ 내 알 바는 아닌가? 설영랑이 국선이라⋯ 설영랑이⋯”

“예? 제가 국선을 왜 합니까? 부제가 된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국선을 하라고요? 나는 알 바 아니라고요? 저는 화랑도 국선 같은 거 절대 못 합니다. 아니 안 해요.”

“응. 그러니까 돌아가라고 했잖아. 내가 설영랑을 못 믿는 게 아니고 설영랑을 위해서지. 이게 다 설영랑을 위해서⋯”

거짓말. 설영은 눈을 치켜떴다.

“자기 맘대로 오라고 했다가 가라고 했다가.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제 마음 아닙니까? 아까 제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런데 국선이 되는 것도 싫다, 돌아가는 것도 싫다, 그럼 뭘 하겠다는 거지?”

“저도 그만둘 겁니다.”

“뭐? 진짜 미쳤지?”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다 보니까요.”

설영은 자하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이어서 말했다.

“아까 일을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아까 직접 경험하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있는 편이 도움 될 겁니다. 여러모로요. 국선이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 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저도 관계된 일인 건 확실하고요.”

자하는 머리를 짚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진 알겠어. 확실히 네가 있으면 도움 되겠지. 그건 부정 못 해. 그런데 네가 왜? 오늘 여기에 오기 전까지 넌 화랑도를 떠날 생각 같은 거 해본 적 없잖아.” 

“확실히 그랬습니다. 국선은 원래 관직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고 하셨죠. 그럼 저는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화랑도를 떠날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계속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 또한 해본 적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국선께서 백호영도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거짓 내기에 속아 억지로 들어온 날부터 매일매일 나가고 싶단 생각만 잔뜩 했는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생각했어요. 왜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해서요. 오늘 국선의 뒤를 몰래 밟은 것도 그걸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몰래?”

“사소한 건 넘어가세요.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진짜 이상하지만, 저는 아직 국선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고 싶다, 라기보단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니 후련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있는 게 국선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으니 다른 선택을 할 이유는 없죠.”

“설영랑.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있어?”

“무슨⋯”

“너랑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그래서 화랑도를 그만두고 나를 따라오겠다고?”

“따라가기보단 같이 가는 거죠.”

하. 할 말을 잃은 자하는 설영을 보았다. 반박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 이번엔 내가 이겼다고, 설영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영의 생각과 다르게 자하는 설영이 화랑도를 그만두면 안 되는 이유를 당장 백여 개는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설영이 선택한 것을 막고 싶지 않았다. 자하는 주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설영을 좋아했기 때문에. 또 버릇없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한참 윗사람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후배와 앞으로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버렸으니까. 

어쨌든 결론은 같았다. 자하의 완벽한 패배였다.

“나는 너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는 국선을 언제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합니까?”

“후회해도 책임 안 져.”

“국선 본인이나 후회하지 마시죠.”

설영은 자하의 옆에 섰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같이 걷는 두 사람의 뒤로 그날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미행 마침.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는 아래 링크에서!

https://twitter.com/apr8jan16/status/1683101531632205824?t=ntgxSvwkoxN0Zh-EyVJM1Q&s=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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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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