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미무죄
설영자하 - 현대 AU , 대학생.
“선배는 왜 그렇게 생겼어요?”
“이건 또 무슨 시비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는 말에 설영은 가만히 눈썹을 모았다. 왜 이런 반응이지. 방금 전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지만 날선 대답이 돌아올 만큼 못할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쪽의 문제로군. 설영은 담담히 결론을 내린 후 숨을 내쉬었다. 성격이 꼬인 사람은 본디 좋은 말을 해줘도 꼬아서 듣는 법이다. 보다 인내심이 깊고 상식적인 쪽이 노력을 해줄 수 밖에.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설영은 자비로운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었고 오늘은 기분이 제법 좋았다. 한 번, 아니 두 번쯤은 내가 이해해야지. 그런 마음을 가볍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시비라뇨,”
그러나 마음 먹은 것과 별개로 내뱉은 음성에서는 억울함이 흠씬 묻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놀란 설영이 멈칫 입술을 닫은 차,
“왜 그렇게 생겨먹었냐는 게 시비가 아니면 뭐야?”
잽싸게 말꼬리를 잡은 남자가 몸을 기울여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가 한 팔을 얹은 의자 손잡이가 작게 끼익, 울었다.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움직임과 함께 어깨 위에서부터 미끄러지며 아래로 찰랑였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요. 그렇게 볼멘 소리를 하려던 설영의 눈이 그 미미한 움직임에 붙박였다. 시선이 고정됨에 따라 자연히 닫힌 입술 안쪽에서 무심결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제 마주하던 노트북으로부터 설영을 향해 완전히 얼굴을 돌린 그, 설영의 선배. 사실 선배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멀고도 어쩌면 사이는 가까운. 남자, 자하가 이죽거렸다.
“뭐, 이해는 해. 웬 복학생이 갑자기 같은 수업에 껴들어서는 고학번이랍시고 이것저것 시켜대고, 동기나 선배들은 욕하기는 커녕 칭송하고 따르기 바쁘니 아니꼬웠겠지. 그런데 내가 그만큼 완벽한 걸 어쩌겠어? 성격 좋아, 발 넓어, 박학다식해. 그 뿐이야? 교수님도 예뻐라 하시고 자료 제작에 프레젠테이션까지 못하는 게 없으니 그나마 시비를 좀 걸어볼 만 하겠다, 싶은 구석이…….”
그쯤에서 자하는 고개를 까딱, 어깨를 으쓱. 시선을 하늘 위로 잠깐 던졌다가는 다시 설영에게로 돌렸다. 석양 아래의 구름 같은 눈동자가 기분 탓인지 순간,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었던 거지. 마침 자기 얼굴도 꽤 예쁘장했겠다. 나 정도면 딴지 걸 자격이 있지, 하고. 아냐?”
“아닙니다.”
“그냥 인정해, 설영. 모든 걸 내려놓고 편해져라. 너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뭔지 알아?”
“알아요. 근데, 아니에요.”
자하가 거듭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리 해라.’ 그런 기색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니었다. 아까는 치기에 튀어나온 억울함이었다지만 지금은 진짜 억울했다. 설영은 정말로 그저, 저 남자가 대체 왜 저렇게…. 저렇게 생겼는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자하는 설영의 진심어린 고해든 변명이든 간에 그것에 그다지 관심은 없는 모양이었다. 말을 잇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 켠에 있는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한 권, 두 권, 세 권이나 뽑아온 것을 보면 말이다. 도합 세 번의 쿵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자리 잡는 그들을 보자 설영의 입 안에서 억울함이 싹 가셨다. 설영이 침침하게 물었다.
“그냥 다른 거 물어보겠습니다. 집에 왜 이렇게 책이 많아요?”
“왜긴, 이런 거 환장하는 집안이니까 그렇지.”
환장한다는 것치고 책을 보는 자하의 눈길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설영처럼 침침한 투로 말하는 대신 불길하게 안광을 번뜩였다. 사람 눈이 저렇게 번쩍거리기도 하나. 기분 탓이 아니었네. 둥실 떠오르려고 하는 설영의 사고를 자하가 묵직한 목소리로 가라앉혔다.
“우리 후배님이 궁금한 게 참 많은가봐. 온갖 것에 다 관심을 가지니 보기가 좋아. 그럼 이것도 좋아할 것 같은데, 같이 좀 요약해줄래? 요약 부분 페이지는 너무 길어지면 안되는 거 알지? 주제랑 상관 없는 문장 담지 말고, 정보값 안 되는 문장도 넣지 말고.”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친절하게 강조한 자하는 다시금 설영의 맞은편 의자로 돌아가 자리를 잡았다. 더 이상의 사설은 듣지 않겠다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두 사람이 이곳, 자하의 집에 모인 것은 과제를 해치우기 위함이었으니 그에 대해서는 설영도 불만은 없었다. 없었는데…….
하아.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기란 불가항력이었다. 그를 두 번 이해해주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이해는 무슨, 상식인이 또라이를 홀로 당해내려면 보통 정신머리로는 가당치 않다는 것만 체감했다. 어쨌든 오늘도 해가 떠 있을 때 귀가하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설영이 현실을 천천히 수긍하고 고개를 책에 처박는 것과 동시에,
푸흡.
하고. 어디선가 숨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설영이 곧장 고개를 들었으나 보이는 것은 매끄러운 은색의 노트북 덮개와 화면에 채 가려지지 않는 검은 머리통 뿐이었다. 그조차도 웃은 적은 없다는 듯 미동조차 않고 그저 고요했다.
설영은 자못 집요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까만 글자가 늘어선 페이지로 의식을 되돌렸다. 저것 봐라. 후배한테 일 떠밀어놓고 신나서 웃는다. 머릿속에 그런 사실이 자근자근 새겨지는 한편, 묘하게 김이 새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화가 안 났다. 화가 나는 게 맞는데, 여태까지는 쭉 그래왔는데. 이상하게 요즘 들어서는…….
자하가 저 이상한 선배가, 저 남자가 웃는 걸 보거나 웃었다고 생각하면. 길게 빠진 눈꼬리가 접히면서 속눈썹이 흔들리고, 때때로 빛을 내듯 형형한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새카만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리는 것을 목도하면, 속에 뜨끈하게 훈김이 차오르다가도 금세 흩어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선배 때문에 정말 이상하게도.
그래서 설영은 알고 싶었다. 왜 자하는 저렇게 생겨서 사람을 답지 않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건지. 설영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귀책사유가 있는 건 상대방임에 자명했고—그 귀책사유로 그의 생김새 외에는 짚이는 게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그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아닌 듯 했지만 다행스레 설영은 사고의 전환이 빠른 사람이었다.
우선 과제부터 하고 다음에 물어보자. 설영은 이미 누군가가 여러 번 읽은 듯 종잇장이 닳은 데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까지 그인 페이지를 읽어내려가며 생각했다. 잊지 말고 꼭 물어봐야지. 말 돌리지 못하게 잘 정돈된 문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지자.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설영은 목적 의식이 뚜렷하고 심지 굳은 사람이기도 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그 다음 날도 있고…….
당연스레 오늘 이후의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설영은 자신이 그 시간에 자하가 있을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있음을, 아직 자각하기 전이다.
탐미무죄耽美無罪
부제―아름다운 것에 이끌리는 게 뭐가 나빠.
2024.04.19
댓글 1
흥미로운 개미핥기
이 글에 댓글을 달고 싶어서 글리프에 가입했습니다.... 이거 빠졌네 완전 빠졌네가 이렇게 문장 하나하나 단위로 느껴지는 글 너무 귀여워요.... 제대로 자각은 없는 와중에도 아무튼 얼굴에 홀렸단 것만은 확신하는 설영이도 눈치채고 저러는 건지 아닌건지 모호하게 구는 자하도 귀여워요 당 떨어지는 날에는 이 글을 잡아먹으면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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