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Farewell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 / 매장, 2천 자

미지의 신사, H 씨는 그가 스스로 긴 잠에 들어야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너무 놀라거나 슬퍼 마시길. 그는 영영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곧잘 불러 소용하던 이에게 그가 더는 필요치 않게 되었을 뿐이므로. 그는 이제야 밀린 휴식을 취하러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곳을 누비며 바삐 지내왔는지. 한동안 쉬러 갈 채비를 마치며 그는 조금도 슬프거나 비참하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소년은 이제 다 자랐고 혼자서도 제 몫을 다할 줄 안다. 하긴 그 앤 언제고 마냥 어렸던 적은 없었다. 언제쯤 다시 쓰게 될지 모르는 실크햇의 챙을 만지작거리다 끝내 내려놓으며, 미지의 신사‘였던’ H 씨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는다. 이제 헨리는 그를 불러내지 않고도 마음껏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벽난로에 처박혔던 원고를 몰래 꺼내들고 가던 그때부터 이 사실을 예견했다. 그가 헨리에게 주었던 것은 단지 한 번의 기회에 불과했다. 엎질러진 거짓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돋아날 자유의 날개를 만끽하게 하기 위한. 헨리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아주 훌륭하게 끝냈다. 그 애가 구해낸 이야기들은 두 번 다시 빛바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헨리는 저기, 자신만을 위한 자리에서 뒤편을 건너다보는 일 없이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비록 군데군데 칠이 떨어져나가고 흠집이 패인 낡은 책상이지만, 그런 것쯤은 헨리의 글쓰기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 그 애는 어쩌면 그런 흔적들에서마저도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냈을지 모른다.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알아보고 사랑하는 능력이 너를 괴롭게 했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을 네가 돌려받을 차례란다. 그러니 H 씨는 이만 그 찬란한 사유의 장막 너머로 잠시 몸을 숨기기로 한다.

그는 이제껏 윌리엄들에게 희망이었고, 도움의 손길이었으며, 몇 번은 의미심장한 암시였던 동시에 결국 헨리가 사무엘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했다. 그러니 H 씨의 이름 출처는 헨리의 머리글자로 돌아가게 됨이 마땅할 것이다. 기실 스스로 존재하는 그는 어떤 비유의 총체였다. 허구를 양분 삼는 존재이자 허구 그 자체인 인물.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환상은 거짓과 다른 것이지만, 이야기책이 덮이는 순간에는 그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한순간 무용해지는 허깨비에 불과하므로. H 씨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이야기의 한 장이 매듭지어지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문득 쓸쓸한 기분이 들곤 했다. 마침내 무대에서 퇴장할 준비를 끝마쳐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짙푸른 벨벳 프록코트를 벗어 걸어두고, 페이즐리 무늬가 새겨진 넥타이를 끌러내며 H 씨는 내심 미련 섞인 눈길로 헨리의 등을 바라보게 된다. 그 애와 함께한 모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헨리를 도왔는지, 또 헨리가 얼마나 훌륭하게 그 모든 일들을 해냈는지에 대해 늘어놓자면 사흘 밤낮을 지새울 수도 있을 정도로. 아, 적당한 겸양은 신사의 미덕이건만. 아무튼간 이렇게 되었으니 그가 잠시 휴가를 떠난다고 해서 타박할 사람은 누구도 없을 터였다. H 씨가 향하는 곳은 무덤이 아니다. 그곳은 별빛 찬란한 동산이요, 아름다운 파랑으로 어지러운 바닷가일 것이었다. 헨리는 이제 그와 직접 대화하지 않고도 그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며 나눌 수 있었다. 헨리는 삶을 위해 이미 충분한 믿음을 얻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삶에 지친 사람이 그를 잃었듯, 삶을 다 배운 사람이 그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다. 모처럼의 단잠이 불편하지 않도록, H 씨는 마지막으로 베스트의 단추를 하나 풀어 두었다. 헨리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애가 몹시 절망했을 때이거나…… 혹은 명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 그뿐이리라. H 씨는 재회의 날이 가급적 늦게 찾아오기를 빌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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