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해언
더없이 화려한 장례식이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백색의 조화를 사이에 두고,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파도치듯 밀려들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인산인해였다. 문간에 붙박여 있는 동안 낯익은 얼굴들이 간간이 곁을 스쳐 갔지만 모리타는 구태여 아는 체하지 않았다. 시야가 온통 극명한 흑백의 물결로 가득했다. 구석에서 서성대기를 얼마쯤 했을까, 기어코 까치발을
무엇이든 결과로 증명해 보이겠다던 사람은 이제 없다. 여기저기 찢기고 불탄 제복만이 그가 남긴 결과다. 중요한 건 절차가 아니라거나, 기억되는 것은 최후의 승자뿐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들을 토오루는 이제 와서야 절감할 수 있다. 이것 봐요,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당신 노력을 나 아닌 누가 알아 주겠어요. 자기가 한 말도 못 지키는 바보 같으니라고. 창백하게
불필요한 가정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애머디가 새롭게 정립한 가장 첫 번째 수칙이었다. 정확히는, 지금껏 사용해 온 ‘불가능’의 범주를 약간 조정하는 것이다. 상실 이후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에 관해서라면, 이제 와 어떤 대처도 무용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에는 아무런 효용
노랗고 흰 조화로 빠듯하게 꾸며진 식장은 순식간에 인산인해가 되었다. 너의 이름을 아는 모두가 너를 배웅하기 위해 걸음했다. 셀 수도 없는 지폐가 너를 위해 불에 태워졌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는 너무 빨리 잊혀졌다. 그것은 너를 위해 치러졌던 마지막 예식의 규모와 무관하다. 아니, 어쩌면 둘은 모종의 비례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의
아가씨가 죽었다. 아니,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인가. 어쨌건 아이딘 페트로프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주검은 장례를 위해 모스크바로 옮겨질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이토록 추운 겨울에 죽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아가씨, 결국 당신이 해결한 일은 하나도 없군요. 세상 모든 일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듯이, 그렇
전쟁이 끝났지만 죽음은 어디든지 널려 있었다. 오래 굶주린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마른 땅에 쓰러졌다. 약탈을 일삼던 버릇을 고치지 못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누군가는 제 턱밑에 총구를 들이댔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문고리에 목을 맸다.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딘 사람이나 강에 투신한 사람 혹은 열차에 들이받힌 사람도 있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명계의 문턱 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혜은의 아쉬움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형편없을 정도로 평범한 보통의 인간 하나가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극보다도 우선된다. 그녀는 삶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것도 아니요, 숨이 붙은 존재라면 누구든 마땅히 끝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녀가 중요히 여기는 일이라면 언제나 명렬에 관한
미지의 신사, H 씨는 그가 스스로 긴 잠에 들어야 할 때가 가까워 왔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너무 놀라거나 슬퍼 마시길. 그는 영영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곧잘 불러 소용하던 이에게 그가 더는 필요치 않게 되었을 뿐이므로. 그는 이제야 밀린 휴식을 취하러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곳을 누비며 바삐 지내왔는지. 한동안
우리가 함께 꾸던 꿈을 이어서 사랑해 주길 바라며 마음 깊이에 빛나는 별 A 안녕, 나야. A. 지금 잘 찍히고 있는 거 맞나? 편지 자주 쓰긴 하지만 영상으로는 처음이라 좀 어색하네. 그래서 내가 갑자기 왜 이러고 있냐면, 음. 이거 유서야. 당연히 심각한 거 아니고, 특별히 무슨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얼마 전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당분간 공백기라 쉬고 있어요. 그래도 산책 자주 나가려고 노력하고, 밥도 세 끼 꼬박 챙겨 먹고. 기분은 어때요?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모레가 A 일주기예요. 무언가 열심히 타이핑하던 상담사의 손이 공중에 멈춘다. 조붓한 상담실 안에 적막이 내린다. 늦은 오후, 작은 들창을 타넘고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새하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