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Session

1차 / 장례, 1만 자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당분간 공백기라 쉬고 있어요. 그래도 산책 자주 나가려고 노력하고, 밥도 세 끼 꼬박 챙겨 먹고.

 

기분은 어때요?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모레가 A 일주기예요.

 

무언가 열심히 타이핑하던 상담사의 손이 공중에 멈춘다. 조붓한 상담실 안에 적막이 내린다. 늦은 오후, 작은 들창을 타넘고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새하얀 벽 한가운데에 노릇한 빛을 묻힌다. 일 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B는 답답한 숨을 억지로 삼킨다. 상담사의 얼굴 위 미세하게 변화하는 표정들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저건 아마도 걱정 내지 연민, 그리고 처방약의 증량을 고민하듯 키보드 위에서 멈칫대며 맴도는 손가락. 어느 쪽이든 피로하기는 매한가지다. 약속한 게 있으니 그렇다고 영 발길을 끊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B는 천천히 말을 고른다. 무슨 이야길 해야 제법 괜찮게 지내는 것처럼 보일지 짐작이 잘 안 됐다. 그래도 지금껏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가는데 도무지 그걸 체감할 수가 없다. 뭔갈 잃어버린 기분이에요, 이 말은 너무 많이 했고. A가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이랬다간 미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하다. 연차도 얼마 채우지 못한 마당에 활동을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다.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그래서 광역으로 민폐 끼치는 일도 좀 그만두고 A가 시킨 대로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웠다면 이렇게 여기 앉아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B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결국 한숨이 입술 밖으로 흐른다. 어떤 말도 차마 뱉어 놓지 못하는 동안 다시 콧등이 시큰거리기 시작한다. 이런 곳에서 꼴사납게 우는 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신중한 눈길로 B를 살피던 상담사는 몇 차례 키보드를 더 두들긴다. 문득 B는 차트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지금 제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눈에 보이는 수치로 알 수 있다면 좀 후련한 기분이 들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건 구태여 묻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니까.

A가 죽고 일 년 가까이 지났다. 그간 상담을 이어 오며 B는 스스로에게 가능한 이야기는 이미 다 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무작정 울기만 했고, 겨우 무슨 말이라도 꺼내 놓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부터는 갈 곳 잃은 원망만 한가득 쏟아냈다. 그날 밴에 홀로 타고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왜 너 혼자서만 죽어버렸을까. 다른 멤버들이며 무엇보다 매니저 역시도 크게 다쳤지만 너 말고는 죽은 사람이 없잖아. 개 같은 음주 운전자는 징역 몇 년을 받았지만 그 또한 병원에 오래 누워 지냈을 뿐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 슬퍼하는 팬들의 모습도 내게는 마뜩지 않다. 사람들은 왜 너를 충분히 애도하지 않는지. 마치 누구도 널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 없는 것처럼, 정말로 너를 기억하는 것도 나밖에는 없는 것처럼. 다들 너무 멀쩡해 보여. 너 없이도 잘 살고 있어. 네가 내게 요구한 것도 바로 이런 거겠지만. 다 알면서도 B는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완전히 종결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니 입을 다물 밖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B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디 오지로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그래서 전화도 못 걸고 편지도 보낼 수가 없는 거야. 그러나 A의 도착지는 오로지 죽음, 그뿐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차라리 유명한 관광지에 빗대는 게 나으려나.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결국 그곳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생각을 좀 달리 해 보면 오히려 모든 게 끝나버린 뒤에는 그를 되찾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B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좀 되기도 한다. 나는 언제든 널 따라갈 수 있어. 네가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참아 주는 거야. 하지만 A, 매순간 찾아오는 충동을 언제까지 참아낼 수 있을까. B를 견디게 하던 사랑도 이제는 모래시계 흘러내리듯 빠져나가고 있다. B는 제게도 기막힌 우연이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A를 빼앗아 갔을 때처럼, 이번에는 저를 데려가 줄 딱 한 번의 요행을 기대하는 것이다. 나쁜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멈출 수 없다. 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그저 생각만으로 그친다면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했다. 싫은소리를 늘어놓을 A도 지금은 없으니까.

다단해지는 B의 얼굴 위로 우울한 그늘이 내린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상담사가 천천히 키보드에서 손을 뗀다. 잠시 머뭇대는 손길은 책상에 놓인 티슈를 뽑아 줄까,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상담사는 양손을 모아 스스로 손깍지를 낄 뿐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상담사는 한동안 B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가 뭐라도 말하기를, 어떤 감정이라도 토로하기를. B는 무슨 말이든 좀체 시작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사실은 아무렇게나 지껄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데 그런 척하는 건 아무래도 무의미하다. 그렇게 그들에게 약속된 사십 분이 전부 흘러간다. 시계를 곁눈질하던 상담사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약은, 어때요? 이대로 유지할까요?

 

밤에 자주 깨는 것 말고는 별문제 없어요.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좋아요. 다음에 뵐 때까지 마음 잘 챙기시고요.

 

B는 가벼운 묵례로 답을 대신한다. 마음을 잘 챙기라니, 그런 건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상담실 문을 닫고 돌아서며 B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 이불 속에 틀어박힐 생각뿐이다. 오늘 같은 날이라면 술을 좀 마셔도 될 것 같은데, 고민하다가도 한번 마시면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걸음만 재촉하기로 한다. 담배도 술도 끊은 지 몇 달 되었다. 응급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누워야 했을 정도로 폭음했던 그 날 이후 B는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잠이 안 오면 수면제를 처방받는다. 목이 마르고 답답하면 물병을 들고 산책을 나간다. 분명 더 좋은 쪽으로, 건강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 텐데. B는 날마다 속이 곪는 기분이었다. 이게 다 A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했어도 결국 길들여진 것은 B 자신이었나. 매일 밤낮으로 다정하던 안부 인사며 때마다 건네주던 편지, 틈틈이 속삭이던 고백 모두가 그립다. B는 아직도 꿈결에 A를 본다. 깼어? 더 자. 나직이 웃으며 이마를 쓸어 주는 손길을 당연스레 받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내리감는 새벽,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퍼뜩 깨어나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허전함뿐이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B의 입술 틈으로 희부연 입김이 오른다. 그것은 영혼의 어떤 부분이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모양 같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확인한 휴대폰 화면에는 매니저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다. 급한 일이었다면 메시지를 남겼겠거니, 대수롭잖게 생각한 B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몸을 던진다. 상담을 다녀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A가 보고 싶었다. 납골당엔 도저히 맨정신으로 찾아갈 수 없으니 그가 남겨준 영상이나마 붙잡고 마음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다. 반쯤은 장난삼아 시작했을 그 유서가 진짜가 되어버릴 줄은 잘난 A도 미처 몰랐겠지만. B는 메일함을 열어 이미 수없이 돌려 본 동영상을 또 한 번 재생한다. 카메라 앞에 앉은 A가 어색한 듯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안녕, 손 흔들며 반갑게 인사한다.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면서도 제 할 말은 조목조목 다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눈에 물기가 고인다. 어려운 부탁인 걸 알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네가 떠넘긴 소원 때문에 나는 죽지도 못하고 산다, A. 이것도 어쩌면 너를 탓하는 것밖에는 안 될까. 치미는 울음을 참으며 B는 영상의 마지막 부분을 반복 재생한다. 영원히 함께 있어 달라면서. 네 온 마음을 내게 주겠다면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 놓고선 나만 이렇게 살도록 두는 거, 불공평하지 않냐.

생각해 보면 진작에 중독이었는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은 뭐든 주겠다는 사랑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끝도 없이 목말라하는 저를 충분히 적셔 주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 A였다는 것을 B도 알고 있었다. 그가 미련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그에게 미안하다고 느꼈던 적도 셀 수 없지만 결국 B는 A가 필요했다. 실은 그가 더 많은 것을 주었으면 했다. 사람은 무엇에든지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욕심도 그만큼 한계를 모르게 되는 것이니까. 넘쳐 흘러 버려도 좋으니 내게 끝도 없이 부어 줬으면 하고 바랐지. 하지만 숱한 투정에도 불구하고, A에게서 받았던 그 무엇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것만큼은 확언할 수 있었다.

어느새 까맣게 멈춰버린 화면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비친다. B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여전히 어색해 보이는 웃음과 함께 A가 안녕, 인사하며 말문을 연다. 그 나직한 목소리를 듣는 데에 온 정신을 쏟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까무룩 눈이 감긴다. 힘겹게 들썩이던 B의 호흡이 차츰 편안하게 가라앉는다.

 

*

 

B.

 

……B?

 

B는 숨을 거칠게 들이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내내 덮고 있던 묵직한 겨울 이불이 어깨에서 둔하게 떨어져내린다.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 있던 A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린다. 씨근대는 B의 눈가에 물기가 고여 있다. 자는데 너무 불편해 보여서 깨웠어. 무슨 꿈을 그렇게 격하게 꿔. A가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고 B의 낯을 살핀다. 얼핏 화가 난 듯도 보이는 그 얼굴이 한껏 창백해졌다가 순식간에 붉어진다. 너 울어? 왜 그래. B는 A가 저를 끌어안도록 내버려 둔다. 눈을 뜨는 첫 순간부터 이것들 전부가 질 나쁜 장난에 지나지 않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부러 일찍 깨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기억하던 A의 품은 분명 포근하고 따뜻했는데,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괴로운 마음이 빚어낸 신기루이기 때문일까. 지금 B는 그에게서 어떤 온기도 느낄 수가 없다. 못내 사무치는 가슴이 칼로 에는 듯 아프다. 이를 악문 채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B를 바짝 껴안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A가 천천히 등을 토닥여 오기 시작한다. 온도감 없으나 부드러운 손길이 B를 가까스로 위로해 준다. B는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어 말한다. A, 나쁜 새끼야.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으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B에게 응답한다. 내가 또 뭘 잘못했어?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B는 울컥, 화가 치밀어오른다. 너는 잘못한 거 없어. 쏘아붙이는 B를 향해 A는 난감한 듯 웃어버릴 뿐이다. 그리고 B를 안은 팔에 힘을 더한다. 그가 고개를 들 수 없도록. 그리하여 불안한 제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못하게.

B는 한동안 말이 없다. 아까 떨어뜨린 겨울 이불 같은 A의 품에서 B는 이대로 영영 머물고만 싶다. 잘난 A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그런 욕심을 부렸다가는 한순간에 꿈에서 내쫓길까 봐. B는 함부로 자세를 고치지도 못하고 얌전히 안겨 있다. A은 그런 B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서로를 부둥켜 안은 팔은 좀처럼 떨어져나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얼마간 침묵을 지킨 것은 A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붉은기 도는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은 B가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다. A의 어깨에 기댄 채 젖은 눈꺼풀을 느릿느릿 깜박이던 B가 한참 늦게 입을 뗀다.

 

A.

 

응?

 

내가 뭘 잘못했냐.

 

그게 무슨 소리야, B.

 

나 지금 벌 받는 거지?

 

지금껏 저지른 잘못을 꼽으라면 셀 수도 없겠지. B의 잇새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이 기어나온다. 그래도 나, 그렇게까지 엉망으로 살았던 건 아니잖아. 왜 하필 너까지 빼앗겨야 했을까.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그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몰라. 더 흘릴 눈물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왜 끝도 없이 약해지는 것 같은지. 눈을 꾹 감고 중얼거리는 B의 등을 조용히 쓸어내리며 말을 고르던 A가 끝내 그가 피하고 싶었던 대답을 돌려 준다. B,

 

내가 부탁했잖아.

 

공기가 역류한다.

간신히 숨을 참고 있던 B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듯 가쁘게 헐떡인다. 꿈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B는 눈을 힘주어 감은 채로 버틴다. 그러나 때맞추어 요란하게 울려 대는 휴대폰 진동음이 그를 현실의 울타리 안으로 마저 몰아낸다. 억지로 떠낸 시야에 살풍경한 방 안이 비친다. 그날 A가 누워 있던 병실처럼 창백한 새벽녘이다.

곁에는 아무도 없다.

B는 반쯤 벗어던진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는다. 그사이 한 번 끊어졌던 전화는 재차 요란한 진동을 울려 대고 있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대체 뭐가 문젠데? B가 휴대폰을 낚아챈다. 매니저의 이름이 화면에서 깜박이고 있다. 수신 거절을 누르면 열 통은 거뜬히 넘도록 쌓인 부재중 알림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이렇게까지 재촉을 하는 걸 보니 악성 기사가 터졌든가 컴백 일정이라도 잡혔나 싶다. 하지만 툭하면 물잔을 깨먹는 정신으로 어떻게 무대에 서고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껏 이뤄 놓은 것들이 한순간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들 발목까지 붙잡고 늘어지기는 싫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B는 캄캄한 이불 속에서 눈을 감는다. 이렇게 편안한 어둠 속에서는 뭐든 잊을 수 있다. A의 죽음만 빼고.

그는 B에게 부탁을 했다고 말했다.

같지도 않은 유언 영상을 수천 번 돌려 보고 있는 B가었으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래, 그러셨겠지. 하지만 내 마음은 어떻게 하고? 내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이걸 가지고 나 혼자서 뭘 어쩌란 말이냐. 약속 못 지킨 건 너인데 왜, 내가. B는 답답한 숨을 간신히 삼켜낸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 아닐 텐데. 누가 죽어도 금방 잊고 잘만 살던데. 하지만 나까지 포기하면, 그러면 우리 사랑은 누가 기억해 주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밖에는 없잖아. B는 아직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한 번 받아 볼까. 그러니까 또 전화가 오면……

진동이 울린다. B는 고개를 들어 발광하는 액정을 확인한다. 다시 매니저다. 잠시간 그 이름을 바라보던 B가 숨을 고르고 착신 버튼을 누른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던 매니저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받고만 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B다. 여태 괜찮은 척했던 것들이 다 무색하게 푹 잠긴 목소리가 엉망으로 갈라진다.

 

왜요.

 

……너 괜찮니?

 

대체 뭐가 괜찮아야 하는데. 되물을 여유도 없이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이제 내일이면 A의 일주기다. 기사가 몇 개쯤 날 거고, 팬들도, 멤버들도. 다들 슬퍼하겠지. 슬퍼하겠지만 나만큼은 아닐 거잖아. B는 그것이 억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저마다 A를 사랑했던 마음은 전부 다를 테니까. 그래서는 누구도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슬픔을 갖게 되고 마는 거라고. 대답 없는 B를 기다리던 매니저가 다시 말문을 연다. 너 어떻게 지내는지 몰라서 연락했어. 조만간 컴백 일정 잡힐 것 같기도 하고. 몸 상하지 않게 관리 잘 해. ……A도 그러길 바랄 거야.

B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A에 대해 뭘 아느냐고 따져 묻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런 종류의 분노를 참아내는 것으로 고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매니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A가 무엇보다 바라던 것은 남겨진 자신의 안온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B는 말없이 입술을 말아 문다. 한참 정적 끝에 그럴게요, 짧은 대답이 수화기 너머 바스라진다. 매니저는 별다른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고 순순히 전화를 끊었다. 그토록 끈질기게 부재중을 남겼던 것 치고는 싱거운 끝이었다. 걱정이라도 해 주었던 걸까. 지금껏 부린 행패를 생각하면 오히려 욕을 퍼붓는대도 할 말이 없을 텐데.

B는 다시 메일함에 접속한다. 닳도록 돌려 본 동영상을 재생한다. 안녕, A가 웃는다. 그러고 보면 너는 유언이랍시고 떠드는 와중에도 자길 잊어 달라느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느니 하는 헛소리만큼은 하지 않았네. A가 B에게 바란 것은 스스로 포기하지 말라는 하나뿐이었다.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 주겠다는 당부와 함께. 액정 너머 움직이는 A를 멍하니 들여다보던 B는 문득 휴대폰 화면을 꺼 버린다. 영상 속에서 이야기하던 A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B가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난다. 비틀대는 걸음으로 욕실로 향해 찬물에 머리를 담근다.

내일은 너를 보러 가야겠다.

 

*

 

늦은 오후의 볕이 길게 내리쬔다. 겨울은 겨울인지 사방에 낙엽이며 잔가지가 한가득 굴러다니고 있었다. B는 마스크 위로 동여맨 머플러의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한다. 제법 오래 걸어서 그런지 추운 날인데도 몸에서 열이 났다. 납골당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멀고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그간 몇 번 찾아오지 못했으니 정말로 낯선 것이 맞기는 하겠지만. 건물 앞에서 얼마간 망설이던 B는 천천히 문을 밀고 들어간다. 상주 직원의 단정한 미소가 그를 반긴다. 내부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한산하다. B는 몇 층의 계단을 올라 A의 안치실로 향한다. 분명 이 쪽이었다. 왼편 모퉁이를 돌아서 두 번째, 햇살이 잘 들고 널찍한……

A. 굵은 글자로 새겨진 이름 석 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말문이 막힌다.

B는 차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문간에 멈춰 선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 한 번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인 걸 알면서도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한참 심호흡 끝에 B가 겨우 한 발짝을 내딛는다. 깨끗한 유리장 안에 마련된 공간이 B를 반긴다. 순간 눈앞이 핑 도는 듯한 착각이 든다. 새하얀 납골함 곁으로 나란한 액자 안에서 A가 환하게 웃고 있다. 여긴 무대 사진도 있네, 조밀하게 꾸며 놓은 장식들을 찬찬히 뜯어보던 B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다. 널찍하게 뚫린 유리창에서 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따뜻한 빛 속에서 자잘한 먼지가 보석의 편린처럼 반짝이며 느리게 부유한다. 그야말로 완벽히 평화로운 순간이다. B는 괜히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지른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사진 안에 멈춰버린 A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왜 이제야 왔느냐고 말을 붙이는 것 같아서. B는 제자리에 천천히 무너진다. 네가 떠난 지 꼬박 일 년이다, A. 바닥을 짚은 손끝에 따스한 온기가 스민다. 겨울 햇볕을 가득 받고 데워진 대리석이 A를 대신해 손을 잡아주는 것 같다. 숨죽여 입을 틀어막고 웅크려 있던 B가 눈물 맺힌 얼굴로 액자를 올려다본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게 왔지.

 

그리고 B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금방이라도 다시 주저앉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도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악을 쓰고 우겨도 결국은 A가 바라는 대로 해주게 되었던 지난날처럼. B는 이번에도 A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이제 와 깨닫는다. 협박도 애원도 곁에 없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끝나지 않은 사랑을 나는 아직 가지고 있으니, A. 네가 못다 이룬 꿈 역시 내가 품어줄 수밖에. 네가 떠넘긴 소원을 대신 이루어야 한다는 명목 아래서라도 나 계속 살아가는 수밖에…….

온전히 두 발을 딛고 선 B가 A의 사진 앞에서 활짝 웃는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제대로 웃어 보는 건지. 한껏 끌어당긴 입꼬리가 어색하게 경련하고, 그사이 멋대로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후두둑 떨어진다. 마스크가 잔뜩 젖어든다. B는 A를 위해 지금까지 쌓아 둔 말들을 천천히 꺼내 보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은 일견 상담의 절차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이거 봐, 막상 와 보니 괜찮잖아. 사진 속 해사한 A와 눈을 맞추며 B는 처음 그를 잃었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뒤늦게 동영상을 확인했을 때에는 또 얼마나 그가 원망스러웠는지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그를 찾아오지 못하는 동안 필사적으로 괜찮기 위해 해 왔던 노력까지도 빼먹지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 다짐하는 것이다. 우리 함께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제는 미루지 않고 해 보겠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부터는 일기를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B는 따끔거리는 눈가에 찬 손을 얹으며 중얼거린다. A를 다시 만나는 날 편지 대신 건네어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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