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화
1차 / 장례, 2천 자
무엇이든 결과로 증명해 보이겠다던 사람은 이제 없다. 여기저기 찢기고 불탄 제복만이 그가 남긴 결과다. 중요한 건 절차가 아니라거나, 기억되는 것은 최후의 승자뿐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들을 토오루는 이제 와서야 절감할 수 있다. 이것 봐요,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당신 노력을 나 아닌 누가 알아 주겠어요. 자기가 한 말도 못 지키는 바보 같으니라고. 창백하게 질린 손끝이 버석한 옷자락을 간신히 어루만진다. 세이시의 온기는 간데없다. 텅 비었던 식장 안으로 조문객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다. 주위가 조금씩 붐빈다. 끝도 없이 빼곡한 검은 정장들 틈에 있으려면 이유도 없이 구역감이 치밀어오른다. 토오루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운다. 더듬더듬 이어지던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다가, 기어이 복도를 박차고 내달린다. 승강기 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기다릴 여유 같은 건 없다. 몇 번이고 무릎이 꺾인다. 하마터면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것을 겨우 난간을 붙잡아 면했다. 손바닥이 벌겋게 까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토오루는 마침내 일층에 다다른다. 흰 대리석으로 범벅된 로비는 무서울 정도로 광활해 숨이 막힌다. 이곳의 누구도 큰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눈물조차 마음껏 흘릴 수 없었다. 귓가에 흐드러지는 이명. 시야가 크게 출렁인다. 토오루는 무거운 유리문에 온몸을 부딪혀 바깥으로 힘겹게 탈출한다.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한여름의 지독한 열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끔찍하리만치 새파란 하늘에 압도당한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커다란 리무진이 주변을 오가는 소음도, 코 끝에 매달려 아직도 떨어져나가지 않은 향의 냄새도. 너무도 분명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세이시가 없는 세상은. 여전히.
눈물 같은 건 사치야. 머리를 온통 죄는 현기증 속에서, 토오루는 생각한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력감이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바싹 마른 입술이 의식적으로 호흡을 이어 간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죽음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음만은 절대적인 것이다.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만들 거라던 의지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 앞에 스러지고 마는 것이라서. 해결책 없이 조급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토오루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몇몇이 안부를 물으며 달려왔지만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무너지는 건 세이시도 원하지 않을 텐데…… 정처 없이 헤매던 시선이 기어코 눈물로 흐려진다. 그러나 그것이 흘러넘쳐 뺨을 적시는 일은 없었다. 수용량을 초과한 슬픔은 제대로 감각되지도 않는 것이다. 산산이 조각난 채 토오루의 뇌리를 떠돌던 생각의 파편들, 그것 중 하나가 문득 강렬한 빛을 터뜨린다. 이 순간 토오루를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단어뿐이다. 복수. 배후는 뻔하다. 이미 죽은 그를 산 자들의 땅으로 데려올 수 없다면, 그를 죽게 만든 이들을 모조리 저 아래 지옥으로 보내버리겠다고. 사랑하는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남김없이 되돌려주겠노라고. 세상을 불사를 기세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은 토오루의 머리칼은 들불처럼 새빨간 빛깔로 환하다. 시야를 간섭하는 붉은빛이 세이시를 집어삼켰을 그 불길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얼마나 괴로웠을지를 짐작하지 않으려고. 토오루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짓씹힌 살갗에서 피가 배어난다. 쓰고 비린 맛이 혀 끝에 스민다. 그것만이 그녀의 지표가 될 것이다.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토오루가 제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떨쳐낸다. 부축은 필요 없었다. 그녀와 동반하던 유일한 사람은 이미 떠났다. 뒤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도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아직 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다시 넘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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