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렛과 코퍼헤드

20231210, 3442자

매번 생각하지만, 언니 취향은 정말 최악이에요. 요즘 대세는 기계공학이라고요. 집을 치우든 일을 돕든 사람을 쏘든, 이제 모든 일은 로봇에게 맡기는 추세라니까요. 세 살짜리 애도 조그만 모터 장난감 같은 건 직접 조립하는 시대란 말이죠. 그런데 기껏 군용 로봇 회사 회장 부모라는 금수저 중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한다는 게 이게 뭐냐고요. 가뜩이나 돈 나갈 곳 많은 이 나라에서 정원이라뇨? 온 동네를 떠돌아다니면서 언니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 봐요.

기왕 만들 거면 예쁘게나 만들어 놓지, 울타리 색은 이게 뭐예요? 이렇게 칙칙한 터키색 페인트는 파는 데도 찾기 힘들겠어요. 좀 그럴싸한 물뿌리개도 없이 드럼통에 호스 꽂아 쓰는 것도 싫어요. 거기다 여기는 말이 정원이지, 키운다는 식물도 비트나 파나 아무래도 낭만 없는 종자들뿐이잖아요.

...제가 방금 낭만이라고 그랬나요? 이런. 전부 언니 탓이에요. 언니는 '좋은 노래를 들으면 식물이 더 잘 자란다'고 주장하면서 매번 스피커를 트는 사람이니까요. 거기서는 매번 똑같은 노래가 나와서 저는 심술을 부렸죠. 하지만 괜찮은 곡이라고 생각했어요. 언니와 제 결말도 가사 같으면 좋겠다고 공상하느라요.

테이저건은 믿어도 낭만 같은 예쁘장한 말 따위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는데. 전기 충격 맞고도 달려들던 로봇들을 언니가 오토바이로 아주 후련하게 날려 버려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삽시간에 찌그러져 스파크를 튀기던 빌어먹을 그 로봇들, 곡선 졌으면서도 견고하고 구김 없는 오토바이 가드, 황동색으로 번뜩이는 배기관, 물결 같던 타이어 휠, 그리고 언니. 저는 그 순간의 모든 점이 좋았거든요. 헬멧을 벗자 풀어헤쳐지던 파란 머리칼까지.

레비아탄. 그게 언니 이름이랬죠. 저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끼워 주고 언니 거처로 가면서요. 당연히 거짓말일 걸로 알고 가명을 댔는데, 조사를 해 보니 정말이었더군요. 군용 로봇 회사 창립한 업적을 누가 몰라줄까 봐 자식 이름들도 무시무시하게 지어뒀어요. 굳이 케케묵은 옛 기록을 데이터베이스에서 뒤져서 한다는 일이 지옥에서 올라왔다는 해룡 이름을 자식에게 준다는 거라뇨.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언니는 그랬으려나요? 그렇다면 저희는 한 번 정도는 싸웠어야 했겠어요. 뭐... 농담이라 생각해도 좋고.

애초 남 작명 센스 흉볼 때가 아닐지도요. 일단은 제 가명부터가 문제니까요. 스칼렛이라니. 안나나 제인보다도 고리타분해요. 눈동자가 빨갛다고 이름까지 "빨강이" 같은 걸로 붙인 셈이잖아요. 그래서 나도 스칼렛 같이 웃기는 가짜 이름은 치우고 원래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는데요, 결국 그러지는 못했어요. 내가 속인 걸 알면 언니가 조금 실망할 것 같아서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이유든 상관없이 말할 기분이 안 났어요. 이 얄팍한 관계에 금이라도 갔을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싫었고, 처음부터 언니한테 내 본명이나 진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면 화가 났을 테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진짜 이름을 찾을 필요도 없어요. 제 이름을 부르는 건 언니뿐이고, 저는 스칼렛이라고만 불리고, 또 이름은 오로지 타인에게 불리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라면 저는 곧 스칼렛인 거죠. 다른 이름은 필요 없을지도 몰라요. 어차피 난 신분증도 매번 돌아가며 바꿔 쓰는걸.

그러니까 절 찾는 건 좀 어려울 거예요. 그 조그만 텃밭에서 이파리들이나 다듬고 있는 게 나을걸요?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요. 언니한텐 이제 그 멋진 오토바이도 없으니까요. 쭉 해체해 봤는데 위치 추적기 같은 것도 안 달아뒀더라고요. 가족들한테 쫓기고 있다더니 겁이라도 났던 건가. 다음에 오토바이 새로 사면 기초적인 보안 정도는 해 둬요. 험한 세상에. 탁자에 돈을 두고 갈 테니까 그걸 써도 좋아요.

뭐, 언니가 이 세상 험한 걸 몰랐을 리가 없지만요. 그건 오래 관찰하지 않아도 알아요. 매번 그렇게 날을 세우고 사는데 당연하죠. 이 동네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언니는 그냥 저한테 친절했을 뿐이잖아요.

속은 건 안 됐네요. 저도 별로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요.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그냥 언니가 절 사랑했으면 했어요. 오로지 저만 보고, 저만 생각하고, 저만 아꼈으면 했다고요. 제가 언니한테 그러듯이요. 그래서 갈 곳이 없답시고 컨테이너형 거처에 제 자리도 내 달라고 우기고, 정원을 가꾸고 있으면 끝날 때까지 구경하고, 나간다 치면 따라가면서 내내 귀찮게 말 붙이고. 그랬던 거예요.

그런데 언니는 저한테서 정 붙일 만한 식구를 봤을 뿐이잖아요.

같이 밥 먹고, 시간도 보내고, 서로 웃고 떠들고 뭐 그 정도로만 생각한 거 아니냐고요. 저희 관계 말이에요. 그냥 외로움만 채우면 적당했던 거 아니냐는 거죠. 그러니까.

제 자리에 있던 게 꼭 제가 아니었어도 지금처럼 예뻐해 줬을 것 같다고요. 울타리 색을 갖고 따질 때 "그러면 내년 봄에는 네가 고른 페인트로 울타리를 칠하자."라고 말했던 거랑요. 비트랑 파 말고 특별히 좋아하는 식물이 있냐길래, 아무렇게나 둘러대려고 장미라고 했더니, 다음번에 장미꽃씨를 한 줌 가져왔던 거랑요. 그러다가 죄다 흉작이 들었는데도 저한테 미안하다며 웃은 것도요.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 또 제가 거처에 있을 때는 항상 전자레인지에서 나온 간단 식품이 차려져 있거나 김 서린 비닐봉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전 언니가 처음 만난 첫 며칠은 끼니도 대강 챙겨 먹었던 걸 떠올리면서.

제가 조금만 운이 나빴다면 그 자리엔 다른 사람이 있었겠거니 하고 짐작하게 되었다고요. 계속. 처음부터.

저는 언니 외 그 누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어도 지금처럼 사랑할 수는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불공평하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어요. 계속 언니 한 명에게 의존하기도 수지타산이 안 맞고요. 언니도 그런 걸 무서워하잖아요. 맹목적인 애정 같은 거. 이젠 알아요. 어젯밤에 그런 얼굴을 봤으니까요.

오토바이 부품 말인데요, 상태가 꽤 괜찮더라고요. 쓸 만한 것들이 꽤 보이던데요. 요즘 대세가 기계공학이잖아요. 저도 이런 걸 잘하거든요.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요.

이제 모든 일은 로봇한테 맡기는 추세잖아요. 그렇다면 사랑할 만한 무언가도 창조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 녹음본을 라디오 CD에 심어둘지 어쩔지는 못 정했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듣게 될 거예요. 언니의 오토바이를 괜찮은 결과물로 바꿔 놓을 거예요. 메모리의 첫 파일에는 이 녹음본을 넣을 거고요. 그리고 그 로봇은 언젠가는 언니에게 닿게 되겠죠. 왜인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도 우리 둘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 날 원하지 않는 사람한테 매달리는 거, 낭만은 있어도 쿨한 면이 없잖아요. 전 언니랑은 다르게 낭만 같은 건 역시 믿을 개념이 못 된다고 생각해서. 노래 CD도 가져가요. 저 빼고 다른 누구랑 그 노래를 들으면 기분 나쁠 것 같아서요. 정 그리우면...

...

나 같은 애가 첫 키스를 주면 좋아할 법도 한데.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언니 취향은 역시 최악이에요.

-이후 녹음본에는 균일한 잡음이 섞여 있다. 기록이 끊겼다.

-레비아탄 코퍼헤드, 6년이 지난 기록에서 잊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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