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창작: 문장을 삼키는 허구

백광 조각글

wip, 제목 미정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뼈마디가 굵은 손이 액정을 덮었다. 7시 정각. 백광은 느적거리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봄의 서늘한 햇빛이 흰 침구에 드리워져 있었다. 백광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차광 커튼의 줄을 당겨 끝까지 창을 가렸다. 적당히 어두운 공간이 균일하게 방을 채웠다. 밤새 방안을 채운 먼지가 흐린 빛에 희게 일렁였다.

백광은 이불을 구겨진 채 내버려 두고 노트북을 펼쳤다. 부팅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고민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하루의 일과가 고정되어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한 이들이 있다. 철저히 설계된 계획을 효율성에 의거하여 따르는 사람. 백광은 분명히 그러한 부류에 속했다.

인덕션에 물이 든 냄비를 얹어 놓으면, 간단히 세안하고 양치를 할 시간 동안 적절한 온도로 데워졌다. 끝이 살짝 구겨진 믹스커피 상자에서 스틱 하나를 꺼내 뜯었다. 머그컵에 담아 물을 부었다. 기포가 공기에 닿아 터져나가며 치이익 미세한 물방울이 튀었다. 백광은 흰 탁자에 남은 물기를 행주로 닦아내었으나, 그것들이 피부에 닿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 안에 머금은 커피는 익숙한 풍미를 내었다. 탈지분유의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고, 산미 없이 고소한 원두의 맛이 났다. 혓바닥에 달라붙는 미미한 단맛이 익숙했다. 믹스커피 박스 속 스틱이 하나씩 줄어드는 동안, 백광은 미각이 받아들이는 균일한 자극을 일종의 고정된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노트북이 은은한 푸른빛을 발했다. 백광은 다 마시지 않은 잔을 들고 작업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 한 권을 마치고 새 소설을 적고 있었다.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부분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새 소설을 적으려던 중이었다. 화면의 우측 하단에서 알림 팝업이 튀어나왔다. 백광은 그것이 백신 프로그램 광고, 혹은 업데이트 예약 요청일 것이라 여겨 엑스 버튼으로 화살표를 옮기려 하였으나, 실제 내용은 백광의 예상과 달랐다.

'3월 7일, 20시 10분. 방문.'

백광이 팔꿈치를 괴었다. 뒤이어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명백한 비일상.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백광은 꾹 미간을 누르다가, 노트북을 닫았다.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백광 그 자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백광은 활용할 수 있는 걸 활용할 셈이었다. 배경 화면에는 인터넷 바로가기 버튼도 없이, '초고'라는 제목을 단 텍스트 파일만이 존재했다. 백광은 아이콘에 시선을 두다가 노트북을 종료했다. 글을 쓰는 것은 잠깐 뒤로 하기로 마음 먹고.

의자 바퀴를 굴려 일어나는데 팔뚝에 모서리진 물체가 닿았다. 책상 한 쪽에 쌓아놓은 잡지와 책이었다. 차기작을 적을 때 참고할 자료였다. 간만에 들일 손님에게 어질러진 방을 보일 수는 없었다. 더불어 백광은 방문객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필요 이상 노출할 생각이 없었다. 백광은 책 더미를 들어 올렸다. 보기보다 묵직했다.

그것들을 한 번에 꽂을 만큼 넉넉한 공간은 책장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백광은 우선 그것을 침대에 올려놓았다. 맨 위의 책 표지에 붙은 포스트잇이 접착력을 잃고 반쯤 떨어져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형태가 아닌 공간. 공간은 곧 공백. 재료는 형태, 공간은 아무것도 들어차지 않은 빈칸.'

획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마감한, 휘갈긴 손글씨. 손톱으로 접착부를 눌러 붙이려고 하였으나, 이미 먼지를 흡착한 풀칠 부분은 좀체 표지에 고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예 뜯어내고 나니 표지가 드러났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 세계'. 시멘트를 날것의 모습 그대로 드러낸 벽면. 재료를 가리려고 시도하지 않은 건축물. 이어지는 계단.

공백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표지 하단에는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백광의 소설을 출판한 곳이 낸 책이었다. 규모 작은 1인 출판사였지만, 백광은 자신의 친구가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무심코 책을 펼쳐 보았다. 속지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대표의 편지였다.

-작품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선물한다! 여러 분야를 접하는 편이 시야를 넓히는 데 좋으니까. 너도 재밌게 읽을 것 같다. 나는 읽어 봤는데 맘에 들었다. 다 읽으면 후기 주라, 조만간 식사 한번 하자. 건필!

...정도의 당부가 적혀 있다. 백광은 입꼬리를 비틀듯이 올리며 표지를 닫았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 건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백광의 시선이 책장에 닿았다. 그곳에는 그동안 적어온 소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백광은 희미한 경멸을 담아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척 했으나 근본적으로 인물들을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인물들, 강박과 공포. 최악을 택하지 못해 차악을 골라야만 하는, 끝의 끝까지 몰려 있는 인물들. 두려움에 빠져,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자들. 붉은 눈동자에 미미한 경멸이 서렸다. 의미 없는 자기 복제. 백광은 자신의 작품들을 그렇게 불렀다.

어제, 어떤 변덕이 불었던지 모르는 가게에 들어가 테이블을 잡았던 그날, 자신이 목격한 것이 아니었다면. 백광은 아마 다시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허구였고 또한 문장을 삼키는 존재였다.

책장의 빈 자리를 끝까지 채우며, 백광은 그 순간을 회상하려고 노력했다...

빼곡한 글씨, 정돈되지 않은 페이지, 스페이스 키 없이, 흘러가고, 밀려오고, 끝없이... 그러다가 맥없이 사라지고.

백광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머리를 짚었다. 찌르듯 한 두통. 백광은 책꽂이를 짚어 균형을 잡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잊을 텐데. 바람 같은 푸념을 뇌까렸다. 그러나 백광은 아무것도 잊을 수 없었다. '존재'가 그를 만나러 올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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