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XD / 후야(後夜)
C님 커미션 작업물 / 2100자
세상이 평화로운 것은 우리가 고되고 힘들 때 여러 발짝 물러나 있는 신이란 존재의 가호 덕이 아니다. 세상에 별일이 없는 것은 신을 섬기는 마음이든 신을 부정해 버린 마음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 하루하루를 지탱해 나가고 있기 때문인 거다. 멀리 떨어지는 햇살 너머로 어둠이 천천히 내린다. 성야星夜처럼 작은 불빛이 도시에 번진다. 그 불빛이 휘감은 것은 무한한 우주가 아닌데도 별빛 밤하늘 같고 녹색 하나 없는 삭막한 건물인데도 크리스마스 트리같아. 느릿하게 크리스마스가 저문다. 오늘을 안전하게 지켜내는 게 S와 D의 하루치 지탱이었다.
그래도 야근은 좀 너무한데. S가 가방을 챙겨 들고 서를 나섰다. 크리스마스니 뭐니 크게 연연하지 않는 그지만 연인과 함께 내내 일했으면서 제대로 얼굴 마주하지 못한 것이 역시나 마음에 걸린다. 물증이 없으면 소원해지는 관계인가, 아직도. 거리마다 몇 시간 후면 사그라들 크리스마스의 흔적이 만연하다. 눈에 밟혔다면 더 고민할 것 없겠지. 보이는 것 중 쉽게 손에 잡히는 건 동그란 스노우볼이다. 꺼져가는 성탄절 끄트머리에서도 꼭 환상처럼,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멈추지 않는 눈을 내리는 스노우볼. 날씨가 차다. 동그란 유리에만 손바닥 모양으로 온기가 퍼진다.
집안에 들어서면 노란 형광등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온기다. 겨울바람 냄새가 열에 녹아내린다. 미안합니다, 늦어서. 그러한 말을 하며 앞을 바라보는데 저를 맞아주는 애인의 얼굴에 색색의 불빛이 비친다. 큰 건 좀 무리라서···. 식탁 위에 자그마한 미니 트리가 그만큼이나 작은 전구를 두르고 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좀 내려고요. D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내민다. 다소 고전적인 영화표 두 장이다. 입장은 열한 시, 보고 나오면 새벽일 터였다. 시작을 같이 못 했으니 마지막이라도 함께하자는 뭐 그런 의미라 해야 하나. 영 표를 내지 않는 S의 성정을 따져보자니 그 역시 급하게나마 답례를 준비해서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이나 하며 우습게도 S가 들고 있던 스노우볼을 건넨다.
깜박.
단숨에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작은 전구 빛만 더 빛을 발한다. 정전인가? 둘러보자면 창문 너머도 빛 하나 없이 깜깜했다. 좋은 분위기였는데. 그리 생각하는 동안 S의 손에 또 다른 온기가 와닿는다. 그 손길은 스노우볼을 받아들어 얼굴을 가린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가까이 하고 희미한 불빛을 비추니 눈앞에서 하얀 눈이 내린다.
저 불빛에 비춰 보니까 더 예쁜데요. D의 말에 S 얼른 집어들어 눈앞까지 대보니 트리 전구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강아지 모형이 든 조악한 스노우볼이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뉴 이어, 첫 단어만 알아채면 뒷말을 짐작할 수 있는 문구를 한 글자씩 꼼꼼히 발음해낸다. 그 우직한 모습이 너무 단단해서 D 짧게 미소 지었다. 어둠 속이라 이 표정은 누구도 쳐다볼 수 없겠네. 큰 변화 없는 저 얼굴에서도 읽어지는 게 크나큰 믿음이라,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마음껏 웃고 펑펑 울어도 될 것 같다. 이제 보러 갈까요. D가 S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우습게도 연인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영화가 아니었다. 어두운 분위기의, 마니아들만 찾아볼 것 같은 몇십 년 전의 재개봉 영화. 흑백 스크린 너머로, 예수로 자칭하는 흡혈귀가 몇천 년 전 자신의 애인과 똑 닮은 인간을 애모하여 식욕이 아닌 탐욕으로 인간의 뒤를 쫓았다. 흡혈귀와 인간은 운명적인 사랑을 이루지만 정의를 이룩한다는 주인공이 둘을 죽여버리며 터무니없는 엔딩을 맺었다. 딴 영화는 자리가 다 차서···. 연인뿐인 심야의 영화관을 둘이서 걸어 나온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아무래도 과거에 관객 마음을 움직였으니 재개봉된 거겠죠. D가 고개를 주억인다. 마음을 움직인다니. 그 마음은 나에게도 세월을 초월했나? 잠시 생각하던 D가 이내 내뱉는다. 자신이 예수라고 하는 걸 믿다니 그건 멍청하지 않나요. 신이 어딨다고. 흡혈귀가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 흡혈귀는 그 사람의 신이었을 겁니다. S가 몇 걸음 앞서나간다. ···농담이시죠? D의 발걸음이 잠시 멈춘다. 예? 늦었습니다. 빨리 쫓아오세요.
틀어막혔던 것처럼 멎었던 눈이 흐른다. 자정을 훌쩍 넘겼는데. 올해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완전히 글러버렸다. S와 D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까맣던 하늘이 희뿌옇게 흐무러진다. 짓무르지 않은 눈송이가 보송보송히 내려앉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이에 꼭 미래를 기약하면서 코앞밖에 볼 줄을 모른다. 머나먼 과거와 머지않은 미래가 맞물려 무한히 반복하는 일생에서 우리는 사랑할 뿐인데. 전야가 아니라 후야에서 둘은 또 다음 후야를 기약한다. 삶이 끝나더라도 존재할지 모르는 다음 생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D의 시선이 옆을 곁눈질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 여기도록 한다. 어쩌면 그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을지도 모르지만, 도돌이표 안에서 되풀이되는 서사를 벗어나 공허한 저 바깥에서도 우리를 사랑하는 시선에서 나 역시 용기를 내 우리를 사랑해 볼까 한다.
태어남을 축하한다. 우리 존재가 내려와 찰나의 순간에 닿아있는 것을 축복한다. 손에 쥐어지는 자그마한 물질을 유한한 증표로 남기고자 건넨다.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무형의 신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고 당장 만져지는 초라하도록 외로운 생명을 사랑하고자 우리는 선물을 찾아 헤맨다. 촛불을 불어 끈 어둠 속에서 마음을 더듬어 읽고, 잘라서 나눠 먹은 후 그 힘으로 내일을 살아가자. 축하합니다. 크리스마스. 박수는 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마주 잡은 손을 떼어놓을 필요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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