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교/커미션

종건준구 / 무게

C님 커미션 작업물 (8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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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한번 더럽게 좋다. 아, 좋다 좋아! 누구 들으란 듯이 허공에 내지르고 나면 메아리 대신 찝찔한 흙 냄새가 되돌아온다. 죽어야 할 것들이 흙을 파고 기어 올라와 헤집어지는 냄새. 대기에 흩뿌려지는 피 냄새. 역겨운 비린내들을 죄다 덮어버릴 비 냄새. 비, 비가 온다. 김준구가 고개를 쳐들었다. 스멀스멀 먹구름이 끼더니 숨구멍 하나 없도록 회색이 들어찬 하늘에는 올려다보는 맛이 없다. 어디에 눈을 둬도 광활한 잿빛. 그때의 그 눈은 새햐얬는데···.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이 엉겨 붙어 있는 구름은 아무리 솜덩어리라지만 칼날이 가닿기에는 아직 먼 거리겠지. 투둑, 한두 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틀어막혀있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만화의 최종장이니 뭐니 구차한 의미를 붙여보기에 아주 적절한 날씨다. 너나 나나 멋진 씬 딱 찍으라고 하늘이 내려준, 좋은 날.

비 오는 날에는 또 입으로 피워올리는 먹구름이 멋있긴 하지. 어느 쪽이 말했는지 같은 사소한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 날이 침침하게 가라앉은 오후, 눈앞이 뿌예지도록 담배 연기를 뿜어낸 종건이 의자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던 것은 선명하다. 아이 씹, 담배 냄새 퍼진다고! 몸에도 안 좋은 걸 허구한 날 뻑뻑 피우고 있냐. 그러면 종건은 대꾸를 아예 않거나 안 좋으니까 피우지, 같은 꼴초의 어불성설을 늘어놨었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습기에 전해져 오던 두텁게 쌓인 담배 냄새는 하여간 어디서 맡아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니까. 어째 다니는 곳마다 코끝에 감돌던 얇은 층의 매연, 눈 앞을 가리는 그 흐릿한 악취. 우리가 그렇게 뒤 찝찝한 일만 하고 다녔나?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몸에 밴 영 기껍지 못한 냄새를 벅벅 씻어내린 후 샤워 가운만 걸친 채 걸어 나오다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거였다. 종건은 뭐 볼 것이 있는지 빗물이 매섭게 때리는 창문 앞에 서서 밖만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종건의 앞모습을 하얗게 점멸하는 번개만이 비췄다 사라진다. 어두운 방에 잡아먹힌 등이 미동 없이 반문한다. 찝찝하냐? 그리 말하며 뒤 도는 모습에는 다른 것 모두 어둠이고 다만 눈만이 형형해서 징그러웠다고 기억한다. 어우, 무섭게시리···. 탁 소리와 함께 방 불을 밝힌다.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종건이 욕실로 걸어 들어간다. 이후로는 침대로 몸을 던져 넣고 씻고 나온 종건과 비가 그칠 때까지 맞고나 쳤던 시답잖은 날이었는데, 왜 지금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일인데.

이제야 오냐, 김준구. 아, 죄송. 혼자 잘하고 있으시길래 지원 필요 없는 줄 알았지,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얻어터진 얼굴들이 발아래 깔렸다. 종건의 성미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꼴들. 이번은 좀 싸울 만했나 봐? 희번득한 눈자위를 신발 끝으로 콱 누르며 시선을 뗀다. 저 눈깔들이 쳐다보는 건 언제 봐도 징그러웠다. 이러면 협업이라고 하기에도 뭣하지 않냐 물어봤자 돌아올 답은 뻔하다. 결국 나는 뒷처리나 하라 이거지. 아니꼬운 티 내며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종건은 너에게 맡긴다는 듯 내내 눈을 감은 채였다. 먼저 결판을 내고 그 후에 협업이라. 뼛속을 파고들던 한기가 아직도 갈비뼈 안에 남아있는 듯해 슬쩍 어루만져 본다. 되레 뜨거운 열기가 살아있음이 또렷해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제법 재밌는 듀오였다. 잘만 어울렸으면서 툭하면 있는 척하는 게 좀 꼴사나웠다 뿐이지. 아 됐고, 끝나고 밥 뭐 먹을지나 생각하자니까? 쿡 찌르니 덤덤하게 초밥,  것까지 보면 참 알 것 같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너는 진짜, 나니까 놀아주지. 그 말에 박종건은 코웃음으로 넘겼고 나는 그런대로 이 관계가 썩 나쁘지 않다고 넘어갔었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존재하고 무엇을 위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가?

평소라면 그러지 않는데, 그날 골목에서 우연히 고개를 들었고 전봇대에 붙어있던 그 문구가 뇌리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다 찢겨나간 하얀 전단지에 검은 글씨로 빼곡히 인쇄된 정체 모를 고찰. 무엇을 위해···? 이유가 있나. 죽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으면 벌어먹는 삶이지. 그뿐일 텐데 박종건과 싸우며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있음을 먼저 느꼈다. 두 발 딛고 살아가기 위해 몸에 두른 폭력이 맞부딪칠 때마다 어느 한쪽은 쾌감을 느끼고 나머지 한쪽은 어쩌면 다른 것을 감각하면서, 살아있기 때문에 싸운다. 살기 위해서··· 아니, 정말 그것밖에 없는 건가. 삶과 싸움이 어지럽게 얽힌 주먹이 꽂힐 때마다 즐겁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무엇를 위해 사냐는 말은 우습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되어야지 맞다. 우리는, ··· ···아니 나만은 수단을 목적으로 좇지 않는 것이다. 몇 초간 내밀고 있던 팔이 아프던 것을 기억한다. 한 손에 들어오는 유리잔은 별게 들어있지 않았는데도 무거웠다, 훨씬.

향하는 발걸음에는 그다지 무게가 실려있지 않았었다. 이제야 실감이 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돌고 돌아서 이제야 결판인가···. 박종건과의 관계를 굳이 뭉뚱그리자면 친우려나. 신파는 질색이지만 떠나는 친우에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길가의 편의점으로 이끄는 발길은 충동적이고 피우지 않은 까끌한 쓴맛은 김준구의 입안에 남는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잔보단 가벼운 걸 던져 주련다. 누구는 가벼웠든 누구는 가볍지 않았든, 피워올리면 연기로 사라져 버리는 걸로 끝장을 보련다. 그래야 후련하지 않겠냐. 그렇게 손에 쥔 건 색도 아주 푸르르니 홀가분해 보이는 담배 한 갑. CHANGE라. 새겨진 글자를 엄지로 문지르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거센 바람 앞에 불이 붙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무언가 바뀐다. 나도, 너도 다른 꿈을 꾸면서도 닮아있는 각오로 우리는 재회한다. 다시는 재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빗물이 들어차기 시작한 건 언제였지. 쓸데없는 회상에 빠져있던 준구가 시선을 내리며 손을 고쳐 쥐었다. 체온이 묻은 물이 검집을 따라 또르르 굴러내려가 추락한다. 톡. 바닥에 고여있던 웅덩이에 생기는 건 고작해야 미약한 파동이다. 그마저도 세차게 지면에 내리꽂히는 빗줄기에 휩쓸려 찰나의 시간 만에 헝클어져 버린다. 자신이 쭉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이런 것에 의미가 있는 걸까, 정말로.

멀리서 그림자에 싸인 인영이 다가온다. 꿋꿋이 정해진 대로의 정면만을 바라보는 인물. 새까매서 통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던 눈으로는 모자랐는지 검은 물이 번져서 턱까지 흘러내린 저 꼴은 뭔지. 가슴팍까지 아득하게 뻥 뚫린 어둠에 곁눈질 거둔다. 들여다봤자 어쩔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안다. 좀 늦는다 싶더니만···. 시선 돌린 채 휙 던진 담배를 네가 바로 잡아내봤자 이제 우리 둘의 합은 녹슬 일만 남았다고.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연이어 부닥치는 바닥만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내가 줄 우리답지 않은 무게는 그 담뱃갑에 다 담았고. 남은 건 우리다운 방식뿐이다.

콰르릉 소리가 등 뒤에서 울리면 진동이 등줄기를 타고 퍼진다. 그 진동이 몸 안까지 스며들어서 아드레날린인지 앞으로 덮쳐올 폭풍인지 모르는 채로 두방망이질 친다. 불쾌한 감각이다. 곧 장마가 올 거다.

"지키러 왔다, 약속."

목숨인지 뭔지, 버릴 각오가 너에게만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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