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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y to a man's heart

아스타리온 드림 | 쑥갓 님 커미션 :)

rhindon by 댜

늦저녁, 운 나쁜 당번들이 접시를 씻으러 간 사이 S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늘 밤에는 나로 배를 채워도 좋아.”

아스타리온은 설핏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새 의례처럼 변한 말이었지만, 사냥감 삼을 만한 짐승이 죄다 흉측하게 변형되어 있던 그림자 땅을 지난 뒤 한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S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뭐야, 싫어?”

“싫은 건 아닌데, 달링.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나 싶어서.”

절대자의 위협을 잠깐 무시한다면 리빙턴은 꽤 풍요로웠다. 마을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도 그가 송곳니를 박아 볼 동물은 얼마든지 있었다. 토끼라든지, 새라든지, 사냥꾼의 올가미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는 사슴이라든지, 멧돼지라든지…….

그리고 사람도.

아무나 물고 다닐 생각은 없었지만.

설마 내가 이 선량한, 흐음, 민간인들을 물고 다닐까 봐 걱정이야? 그렇게까지 말하는 대신 아스타리온은 머리를 굴리다가, S가 대충 묻고 넘어갈 만한 대답을 골랐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마음만 고맙게 받을까?”

“나도 강요할 생각은 아니었어.”

예상대로 S는 선선히 물러났다. 피를 빨지 말라는 이야기라면 모를까, 목에 이를 박아 달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그러나 씩 웃은 아스타리온이 이만 천막으로 돌아가려던 때, S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배고프면 언제든 날 찾아와도 돼. 알지? 도시에 들어가기 전에 말해 둬야겠다 싶어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도시 안에서는 야생 동물을 사냥하기 힘들 테니까.”

아스타리온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난 다 방법이 있어. 걱정은 접어두라고. 내가 설마 굶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S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답은 충분히 되었다. 아스타리온은 조금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하긴, 스폰이란 걸 들킨 것도 너무 오래 굶은 탓이기는 했다.

“이젠 아니야. 도시에는 비둘기도 있고, 길고양이도 있고, 여차하면 시궁쥐……도 있지.”

“쥐를 먹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은걸.”

합당한 지적이었다. 너무 속내를 내보였나 싶어 마음이 덜컥했다. 매끄럽게 둘러댈 말을 내놓으려던 아스타리온은 또 한 번 S에게 가로막혔다.

“아스타리온.”

S는 차분하게 말했다.

“피가 필요할 때는 그냥 내게 말해. 난 네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대로 배를 채웠으면 좋겠거든.”

 

 

언더다크에 돌아와 정착한 후 장보기는 아스타리온의 몫이 되었다. S의 입맛에 맞는 식재료는 멘조베란잔쯤 되는 큰 도시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하필 S에게 수배령을 내린 것도 멘조베란잔인 까닭이었다. 당연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오렌지가 신선하건 말건, 닭고깃값이 싸건 비싸건 뱀파이어 스폰이 된 이후는 물론 치안판사 시절에도 고민해본 적 없었다.

“이거, 엘프 여자 한 명이 이 주쯤 먹을 만큼 주시죠.”

그렇게 말했다가 생선과 밀가루, 버섯, 로테이 젖을 ‘각각’ 그것만 먹으며 이 주 버틸 만한 양을 사 오는 바람에 죄다 썩히고 버린 적도 있었다. 그다음부터 S가 목록을 적당히 적어주기는 했다. 그러나 S 역시 살림꾼은 아니었다. 연구 재료라면 딱딱 맞춰 구입하고 관리하는 S도 음식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예전에 게일이 요리하는 걸 그렇게 흥미롭게 보더니만, 본인은 꿈도 못 꿀 경지라 그랬었나.

장을 보러 가기 전날 저녁, S는 시들시들한 채소에 염장 햄을 썰어 넣고 스튜를 끓였다. 소금 약간, 후추 조금 외에는 간이랄 게 없는 스튜였다. 먹지도 못하는 음식에 코나 한번 킁킁댄 아스타리온은 부루퉁하게 말했다.

“참나, 그냥 가면을 쓰라니까. 두건도 괜찮고. 멘조베란잔에 괜찮은 식당이 많아.”

“먹을 만하구먼, 수선 떨기는.”

그러면서 S는 스튜를 그릇에 덜었다. 항상 식사는 S가 먼저였다. S의 식사가 끝나고 나면 둘이 함께 뒷정리를 마치고, 거실의 푹신한 소파나 정원 한쪽에 놓은 벤치에 앉았다. 아스타리온이 양껏 피를 마신 다음 축 늘어진 S를 어르고 달래 물을 넘기게 하고 침실에 데려다 두는 것으로 저녁은 대개 마무리되었다.

그날도 별다른 것은 없었지만, S의 침실 문을 닫고 나서던 아스타리온은 문득 혀끝으로 입술을 쓸었다. 입가에 피가 몇 방울 말라붙어 남아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여정 중 S가 그랬었다—난 네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대로 배를 채웠으면 좋겠거든.

어쩌면 그는 그때 S의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다음날 시장통을 헤쳐나가던 아스타리온은 지상의 식재료를 판다며 선전하는 상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랜 기억이 몇몇 떠올랐다. 사실 그도 요리를 아예 할 줄 모르진 않았다. 그가 유혹하려던 사람 가운데는 남이 만들어준 아침 식사를 로맨틱한 제스처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식탁 건너편에서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좀 봐주기만 하면 좋아 죽으려던…….

S에게서 그런 것까지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시간을 들여볼 만한 생각이기는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이 가게 저 가게를 들쑤셨다.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전부 집자니 어느새 배낭이 꽉 찼다. 집에 돌아와 식탁 위에 쏟아놓고 보자 그가 눈대중으로 짐작했던 것보다도 양이 더 많았다.

“이걸로 다 뭘 하라고?”

S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지만, 아스타리온이 부탁하자 순순히 부엌을 내주기는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스타리온은 그럭저럭 자신이 있는 상태였다. 음식 맛을 잊은 지는 한참이라지만, 그에게는 꽤 쓸 만한 손재주와 후각,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어쩌다 언더다크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의문인) 요리책 한 권이 있었다. 채소와 햄만 넣은 스튜보다 나은 걸 만드는 것쯤은 할 수 있지 않겠어?

요리책을 검토한 끝에 아스타리온은 결론을 내렸다. 샐러드 하나, 스테이크 한 접시 하자.

샐러드는 익힐 필요도, 양념을 맞출 필요도 없어서였고, 스테이크는 덜 익어도 괜찮기 때문이었다.

S가 모종의 현상—아무리 귀 기울여 들어도 아스타리온은 S의 연구는 개요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을 관측하겠다며 떠난 사이 아스타리온은 그럭저럭 그럴듯한 상을 차리는 데 성공했다. 전날 먹다 남은 스튜까지 데워 수프 대용으로 떠 놓자, 나름 어디 여관에서 ‘정식’이라며 파는 정도와 겉모습은 흡사해졌던 덕분이었다. 연구 자료를 가득 안고 돌아온 S마저 초를 켜 밝힌 식탁을 보고는 호오, 재미있다는 탄성을 뱉었을 정도였다.

언더다크의 먼지를 씻고 나온 S는 먼저 일지 기록을 해야겠다며 방으로 향하려다 아스타리온에게 덜미를 잡혔다. 아마 잡혀준 거겠지만, 뭐 어때?

식탁 앞에 앉은 것으로 됐지.

식탁은 폭이 두 뼘 정도라, 사실 긴 나무판자 하나를 괴어 놓은 데 가까웠다. 임시변통으로 급조했던 걸 아직 쓰고 있는 탓이었다. 집의 가구 중 고치거나 새로 사야 할 것이 있다면 우선순위는 S와 아스타리온이 모두 사용하는 쪽에 주어졌으니까.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지금도 식탁이 비좁지는 않았다. 손을 움직여 식사하는 것은 S 하나였고, 아스타리온은 맞은편에서 그런 S를 지켜볼 뿐이었다.

“상당히 맛있는데.”

로테이 스테이크부터 한 입 썰어 먹은 S가 꺼낸 첫마디였다. 아스타리온은 비로소 안심했다가, 자신이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왠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S는 평소에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신경쓰지도 않고, 아예 식탁에 연구 일지를 펼쳐놓을 때도 잦았다. 그런데 이 식사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 스테이크에 이어 구운 버섯을 한 조각 입에 넣어 보더니, 포크 끝을 소스에 찍어 핥았다. 그러고서야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며 식탁을 살펴보았다.

스튜를 빼면 아스타리온은 구운 버섯 두 가지를 곁들인 스테이크에 버섯 샐러드, 소스 세 종류를 준비한 셈이었다. 지상의 요리법에 언더다크의 재료를 결합한 결과랄까. 흥미로운 눈빛을 띤 S는 일단 버섯 한 조각을 더 먹었다. 그리고 고기와 버섯을 차례차례 소스에 찍기 시작했다.

묘한 식사법이라고만 생각하던 아스타리온은 S가 모든 음식과 소스의 조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혀를 내둘렀다.

“자기야, 설마 지금도 연구하는 거야? 대단하다.”

“신기하니까 그러지! 게다가 너는 못 느낄 맛이잖아. 나라도 열심히 먹어줘야지 않겠어?”

“그렇게 제대로 된 음식이 먹고 싶었다면, 달링.”

아스타리온은 혀를 찼다.

“진작 나와 멘조베란잔에 들르지 그랬어?”

“멘조베란잔은 자주 갔었어. 예전에.”

S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아스타리온은 그때 누가 S와 동행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멈칫했던 그는 분위기가 가라앉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그래도 내 솜씨가 더 낫지?”

“으음…….”

“지금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S는 노란 소스를 입가에 묻힌 채 소리 내어 웃었다.

“아냐, 아냐! 고마워. 아스타리온, 고마워. 그러고 보니 누가 요리해 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어쩐지 그 한마디에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부엌에서 들인 모든 수고가 봄날 눈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유독 맑게 웃는 S에게서 그가 다신 볼 수 없으리라 여겼던 햇빛이 비치는 듯했다.

두 사람뿐인 고요한 저녁, S는 학자 특유의 호기심이 곁들여진 식사를 느긋이 이어 갔다. 아스타리온도 불만은 없었다. 이 자리에 앉아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며칠이고 가만히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접시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아쉬움을 느낀 쪽은 S가 아니라 그였다. 좀 더 많이 만들 걸 그랬나, 아니면 더 신경을 써서…….

하지만 식사는 끝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빈 그릇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 S는 문득 아스타리온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안에서 양쪽 색이 다른 눈동자가 촛불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네 차례야.”

S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목 옆을 톡톡 쳤다.

피를 달라고 밥을 먹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친절한 초대를 다짜고짜 거절하는 것 역시 무례일 테니까. 아스타리온은 한 손으로 식탁을 짚으며 그 너머로 몸을 숙였다. 어색한 자세였으나 어차피 그리 오래 지탱할 것도 아니었다. 다른 손으로는 S의 어깨 너머 등받이를 잡은 그는 천천히 S의 목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창백한 목에는 푸른 핏줄이 그대로 비쳤지만, 그런 작은 혈관에서는 필요한 만큼의 피를 얻기 어려웠다. 충분한 혈류가 있는 정맥을 노려야 했다. 이미 수십 번은 더 S에게서 피를 얻어마신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어디를 물어야 할지 잘 알았다.

그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살갗에 송곳니를 살짝 누른 다음, 도로 몸을 물렸다.

“아스타리온?”

S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지만, 아스타리온은 태연하게 마주 웃었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었다. 오랜 굶주림을, 길었던 어둠을, 그 끝에서 만난 환한 배려를.

대신 그는 빈 그릇을 모아들고 식탁 앞을 벗어나며 말했다.

“됐어, 달링. 오늘은 이미 넘치도록 만족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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