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브라파엘 02

펜슬 마이크테스트 겸 순화해보았습니다

절반쯤 찢어발겨진 캠비온은 바닥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육체적 한계의 끄트머리에 내걸렸을 정도로 정성껏 파괴된 몸뚱이가 무너진 잔해 사이 그 자신의 쏟아져 나온 혈액과 잡졸들의 신체 말단이 뒤섞여 이룬 웅덩이 위에서 노출된 심부를 비틀며 허덕거렸다. 모험가는 떠났고 계약은 뒤바뀌었다. 백색과 자색으로 연소한 잔불의 열기가 한참 동안이나 가시지 않았다.

*

희망의 집에서 돌아온 지 석 달이 지났다. 네더브레인을 검의 해안에 침몰시켜 사하긴의 축제거리로 만든 날로부터 기산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시를 구한 영웅이자 새 계약의 주인은 한때 헬름의 작은 매머드가 술독을 기울이던 바로 옆 자리에 기대 책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샤리스의 포옹은 윗 도시를 잘 일군 밭처럼 갈아버린 역사적 대사건의 발톱에서 빗겨간 운 좋은 지역의 일부이면서 언제나 그랬듯 천박하면서도 화려한 붉은빛이 두드러졌다. 달리 말하자면 도시의 멀쩡한 지역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사치스런 공간으로 남았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한동안은 윗 도시의 고급 난민들이 몰려들어 영업에 쓰이던 방마저 빈틈없이 차지하고 들었는데, 그들이 숙박비로 내어 놓은 루비와 에메랄드를 보관하기 위해 마담 맘젤은 회계 사무소에 금고를 새로 빌렸다고 했다. 그곳의 보안 수준을 고려하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글쎄, 때론 모험가적 관점을 도시의 사업가에게 들이댈 수 없는 법 아닌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타브의 입장에서는 더욱이 그랬다. 또다시 방값을 내지 않고 묵고 있었으므로.

어째서 그렇게 된 일인가 하면,

라파엘은 윗 도시의 인사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정도로 강력하고 치밀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유명세를 가진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불균형한 거래로 사람을 묶어 사후의 영혼을 무저갱으로 이끌길 일삼는 악마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타브의 직관에 반하는 사실이었음에도 그랬다. 

타브가 의문을 가졌던 점은 그가 제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어떤 악마적인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하는 걸 손에 넣고 싶어하는 이들을 꾀어내려는 전략적인 영업 수완을 발휘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시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였다. 답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나 확실한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길 원치 않았다는 점이었다. 타브가 샤리스의 포옹에서 라파엘이 사용하던 방을 얻어내게 된 것은 그와 관련이 깊었다. 아무리 머물 곳이 부족했다 한들 손짓 한 번으로 차원을 오가는 악마가 자리를 잡았다는 객실을 당장 내게 내놓으라 요구할 수 있는 이는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개의치 않는 것은 온 도시를 통틀어 타브와 그의 동료들 뿐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기꺼웠던 선택인 건 아니었다. 숙소를 옮기게 된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한동안 2층 전체를 내주었던 엘프송 여관의 주인이 아무리 영웅이시라도 더 이상 무료 숙박은 안 된다고 잘라 말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 안팎에서 몰려드는 난민이 늘어나고만 있었고, 자연히 침대가 필요한 이도 늘어났으니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더 이상 객실에서 사람이 얼마나 죽어나갔는지 따위는 중요한 가격 결정 요인이 아니었다. 어차피 밖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리하여 타브는 샤리스로 거처를 옮겼고, 프라이빗한 온수 풀까지 갖춘 안락한 객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악마의 이름 앞으로 할당된 공간이었으므로 숙박비를 부담할 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식비까지도 라파엘의 장부에 달아 둘 수 있었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 새로 장부의 외상 항목을 개설해야 하기는 했다. 프론트 데스크에 쿵 소리가 나도록 오르픽 해머를 내려놓으며 지독하게 진동하는 유황 냄새를 공유하자 영웅과 라파엘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마담 맘젤이 신속하게 이해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마 마담 입장에서도 방을 비워 두는 것보다는 부유한 악마에게 계산서를 달며 공짜 평화유지군을 받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게 이곳으로 날 부른 이유다?"

라파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무려 아베르누스의 기억 이후 첫 대면이었으니까. 삐죽거리는 요철로 덮인 타브의 꼬리가 느리게 흔들렸다. 사람 코앞에서 나타나는 버릇은 여전하단 생각이 들었다.

"음...맞아."

드래곤본 특유의 일렁이는 시선이 미미하게 휘어진 눈가를 타고 불티와 함께 나타난 악마를 향했다. 표면이 두껍고 구조가 낯선 탓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곤 하는 비늘 덮인 얼굴에 비해 악마가 취한 인간의 형상은 찰나에 움찔대는 눈가의 작은 근육과 좁아지는 미간을 여실히 드러냈다. 분명 후벼파인 기억에 기인한 것이었다.

라파엘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다소 이른 작별 의사를 표했다.

"나흘 굶은 들개처럼 굴더니 지성까지 말아먹은 게 틀림없군. 수다는 끝났나?"

"그건 아니지."

이건 얄미울 정도로 즉각적이었다. 적어도 악마의 면전에선 처음 드러나는 면이었다. 더는 그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굴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서 마저 하게. 덕분에 공사가 다망해서 그 징그러운 낯에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거든."

"너무한데. 사실은 좀 도와달라고 부른 건데."

타브는 시선을 탁자로 내려 쥐고 있던 책자를 덮고 몇 뭉치나 더 쌓여 있던 종잇더미를 쓸어모았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대부분 구겨진 자국이 생겼다. 보통 인간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덩치로 고개를 기울인 탓에 유려한 듯 거칠게 뻗은 뿔이 시야에서 거슬리게 움직였다.

"잠깐만... 이거 챙기고."

분초를 다투는 스케줄 속에서 끌려나온 악마가 환장할 노릇으로 손끝을 들어 공중을 그었다. 종이 뭉치가 비마법적으론 겨우 한 뭉치 집어들 순간에 모조리 날아들어 가슴팍에 처박혔다. 어억. 퍼덕거리는 무더기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타브는 순간 휘청였지만 가까스로 전부 끌어안고 한 걸음 뒤를 딛고 서며 금세 중심을 되찾았다.

"말해두건대, 지금 건 완전한 호의였어. 그 짧은 생의 시간을 귀히 여겨줬으니 고마운 줄 알게."

평소보다 반 박자 빠른 해설이 따라붙었다. 앞발로 한 바퀴 굴린 생쥐를 희롱하듯 우위를 짚어가는 어조였으나 타브로서는 그 부자연스런 간극을 포착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웠다. 

제12조 1항, '피구원자'는 '구원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 위해의 정의와 범위는 부칙 및 '구원자'의 재량으로 정한다.

그건 가히 공식적인 문서의 전문가라 할 수 있을 윌과 게일이 타브의 선량한 의견에 동의하며 -죽일 것까진 없잖아. 따지고 보면 내가 쳐들어간 건데- 즉석에서 조항을 써내려가는 데 막대한 도움을 준 섬세한 지성의 산물이었다. 딱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부칙이 시간 관계상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재량이 전부가 되었으니 '구원자'의 자리에 놓인 타브로서는 조금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악마로 말하자면, 계약의 위반 사항이 없음을 확실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맙긴 한데..."

어느새 주변의 시선이 온통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모두 간만에 나타난 사교계의 유명인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각선 방면 테이블의 엘프 손님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에일을 네 병째 비우던 노움은 일행의 만류하는 손길을 거의 다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종이 뭉치를 들고 일어선 타브는 상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고갯짓했다.

"들어갈 거지?"

벌어진 주둥이 틈으로 나란히 늘어선 이빨에 라파엘의 시선이 잠시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 공기 중에 쇠 냄새가 스치는 것 같았다. 언뜻 등줄기에 끼쳐오는 냉기를 느끼며 그는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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