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브라파엘 03

자네는 친구가 없나?

객실은 그대로였다. 두 존재가 들어서자마자 붉고 푸른 지성포식자가 점액으로 끈적이는 촉수를 살랑이는 것을 제외하면 그랬다.

"다방면으로 역겨운 취향을 가졌군."

힘줄이 솟은 네 발로 뒤뚱거리며 기어나오는 이계의 생물을 힐끗 바라보며 라파엘이 평했다.

"그냥 고양이야. 이름도 있는."

악마가 본질을 들여다 본 걸 빤히 알면서도 타브는 태연히 답했다. 배회하던 뇌는 다리를 구부리며 상대를 살피다가 다시 욕조 근처로 기어갔다. 라파엘은 그것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팔짱을 꼈다.

"뻔뻔하게 구는 재주가 늘었어. 바쁜 몸이니 할 말이 있다면 서두르게."

그는 정말로 바빴다. 칼림샨산 커피 한 잔을 겨우 비울 시간차를 두고 차원 관문을 오가며 온갖 인간사의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나날이 그림자 저주에서 쏟아지던 언데드 떼마냥 밤낮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첫째로는 바닥까지 소진해버린 영혼 자원을 급히 다시 축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희망의 집의 현관이 반파되었다는 소식을 입수한 건방진 채무자들에게 계약의 건재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내실은 할렙의 고독한 휴양지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비늘 덮인 손이 거실 한켠의 테이블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한꺼번에 풀썩 내려놓는 통에 가장 위쪽에 쌓인 두어 장이 가볍게 날렸다가 내려앉았다.

"빨리는 글렀는데. 이거 좀 같이 봐줘야 되거든."

드래곤본이 입맛을 다셨다. 멋쩍은 기분에서 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러나 캠비온의 눈에는 잇새를 날름대는 푸른 혀가 보였고, 머릿속을 감돈 휘발성의 악취가 순간 들이쉬는 숨을 역겹게 했다.

"회복이 덜 됐나?"

빌어먹을 비늘 도마뱀. 라파엘을 바라보던 타브는 구역감에 찌푸려지는 안면의 소근육과 크게 일렁이는 울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구태여 짚어냈다. 지나온 여행의 기억으로 동료의 컨디션을 살피고 파악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탓이었으나 악마에게는 기껍지 않은 참견이었다. 라파엘은 턱가를 매만지던 손을 마뜩찮게 바깥으로 저었다.

"멀쩡하네. 기대 이상으로 뻔뻔스럽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깜빡 잊어버리겠어."

타브는 짧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대를 했어? 그리고 곧 엉망으로 쌓인 종이 더미에서 책자 한 뭉치를 끄집어내어 좀전까지 펼쳐보고 있었던 첫 권을 라파엘에게 내밀었다. 반들거리는 실크로 감싸인 표지가 특징적이었고 장식적인 서체로 쓰인 글자가 전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안타르-카르테 양장점 최신 예복 카탈로그.

*

그러니까, 타브의 용생은 이랬다.

타브는 멋진 드래곤본 아버지와 멋진 드래곤본 어머니 사이에서 나고 자랐다. 아버지의 비늘은 은빛으로 빛나며 햇살을 찬란하게 산란시켰고 어머니의 비늘은 지옥 대리석보다 검고 붉게 반들거려 바라보는 이의 가슴을 두 배는 빠르게 뛰게 하곤 했다. 세 식구는 외딴 집에서 살았지만 서로에게 충실해 외로울 때가 없었다.

그리고, 타브는 어머니가 그저 유난히 아름다운 드래곤본에 불과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기는 문명화된 도시의 주민에게 밝히기엔 다소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 집 앞에서 사람을 보았고, 그가 몸뚱이 위에 섬세하게 조립된 섬유 조각을 걸쳤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엄마, 저게 뭐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을 마주쳤고 그때 동시에 깨달았다. 아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길 외면할 시기는 지나버렸다는 사실을. 두 비늘 친구 모두 귀한 새끼가 언제까지나 세상 물정 모르는 갓난쟁이로 남길 원하진 않았다.

그리하여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아버지는 정말로 드래곤본이 맞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레드 드래곤이었는데, 두 분의 해명에 의하면, 그게 줄곧 그들이 맨몸으로 생활했던 이유였다. 드래곤은 원래 옷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 대목에서 잠시 시선을 피했다. 당시에는 아는 것이 없어 묻지 못했지만 뿔이 더 자라고 나서 캐물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진짜 드래곤을 동경했다고 했다. 일족의 조상이 드래곤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정을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학술 연구회에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났다. 한 눈에 그저 드래곤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했다. 엘리시온의 가장 아름다운 갑옷처럼 세공된 비늘과 피의 전쟁 최전선의 횃불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더랬다. 타브는 세 시간 가량 붙잡혀 이 땅에 존재하는 온갖 화려한 수사를 머릿속에 집어넣게 되는 봉변을 당했다.

어머니는 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변명 같잖아. 네 아빠가 귀여웠어. 그게 모든 것을 설명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어딘지 허술한 구멍이 느껴졌던 부분을 어머니의 레드 드래곤적 집요성과 저돌성이 메꾸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벗었다고요?

맞았다. 어머니는 작은 인간이 넘쳐나는 도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편했고, 인간의 방식으로 의복을 걸치는 것도 불편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방식이라면 무조건 좋다고 했다. 여간해선 남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 곳에 자리를 잡고 자연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경위였다.

어머니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남편과 알을 깔아뭉개지 않기 위해 폴리모프로 질량만은 줄인 채로 생활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게 그때까지 타브가 양친 모두를 드래곤본으로 알고 있었던 이유면서, 동시에 드래곤본의 육체로도 의복을 걸치지 않는 생활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이유였다.

*

"옷은 잘 모르겠어."

실은 지금도 하체에 바지만 꿰고 있었다. 상체엔 걸친 건 실오라기 하나 없었다. 장기 숙박중이면서 도시 재건에까지 발벗고 나서는 영웅의 특권이자 지독히도 타브 본인의 사적 편의만을 위한 선택이었다.

"안 그래도 그렇게 보이는군. 그 천박한 취향의 연장선에 있다면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닐세."

카탈로그는 여전히 타브에게 들려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짓에 기가 막힌 라파엘은 손을 내미는 시늉조차 해 주지 않았다. 존재를 묶은 계약이 의식 한 구석을 자극하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당장 아베르누스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느새 속이 뒤집혔던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행동을 대신하여 짐짓 진중한 투로 물었다.

"자네는 친구가 없나?"

"친구 추대식을 가는데 어떻게 직접 물어봐."

"다른 친구는 없나?"

이 문제에 관해선 할 말이 많았다. 악마를 견제하던 일리시드와 함께 양장점에 방문할 수는 없는 것처럼 복잡한 문제였다.

레이젤은 종족 해방을 위해 떠났다. 카를라크는 바알의 배교한 자식과 아베르누스에, 게일은 연구 중 불의의 사고로 오브와 왕관을 함께 터뜨려먹은 뒤 바알스폰의 조언에 따라 미리 잘라 보관했던 손목으로 소생 후 회복 중이었다. 섀도하트는 아울베어와 함께 대관식 날짜에 맞춰 도시로 돌아온다고 했다. 할신은 저주받았던 땅을 다독이는 일로, 자헤이라는 하퍼 결사의 일로 바빴다. 민스크보단 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나았겠지만 부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타브의 시선이 촉수로 물장구를 치고 있는 우리에게 슬그머니 향했다.

"그 뱀파이어 애인은?"

가장 우울한 부분이었다. 반쪽짜리 드래곤본은 다시 한 번 캠비온을 크게 한 입 물어뜯을 뻔 했다.

"차였어."

물리적인 관점에서는 이쪽이 찼다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원하던 걸 손에 쥐여줬건만, 아무리 애인이라도 무릎을 꿇고 목을 내어 놓으란 소린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홧김에 걷어차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스타리온은 떠났고 그걸로 끝이었다. 아직도 가슴 쓰린 일이었다.

"그래서 나를 불렀다는 말이로군."

이번엔 제대로 정답이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그 외
작품
#BG3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