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암굴왕 드림 | 쩌리 님 커미션 :3c
이인일묘 가정의 평화가 깨진 것은 어느 화창한 토요일 아침이었다.
동거를 시작하고도 얼마간 암굴왕은 J의 고양이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했다. 키라가 유독 암굴왕에게 경계심을 품는 까닭도 있었고—암굴왕이 보기에 미인의 반려로서 아주 바람직한 자세기는 했다—그가 고양이란 생물에 대해 큰 관심이 없던 탓이기도 했다. 물론 고양이는 선원의 훌륭한 벗이다! 선창에 구멍을 내고 건량을 파먹는 쥐새끼들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고양이 서너 마리보다 나은 부대를 조직할 수도 없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J의 고양이는 그 옛날 선박의 안녕을 지키던 수호자들보다는, 뭐랄까……. 귀부인의 팔에 안긴 새하얀 소형견을 더 떠올리게 했다.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털 범벅으로 만들어놓고, 무분별하게 왕왕 짖어대는 데다가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는 귀부인의 찢어지는 비명을 감수해야 하는 소형견 말이다.
이 시대에 그런 드레스는 박물관 내지 웨딩샵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고 키라의 울음소리는 짖는 것과 거리가 멀었으며, 암굴왕은 예나 지금이나 작은 짐승을 괴롭힐 악당은 아니었다. 하지만 암굴왕은 당당하게도 그 정도쯤 큰 차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요지는 고양이고 개고 그런 데 있지 않았다. 쥐잡이 견습 선원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J의 작은 즐거움이겠구나!
어쨌거나 키라는 제법 번듯하게 생긴 고양이였다. J는 키라를 번번이 싸고돌았고. 그러니 암굴왕도 부인의 행복과 가내 화목을 위해서라면 고양이 털이라든지, 우렁찬 코골이 같은 사소한 불편쯤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고양이가 어느 날 갑자기 암굴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사태가 커지기 전 대화로 해결해 보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부인.”
암굴왕은 진지하게 말했다.
“부인의 고양이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양?”
J는 암굴왕을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남편의 목숨이 달린 일에 대한 것치고 상당히 가슴 아픈 반응이었다.
그리하여 암굴왕은 J에게 매달리는 대신 자주성을 발휘하여 사태를 분석해 보았다. 키라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며칠 되었겠지만, 자신이 눈치챈 것은 보다 최근의 일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먼저 고개를 돌리는 법이 없다든지, 바닥에 깔린 러그 아래 웅크리고 있다가 암굴왕의 발을 걸어 넘어뜨릴 뻔하다든지, 새벽에 J 곁에 누운 자신 위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앉는다든지……. J의 노트북을 빌려 쓰려 할 때마다 그 위에서 버티고는 비켜주지 않는 일도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였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상할 게 없는 일들이었으나 요즘 들어서는 빈도와 강도가 너무 심했다. 무엇보다 암굴왕은 음모를 꾸미는 자가 풍기는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귀여운 척 가장한대도, 저 고양이가 자신을 바라볼 때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리하여 토요일.
모처럼 날씨가 좋았다. 얼마 전 새로 문을 연 빵집에서 아침거리를 사 오겠다며 J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암굴왕은 키라와 단둘이 남겨졌다. 멋들어진 줄무늬 털을 다듬던 키라는 암굴왕의 시선을 눈치챈 듯 도도하게 네 발로 일어서더니, 꼬리를 살랑거리며 한쪽의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는 암굴왕을 돌아보는 게 아닌가?
고양이의 생리 현상을 관찰하겠단 마음 따윈 없었지만, 기 싸움이라면 암굴왕이 질 수는 없었다. 눈을 부릅뜬 그는 이 얄미운 고양이를 상대하기 위해 눈가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그때, 팍 소리와 함께 모래가 튀어 올랐다.
경쾌한 박자에 맞춰 사방에 모래가 날렸다. 암굴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무슨 조화인지 눈높이까지 닥치는 모래알에 눈을 깜박이고 말았다. 다시 노려본 고양이는 위풍당당하게 모래를 걷어차고 있었다. 밝은 초록빛 눈은 한 번 흐트러지는 법도 없이 암굴왕을 주시했다.
J를 불러야겠다거나, 방을 치우려면 한세월이겠다거나, 심지어는 저 고양이를 어떻게든 화장실에서 꺼내야겠다는 것보다도 복수자 암굴왕이 먼저 떠올린 것은 한 가지였다.
날 묻어버리겠다는 뜻인가?
“크하하하! 도전을 받아들이지!”
그렇게 돌아온 J는 모래 천지가 된 집안에 어디 무덤에서라도 기어 나온 몰골의 남편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보…….”
‘암굴쿤’도, ‘남푠’도, ‘여부야’도 아니었다. 언제나 애정만이 담뿍 실려 있던 부인의 눈에서 애정 이외의 것—물론 애정도 있기는 했다만—을 발견한 암굴왕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일단 부인의 기분부터 풀어주고 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치우겠다.”
“아니, 키라랑 모래 싸움이라도 한 거예용? 청소기로 치우려 해도 한참 걸리겠는데.”
울상이 된 J의 품으로 키라가 폴짝 뛰어들었다. 진홍색 코를 비비적거린 키라는 실낱같은 소리로 야옹 울더니 암굴왕을 째려보았다. 어느 모로 보나 가엽기 짝이 없는 미물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오래전 누명을 쓴 뒤 아픈 구석이 하나 생겨났던 암굴왕은 기가 차서 혀라도 깨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 고양이가 먼저…!”
“그 고양이? 그으 고양이이?”
화난 말투는 아니었지만 암굴왕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양이를 심문할 수도 없고, 애꿎은 머리카락이나 벅벅 헤집은 암굴왕은 휴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불쌍한 체 아양을 떨던 키라가 J의 눈이 암굴왕을 향한 새 쩌억 입을 벌렸다. 송곳니 사이로 분홍빛 혀가 날름 드러났다.
암굴왕은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을 되찾았다.
“생각났다!”
“엥? 뭐가 생각나?”
“그날부터 저 녀석 태도가 이상했단 말이다! 내가 소파에서 부인을 가졌던 그 밤부터!”
모처럼 로맨틱한 저녁 식사를 하고, 벚꽃 핀 개천가를 거닐며 산책하다 돌아왔던 날이었다. 꽃향기에 취해 흐드러지듯 웃는 부인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던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간신히 귀가에 성공했던 날. 현관문이 철컥 잠기자마자 그는 한쪽 팔로 부인의 허리를 감싸며 입을 맞췄다. 상의 아래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맨살을 만지작거리자 부인이 가볍게 타박했다.
—아잉, 침대까지는 가야 하는 거 아냐?
—원한다면 기꺼이.
하지만 침대만큼 수평이면서도 푹신하기까지 한 표면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두 사람의 거실에 놓인 소파였다. J를 번쩍 들어 올려 소파로 옮긴 암굴왕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행동을 개시하려다, 문득 컴컴한 구석에서 번뜩이는 한 쌍의 녹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J가 눈치챈다면 뭐라 하겠는가? 기껏 잡은 분위기가 망쳐질 게 뻔했다. 그러므로 고양이의 동공이 경악으로 확장되거나 말거나, 암굴왕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름하여 ‘모르는 척’.
“그때 무시당한 앙갚음을 하는 게 분명하다! 훌륭한 자세지! 그러나 감히 내게…….”
“아아악! 그마아아안!”
이런, 역효과였다. J가 소리치자 키라는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단 한 순간도 늦지 않은 도주였다. 부끄러움에 발갛게 얼굴을 물들인 J가 빵 봉투로 암굴왕을 팡팡 두드리기 시작했으니까.
드물게 쩔쩔매는 남자를 바라보며 고양이는 능청스럽게 앞발을 핥았다. 흥, 백작이든 뭐든 알 바냐? 이 몸은 무려 왕자님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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