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4 - 고해
* 24년 10월에 마무리된 작업물입니다
* FF14 드림커플. 신청자 요청으로 캐릭터명은 이니셜로 표기하며, 캐릭터를 지칭하는 일부 단어를 샘플에서는 변경하였습니다.
* FF14 기반이며, 해당 글은 효월의 종언(6.0)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소재상 칠흑의 반역자(5.0) 메인스토리 이야기를 다룹니다. 샘플 열람에 주의바람.
* 최종 공백포함 4,727자 / 초고 완성 후 2번 윤문을 거침
* 글은 일부분만을 발췌
(전략)
문득 잠에서 깼다. 인기척 때문이다. 올드 샬레이안에 머무는 동안 와 같이 사는 이 집에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긴 하지만 지금은 틀림없이 밤이고, 무엇보다 인기척 자체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오만 아수라장을 뚫고 온 역전의 모험가인 제가 여기까지 접근을 허용했다면, 그건 딱 한 사람뿐이다. 잔뜩 몸을 굳히고 긴장했던 C는 얕은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마음의 준비를 한 보람도 없이, 눈앞에 바로 Y의 얼굴이 보였다. 맑은 날 밤에 뜨는 보름달처럼 둥글고 은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한가득 들어찬다. 쑥맥처럼 숨을 삼켰다. 여느 때라면 따라붙어야 할, 쿡쿡 울리는 웃음소리가 없다. 비일상을 인지하자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린다. 동공이 빠르게 벌어진다. 제가 미코테 족이어서 다행이지 싶었다. 겨우 손톱달에서 나온 한 줌 빛만으로도 상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으니.
Y의 모습을 완연히 잡아낸 C는 재차 숨을 삼켰다. 옅은 두려움이 늘 자신감에 차 있는 그의 얼굴을 굳게 한 채다. 어째서. 사위는 고요하고 이곳은 평화로운데. 심지어 편안한 집에서 쉬는 나날이 이어져 파자마풍 원피스를 입은 채 아닌가.
“Y…?”
“잠깐만 손 좀 줘볼래요?”
물음을 꺼내기도 전에 말문을 빼앗겼지만, C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넘겼다. Y는 내밀어진 손을 잡고 곁에 기대어 앉는다. 투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거친 결이 있는 손이 평소보다 차가웠다. 부드러운 침묵이 사이를 채웠다. C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그가 아는 가장 현명한 이가 입 열기를 기다린다.
그는 잡은 손끼리 비슷한 온도가 될 무렵에야 운을 뗐다.
“깨운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후후, 역시 영웅님이네요, 당신은.”
“…무슨 일 있었어요, Y?”
“그렇게 묻는다면 뭔가 있었다고는 해야 할까요…. 이제는 진정했으니 말할 수 있어요.”
진정했다니. 그 대답에 C는 섣부르게 반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유가 짐작이 가 직전 질문을 취소하고 싶은 지경이다. 악몽. 저도 뭉개진 유화같이 짙고 텁텁하고 괴로운 꿈에 짓눌렸던 적이 있었다. 숨통을 콱 조여드는, 속절없이 누군가를 찾게 되고야 마는 바닥 모를 절박함. 그 당시 제게 그런 이는 없어, 하염없이 밤을 지새우며 해가 뜨고 몸을 혹사할 수 있는 낮이 오기를 기다렸더랬다. Y가 그런 상황에 내던져지지 않음에 자연스레 감사했다. 그리고 동시에 피어오른 감정을 C는 잇새로 씹어 삼킨다. 악몽에서 깬 후에 곧장 저를 찾아줬다는 아이 같은 기쁨과 애초에 그가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야 하지 않냐고 스스로 꾸짖는 질책이 엉망으로 뒤섞여 목구멍을 넘어갔다.
제 수런거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준 것일까. 아니면 악몽의 잔재가 말을 더디게 하는 걸까. Y는 아주 느리게,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꿈을 꿨어요. 당신이, 대죄식자가 되어버린 세계를요.”
“…….”
아, 이래서야 입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멀지만 꽤 가까운 예전이 떠오른다. 가시광선 영역을 빼앗긴 대신 에테르 파장을 읽게 된 눈이 저를 죄식자로 인지했던 순간. 서로가 당황을 금치 못했더랬다. 그때는 어찌어찌 잘 풀렸지만, 목숨을 걸고 도박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Y는 그 이래 당황하거나 불안해 보인 적이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사실은 불안했던 걸까. 아니지, 잘 생각해보면 당연히 불안할 수밖엔 없었을 거다. 대죄식자를 토벌해나갈수록 Y의 시야에 보이는 저는 그 세계에서 제일가는 대죄식자로 변해갔을 테니까. 그러니 똬리가지 마을에서 재회한 이래 최후의 최후까지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던 똬리가지의 수장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 처음 들은 셈이다. Y의 다정하고 섬세한, 강단 있는 심성이 새삼스러웠다. 동시에 발끝부터 짜릿하게 올라오는 환희가 C를 절망케 한다. Y에게 C라는 존재는 잃기 두려워할 정도로의 무게를 지녔다. 상황이 알려준 명제가 뼈를 녹일 정도로 달큰했고, 바로 그 점이 경멸스럽기까지 했다.
(중략)
엷게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낙엽처럼 바스락거렸다. 지금껏 들어왔던 그 어떤 웃음과도 질감이 다르다. C는 혀끝에서 어룽거리는 모든 말을 삼켰다. 물거품처럼 떠오른 단어들은 전부 때 늦은 위로이며, 어긋났고, 적절히 닿을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런 순간에 알맞은 말 하나 제대로 건네지 못하다니.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Y는 그의 머뭇거림이 오히려 미쁜 듯했다. 눈가가 가늘게 뜨여 초승달같이 접힌다.
“꼭 말로 해야만 전해지는 건 아니니 괜찮아요, 당신은 늘 거기에 내 반석으로 있어 주면 되니까요. 게다가 C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나, Y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를.”
나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불안과 공포를 안고서도 결코 절망에 잡아먹히지 않았어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랬다. Y는 언제나 심지 굳은 사람이지 않았는가. 그 점에 스스로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고.
“그럼요, Y. 잘 알아요. 당신은 참 강한 사람이죠.”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 여느 때처럼 산뜻한 자신감으로 들어찬 얼굴과 마주쳤다.
“또 그런 표정을 짓네요. 정말이지. 우리는 그 누구도 혼자서 강하지 않아요. 다 같이 함께 종말을 막아낸 것처럼 나는 당신을 나의 든든한 토대로 삼고 멀리 뛰어나가는 거예요. 당신이 보는 내 강인함은 아주 여러 사람이 빚어냈고, 이제 그 중심엔 당신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좋겠는데…. 뭐, 아무래도 당신이 이 사실을 가슴 펴고 자랑할 때까지는 오래 걸릴 듯하네요. 어쨌든,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꽤 인내심 많은 선생님이니까.”
“…하하. 농담도.”
“어머, 농담으로 들렸나요?”
“과제는 조금만 부탁합니다, 선생님.”
“후후, 하는 거 봐서요.”
자기 페이스를 찾은 연인에게 안심하고 있으려니 바로 뼈가 있는 농담이 날아들었다. 그에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고, Y는 제가 좀 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지만 늘 그랬듯이 과하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머쓱하게 농담을 받아치니 Y가 흡족하게 웃는다. 이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면서. 그러니 앞으로는 틀림없이 더 나아질 거라고도.엷게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낙엽처럼 바스락거렸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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