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5 - 가시나무의 노래
* 24년 12월 1일에 마무리된 작업물입니다
* FF14 자캐커플. 신청자 분께서 캐릭터 이름 공개를 허용해주셔서 그대로 기재합니다.(not 빛전 남레젠-빛전 여우라)
(루란은 짱이니까요. 자세한 프로필은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0★)
* FF14 기반이며, 해당 글은 효월의 종언(6.0) 이후를 배경으로 합니다.
* 루시안이라는 캐릭터가 포르탕 가 사람들(오르슈팡 제외)에게 적개심이 강한 편이므로 샘플 열람에 참고해주세요.
* 최종 공백포함 4,921자 / 초고 완성 후 1번 윤문을 거침
* 글은 일부분만을 발췌
이슈가르드가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쇄국정책이 풀리고서 루시안은 무척이나 바빴다. 당장 에오르제아 도시동맹 세 국가와 교역을 터야 했고, 유통망이 겨우 안정되나 싶었더니 재앙입네 멸망입네 하며 경제가 출렁였다가 그 올드 샬레이안조차 교역 문을 열겠다고 난데없이 선언하는 바람에 한차례 파동이 일었지 않은가. 란에게서 언질들은 바가 있어(본인은 알려줬다고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남들보다 한 발짝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그는 정말로 바빴다.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고, 계속 만나고….
힘들기는 해도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고 쇄국정책이 길었던 나라 출신이니만큼, 넓은 유통망과 다양한 거래처는 곧 일반 시민들에게 많은 물자를 돌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믿었고, 실제로 결과도 내고 있었다. 귀족들, 그러니까 상원 위원들 눈치나 인맥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인 시민 유통망을 만드는 쾌거도 이루지 않았나. 그 덕에 감내해야 할, 엉뚱한 일이 생겼음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르페브 자작가의 유일한 가주는 사생아다. 자기끼리 미쳐 자멸한 가문만 해도 벌써 물어뜯기 좋은 소재인데, 하물며 사생아 나부랭이인 저를 밉상으로 보는 푸른 피는 널리고 널렸다. 그러니 뒤에서 쑥덕거릴지언정 먼저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귀족 놈 따윈 없었고. 저도 어차피 그놈들의 인정 따위는 바라지 않으니 소 닭 보듯 해 왔다.
그런데 포르탕 가의 말썽쟁이라는 에마넬랭은 상궤를 벗어난 놈이었더라. 귀족답지 않은 녀석이라 집안에서도 골치라곤 얼핏 들었는데 이런 부류일 줄은 몰랐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지. 루시안은 속으로 한숨을 쉰다. 림사 로민사에 직접 들러야 했던 날에 잠깐 짬이 생겨서 란이 말했던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더니 말이 붙여졌다. 뭐랬더라. 고향 땅 같고 림사 로민사와 교역하는 선두라는 점이 같아서 말 걸었다나 뭐라나. 내가 누구인 줄은 아느냐고 하니까 당당하게 한다는 말이 “우리 성도에서 그 영웅님하고 제일 친한 사람, 맞지?”란다. 어이가 없었다. 성도에서 조금이라도 귀족들 알력 다툼을 아는 사람이라면 루시안 르페브가 귀족, 특히 포르탕 가라고 하면 치를 떠는 걸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이 자식이 그 집안의 골칫덩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비록 란을 언급하면서 저와 가장 친하다는 수식을 골랐을지언정 반석 같은 적개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면전에서 날을 세우지 않은 까닭은 여전히 성도를 굽어 들여다보는 친우의 면을 봐서고, 란이 아주 티끌만큼이나마 신세 진 바 있어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눈치 따위는 잠자리용 눈물만큼도 없는 멍청이는 저를 좋은 청자라고 생각했는지, 그 후론 툭하면 말이 걸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의원에 제출할 제안서가 있어 잠시 기다리는데 눈에 띈 거다. 급한 안건이 아니었다면 다른 날을 노렸을 테지만, 연금용제 관련 유통 경로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지금을 놓치면 안 됐다. 제 기분만으로 기회를 날려서야 안 될 일이므로 루시안은 오로지 인간 된 도리 하나만으로 묵례하고서 저 혼자 떠드는 에마넬랭을 내버려뒀다.
…삼십 분이나 계속 쉬지 않고 떠들 말을 뽑아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싫어하는 작자에게서 이런 식어버린 감탄이나마 끌어낼 수 있게 된 건 아마도 란 덕분이겠거니 한다. 나의 빛, 나의 영웅. 이들에 대한 증오를 영원히 거둘 수는 없다는 고백조차 네 마음이 그러기를 선택했다면 상관없다고 긍정해주었고, 무엇보다 이 미천한 사생아조차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손잡고 이끌어준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에 한결 평화가 깃든다(오늘은 그랬다는 뜻이다).
그래서였을 거다. 소음으로만 흘려보내던, 영양가 하나 없는 수다에 저도 모르게 대꾸하고 만 것은.
“라니에트 경은 그렇게 아름다운데 전투까지 끝내주게 잘 한다니까? 완전 반칙 아냐?”
“그런 평가라면 란이 더 적합하―”
말은 다 마물리지 못하고, 루시안은 아차 했다. 하필 란을 떠올리고 있기도 했고, 예쁜데 강하기까지 하다는 수식은 전무후무하게 앞으로도 단 하나, 란뿐이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반사적으로 반박부터 해 버렸다. 아무리 멍청해도 사대 명가 귀족 나부랭이인데, 그 앞에서 마음을 풀었다니. 정말로 경솔했다. 아니면 모르는 새 피로가 쌓였거나. 어쨌거나 실책은 실책이다. 성도에서 저와 란이 친밀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당사자가 먼저 말하는 건 발언의 무게가 다르다. 사생아와 영웅의 조합이란 늘 물어뜯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하얀테 설원 눈송이 수만큼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얼핏 머릿속의 란이 “루-쨩은 생각이 너무 많아”라고 핀잔했지만, 그냥 넘겼다.
루시안은 곧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에마넬랭과 눈이 마주쳤고, 어떤 공격이 이어질지를 가만히 도사렸다. 그러나, 포르탕 가의 애물단지는 오히려 함박웃음을 지으며 과장되게 팔을 벌렸다. 어디서 많이 본 동작이라 반사적으로 정색하며 몸을 물렸다. 정답이었다. 기쁨의 포옹이 무위로 돌아간 망나니 놈이 볼멘소리를 냈다.
“쳇, 뭐야. 저기 해적 애들은 이거 잘 받아주던데.”
“…제가 포옹할 상대는 가리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우와, 그 사람하고 잘 나간다는 거 완전 진짜구나. 아, 부럽다~. 쌍방이겠지! 그래도! 내가 라니에트 씨에게 품은 이 마음이 뭔지 당신은 알겠네! 와! 그래서 말인데!”
소름이 다 돋았다. 잠깐이라도 반응이 늦었으면 저 끔찍한 귀족과 강제 포옹을 하게 됐을 거라니. 다행스럽게도 저 멍청이는 포옹을 두 번 시도하지는 않았고, 그냥 따발총 같은 짝사랑 이야기나 쏘아댔다.
접수원이 저를 부른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서류를 내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애진작 바보 같은 사랑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작자를 내쳤어도 됐는데, 그러지 못한 까닭은 역시 처지가 같았던 친우 얼굴이 어른대서다. 오로지 네 면을 보고서 이 집안만 특별 취급하는 거야. 정말 정말 싫어하지만, 그래도 면전에서 세 치 혀로 썰어대진 않잖아. 속으로 불평 아닌 불평이나 늘어둔 그는 조만간 친구 성묘나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란이 시간 맞으면, 같이 가자고 해볼까. 아냐, 곧 멀리 간다고 했으니 채비로 바쁘겠지. 떠나기 전에 날 보러 들릴 테니까 됐어.’
정신적으로 지쳐서일까. 유독 란이 보고 싶었다. 가끔은 솔직한 바보라고까지 느껴지는, 그 애의 해사한 미소를 앞에 두고 아무 생각 없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커르다스의 설원과는 다른 빛의 하얀 웃음을 떠올리면 문득 뺨에 열이 어리는 듯도 했다. 어린 시절보다 조금은 온난해진 이슈가르드의 바람이 유독 써늘하게 느껴질 정도로는.
르페브 자작가는 당연히 이슈가르드 상층에 있다. 다만 위치는 사대 명가가 한 구석씩 차지한 중앙 날개에 비해 한참 외곽으로 치우친, 하층과 인접한 부지였다. 권력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양새다. 그 사실을 곱씹으면 은은한 부아가 치밀기도 하는데, 동시에 지금 이슈가르드에서 가장 잘난 집을 들면 저희 가문이 다섯 손가락에는 꼽힌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럭저럭 진정됐다. 지금 번듯한 게 더 중하지 않겠나.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집주인의 에테르를 인식하고 열린 대문을 지나치자,
“안녕, 루! 어서와!”
놀랍게도 집사 대신 란이 저를 맞이했다. 얼떨떨했다. 인사나 겨우겨우 돌려준 루시안은 파트너에게 번쩍 들려 날라지다시피 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응접실 소파에 내려졌다. 오늘 유독 란을 떠올리게 된 것은 이 탓이었나, 하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생각이나 하면서.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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