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택일
배니싱 - 명렬 드림 / 매장, 2천 자
명계의 문턱 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혜은의 아쉬움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형편없을 정도로 평범한 보통의 인간 하나가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극보다도 우선된다. 그녀는 삶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것도 아니요, 숨이 붙은 존재라면 누구든 마땅히 끝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녀가 중요히 여기는 일이라면 언제나 명렬에 관한 것일 수밖에.
간만에 마주보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사랑스럽다. 제때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그를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재주는 둘 중 누구에게도 없으니. 오래전 깨어진 안경알 너머 검붉은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하나 그가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은 단지 당혹감을 숨길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혜은은 이 순간 눈앞의 귀신을 온통 휩쓸어 가려고 두근대고 있을 흡혈의 충동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런데 그는 가쁜 숨을 눌러 삼킬 뿐, 아직 제게 달려들지 않고 있다. 지금 명렬의 이성을 붙들어매는 제약은 과연 무엇일까. 그의 눈앞에 너브러진 나를, 단지 죽어가는 몸 하나가 아니라, 윤혜은이라는 인간으로 비치게 하는 것은.
파리하게 질린 혜은의 살갗 군데군데 붉은 자국이 묻어난다. 그녀는 억지로 손을 들어 명렬의 뺨을 감싸 쥔다. 차마 혜은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던 그가 간신히 눈을 맞춘다. 비린 혈향이 사방에 가득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굳어버린 명렬은 숨만 색색 몰아쉬는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갈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 혜은이 살아날 가망은 없다는 것을. 그는 제 품안에 늘어진 혜은을 제대로 안아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바닥에 다시 내려두지도 못한다. 차가운 체온이 혜은의 곁을 감싸고 있었다. 혜은은 그 서늘한 감각이 제법 기분 좋았다. 눈앞이 깜박이며 점멸할 때마다 명렬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뀐다. 그는 허탈하게 웃다가, 잔뜩 찡그렸다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뻐끔거린다. 그러나 아무 말도 토해내지 못한다. 저렇듯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명렬은 왜 울지 않을까. 그녀는 문득 궁금하다. 아,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저 사랑스러운 얼굴을 다시는 못 볼 텐데. 그것만이 여생에 대한 어떤 미련보다도 앞선다. 간헐적으로 달싹이는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어때, 도련님.
이제 좀 후련해? 아니면 아직 아쉬워?
꺼져 가는 목소리가 혜은의 붉은 입술 바깥으로 미끄러져 추락한다. 출혈은 멎지 않는다. 지독한 피 냄새가 점차로 자욱해져 간다. 어느새 비가 내린다. 새붉은 핏물이 주위로 가득 번진다. 이미 옷자락을 흠뻑 적신 채, 명렬은 고장난 기계처럼 자꾸 몸을 떨었다. 혜은을 향하던, 그러나 이제는 갈 곳 잃을, 비틀린 애착이 명렬의 머리를 날카롭게 죈다. 당장이라도 그 튼튼한 이를 박아넣고픈 충동으로 괴로워하는 그 얼굴이 혜은에게는 한껏 흡족했다. 차가운 빗물이 식어가는 몸을 적신다. 아마 그의 눈물도 이만큼 차가울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격동하는 명렬의 표정을 남김없이 눈에 담는다. 지금 그가 저를 마시겠다고 한다면. 차라리 기쁠까. 달리 영생을 꿈꾸어본 적은 없다지만 혜은에게도 은밀한 소망 같은 것은 존재했다. 저를 살리기 위해 피를 내주는 동안 명렬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가 새삶을 얻고 깨어났을 그때에는, 명렬은 또 어떤 모습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울고 있을 수도 있을까. 죽은 뒤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지만. 그러니 지금 코앞에 닥친 이 순간, 이번의 종결만이 혜은에게는 가장 짜릿한 쾌락이 되어 주는 셈이다. 그리고 그녀는 명렬의 반응에 충분히 만족했다. 이상을 꿈꾸는 건 사치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은 이미 혜은의 피로 더럽다. 그녀는 제게 한 마디 말을 뱉어 놓을 시간만이 남아 있음을 알았다. 나머지는 명렬의 몫으로 떠넘겨 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혜은이 웃는다. 젖어 들러붙은 머리칼을 힘겹게 쓸어넘겨주는 명렬을 향해 말한다. 그를 사랑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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