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편지
살아남은 이들
※ 2018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기반으로 한 창작물이며 주관적인 캐릭터 해석 및 상상을 포함합니다.
※ 작품 전반에 걸친 스포일러 有.
눈앞에서 푸른 물결이 요동치고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처음으로 직접 보는 ‘끝없이 펼쳐진 소금물’은 실로 장관이었다. 책에서 읽고 가보고 싶다 생각했던 곳 중에서는 일단 바다가 가장 가기 쉬울 것이라던, 마을 어르신의 추천에 따라 제일 먼저 찾은 바다는 한없이 넓고 아름다웠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모래사장 위를 거닐고, 파도가 지나는 모래 위에 발자국을 찍은 뒤 쓸려가는 모습을 구경하고, 물이 얼마나 짠지 입에도 대어보고 ―혀에 닿자마자 뱉어냈지만―, 보들보들하기도 까끌까끌하기도 한 모래 아래 박혀 있는 조개껍데기를 골라내기도 하고……. 밤바다를 구경하며 한참을 놀던 그는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넣은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연안을 따라 걷는 동안 점찍어두었던 파도가 가장 세게 치는 곳으로 갔다. 물이 새지 않도록 마개가 꽉 닫혔는지 확인하고 손에 든 병을 달빛에 한 번 비추어본 뒤,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 북극까지 잘 닿을까? 언젠가 되돌아갈 딱 한 번을 남겨두고 이렇게 ‘까뜨린느’와도 작별이겠구나. 안녕.
연안을 따라 정처 없이 헤매던 도중 끌리는 오른다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투명한 유리병이 끝부분만 삐죽, 모래 사이로 비집고 튀어나와 있었다. 용케 깨지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병을 빼내자 안에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종이가 든 것이 눈에 띄었다. 끄집어낸 마개가 손 안에서 삭아 바스러지는 걸 보면 꽤 장시간 바다를 표류한 듯했다. 그는 병을 뒤집어 종이를 꺼냈다.
아저씨에게.
안녕.
음. 일단 시작은 했는데 막상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북극에는 잘 도착했나요?
먼저 그때 일을 조금 늘어놓자면, 저는 격투장을 어찌어찌 탈출했어요. 아저씨가 불을 질렀을 때. 다들 불길과 연기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잽싸게 도망쳐 나왔거든요. 정신없이 달리느라 경황은 없었지만 딱 한 번 뒤돌아봤을 때 아저씨가 빠져나가는 게 보여서 무사하구나, 했어요. 제 한 몸 자유를 얻으려고 아저씨를 배신한 제가 그런 안도감을 느꼈다고 이제 와 말하는 것도 웃기려나요?
그대로 달려서 불타는 격투장을 벗어나고도 사흘 정도는 주변의 숲에서 지냈던 것 같아요. 그 치가 떨리는 장소에서 되는 대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제 인생의 끔찍한 기억들이 만들어진 그곳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도 보고 싶었거든요. 꼬박 하루 동안은 내내 불길에 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비가 내려서 불꽃이 잦아들었을 때 가 보니 폭삭 꺼져 흩날리는 재만 남아 있었죠. 그 후로도 하루 동안은 살아나온 격투장 사람을 못 봐서, 주인 부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그때 죽지 않았을까 해요. 거대하게만 느껴지던 지옥이 무너져 내리고 나니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미련 없이 발을 돌릴 수 있었어요.
저는 사실 아직까지도 아저씨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가 아팠던 건 내가 약을 탄 물그릇을 건넸기 때문이라는 것, 친하게 지내던 내가 아저씨를 배신한 이유……. 하지만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같은 행동을 할 거예요. 자유가 절실했지만 나는 힘이 없었고, 당시에 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내 양심을 미래의 자유와 맞바꾸는 것뿐이었으니까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여전히 죄책감은 내 양심을 찌르고 있답니다.
북극은 어떤가요? 아저씨가 좋아하는 북극곰도 많이 살고, 아름다운 오로라도 많이 보였으면 좋겠네요. 정작 그렇게 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저는 아직까지도 북극에 발조차 들여보지 않았다니 우습지요. 타오르는 격투장을 나오던 날, 흐릿하게 사라져가는 아저씨 뒷모습을 보면서 북극에 가겠거니, 했어요.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답니다. 북극에는 인간이 없다고 했는데, 제가 가버리면 결과적으로는 아저씨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잖아요? 저도… 결국은, 이기적인 인간이니까. 공포에 질렸다고는 해도 아무렇게나 잔인한 말을 뱉은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려니 뭣하지만, 적어도 북극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한 말을 지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역시 사과는 직접 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시간이 흐르고 나도 아저씨도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치지는 않을 만큼 새로 찾은 삶에 익숙해졌을 때, 그때쯤 북극에 찾아갈게요. 담담하게 사과를 전하고 싶은데 막상 만나면 아무 말도 못 꺼내고 눈물만 쏟을까봐 그게 조금 걱정이네요.
조금 다른 제 이야기를 더 해볼까요. 지금은 격투장이 있던 곳과는 꽤 떨어진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지내고 있어요. 이곳에서는 오로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대신에 맑은 날 밤에는 은하수가 보이지요! 오로라는 아니어도 밝게 빛나는 밤하늘을 느긋하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요. 낮에는 빵집에서 일하고 있고 시간이 날 때는 빵집 주인아주머니에게 빵 만드는 법도 배운답니다. 다음에 언젠가 아저씨를 만나러 가게 되면 제가 만든 빵을 가져가 볼게요. 곰고기를 좋아하는 아저씨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 꽤 실력이 붙어서 맛있게 만들 수 있게 되었거든요. 으음… 따뜻하게 먹지는 못할 테니까 여기서 갓 구운 걸 먹을 때만큼의 맛은 아닐 것 같긴 하네요.
새로 붙인 취미는 독서예요. 전에도 글을 아예 못 읽는 건 아니었지만 빵집에서 일하면서부터 장부 관리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같이 하느라 많이 늘었어요. 글자가 눈에 익으면서 슬슬 책도 많이 읽게 된 것 같아요. 격투장에서는 좀처럼 읽을 시간도 여건도 안 돼서,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읽는 속도도 느리고 많이 어색했지만요. 지금은 완전히 능숙해졌답니다! 책을 통해서 세상에는 북극이나 오로라 말고도 신기한 곳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라든가, 짠 물로만 가득 차 있는 바다라든가, 풀과 나무가 빼곡히 우거지고 비가 많이 오는 숲이라든가. 언젠가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다양하게 둘러보고 싶어요.
마을은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시끌벅적한 것 같네요. 격투장처럼 작위적이고 요란스럽고 머리 아픈 화려함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의 활기가 가득해요. 가끔 마을에서 축제나 잔치 같은 게 열리면 북적이는 것도 재미있고요. 며칠 전만 해도 마을에서 결혼식이 열려서 축제 분위기였답니다. 색색의 예쁜 불꽃이 하늘에서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도 구경했어요!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여태껏 본 적 없는 낯선 분위기에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마을에도 잘 적응해서 사람들과 곧잘 어울리게 되었답니다. 마을에 꼭 착하고 친절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짐승보다 못한, 악독한 사람은 없어 보여요. 그토록 바라던 평범하고, 평화롭고, 자유가 있는 그런 삶. 당분간은 사람들 틈에 섞여 이곳에서 지금처럼 살아보려고 해요. 항상 꿈꿔오던 곳이라 북극이 어떨지도 궁금하지만, 여기 생활도 색다른 맛이 있거든요.
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빼먹었네요. 이름도 새로 지었답니다. 그런다고 이때까지의 힘들었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그냥,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처음에는 새 이름이 어색해서 누가 불러도 한 박자 늦게 반응하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적응한 것 같아요. 특별한 의미를 두고 만든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름 자체도 마음에 들고. 하지만 아저씨한테는, 지금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려 해요. 제게 아저씨는 그때 그 시간의 존재로 남아 있고, 아저씨 역시 그때의 저를 기억할 테니까. 까뜨린느는 제가 격투장을 나올 때 죽었어요. 그러니 이제는 아저씨가 유일하게 ‘까뜨린느’를 기억하고 있는 셈이네요.
자, 봐요. 나는 이렇게 씩씩하게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북극에서, 아니 북극이든 아니든 지금 있는 곳에서, 제대로 된 이름을 갖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유독 하늘도 맑고 별도 잘 보여서 밤하늘을 보다가 아저씨 생각이 나기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밤을 꼴딱 새워버렸네요. 곧 해가 뜰 것 같아요. 오늘도 평소처럼 일하러 가야 하니까 이만 끝맺을게요.
언젠가, 북극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안녕. 까뜨린느로부터.
그는 조용히 편지를 다시 원래 모양대로 말았다. 그러고 보면 그도 도망자 생활을 하던 중 격투장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했던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는 것만 말하고, 그곳에서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아 추측만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뿐이었다. 편지의 발신인이 의도한 수신인이 맞는지 진위를 확인해줄 수 있는 당사자도 없는 지금에 와서는 영원히 의문으로 남겨둘 수밖에.
한참 동안 길게 말린 채 손에 쥐인 편지를 노려보며 눈싸움을 하던 그는 파도가 미치지 않는 거리의 모래 틈에 앉혀두었던 병을 바닷물에 헹구어 챙겼다. 물론 종이가 젖지 않도록 편지와는 다른 주머니에. 병에 넣어 다시 바다에 띄우려 해도 이미 마개는 부스러졌고, 의도치 않게 남의 편지를 읽은 셈이었으나 채 닿지 못한 여정을 도울 수는 있을 듯했다.
가만히 서서 주인 잃은 편지를 보느라 깊게 팬 발자국은 지는 해를 물고 철썩이는 파도에 이내 지워졌다. 언제 흔적이 남았냐는 듯 어느 새 말끔해진 모래 위로는 뚜렷이 방향을 가진 자국이 찍히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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