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작업물

Complete

오페라의 유령 - 에릭 드림 / 1만 자, 오마카세

어느 날 갑자기, 봄밤 내리는 부슬비에 젖어든 옷자락을 알아채듯이. 에릭은 문득 그의 연인이 베풀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감히 짐작할 수 있다. 매번 숨 쉬듯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무거운 증명이었는지. 에릭은 약지에 자리잡고 있는 반지를 가만히 어루만진다. 내리깔린 그의 시선이 품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앤에게로 옮겨 간다. 세상모르고 꿈결을 헤매고 있는 연인의 얼굴에 걱정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지만, 겉보기에 평온하다고 해서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을 터. 에릭은 그녀가 포기한 것들의 목록을 머릿속으로 나열한다. 그러나 이렇듯 셈을 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그는 귓가에서 속삭이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무시하려 애쓴다. 모든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는 합리화 내지 정당화. 사랑한다면 응당 그에 걸맞는 값을 치르고 원하는 상대를 얻어냄이 당연하거늘.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간 앤을 위해 자신은 무엇을 감수했는가. 그는 아직까지 연인에게 스스로 얼굴을 드러낸 적조차 없다.

에릭은 그간 자신이 소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연인에게, 또한 뮤즈에게. 그러니 아침이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빼곡한 음표로 오선을 채우리라. 그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는 무엇보다 음악의 것이요, 그러니 보답을 위해서는 제일 빼어난 결과를 취할 수 있는 수단을 택함이 마땅하다. 단지 하나의 악곡이 아니라 수신인을 명확히 두는 세레나데로, 더없이 소중한 이를 위한 사랑의 증명으로써. 그 노래는 그들 연인을 또다른 분기로 데려가는 기점이 될 것이다. 특별한 계기나 구실 없이도 그의 안에 내재되어 일렁이는 사랑의 불길은 이렇듯 에릭을 결심케 한다.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 더 망설이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는 끝내 앤에게 청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결정한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새삼스러워진다. 차마 들여다보기도 두려워, 세공이 끝난 지 한참 지나고서도 여전히 서랍 깊이에 숨겨 두었던 결혼반지를 이제는 그 주인에게 꺼내 보일 때가 된 거다. 에릭은 자그만 카나리아를 쓰다듬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앤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긴다. 스스로 새장 속으로 걸어 들어온 그의 작은 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었다.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으려면 문득 시끄럽게 쿵쾅대는 제 심장 소리가 여실히 느껴진다. 이러다간 앤의 단잠을 깨울 수도 있겠다 싶어, 에릭이 헛웃음을 짓는다. 한때 오페라하우스를 쥐고 흔들던 그 악명 높은 유령이 어쩌다 이렇게 물러졌단 말인지. 하지만 에릭은 그런 변화가 싫지 않다. 앤과 함께 여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바깥세상의 일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세간이 무어라 떠들어 댄들 그의 곁에는 이미 헌신이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은 지지와 사랑을 보내는 연인이 함께 있으니, 알 게 뭔가. 에릭은 재차 앤을 보듬어 안는다. 품에 가득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나면 비로소 아침이 올 거였다.

 

*

 

앤은 묘하게 긴장해 있는 듯한 에릭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평소와 다르게 고조된 상태가 영 낯설면서도 이상했다. 평소라면 차분하기 그지없던 사람이 물잔을 엎을 뻔하기까지 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하룻밤 사이에 무슨 사건이 생겼을 리는 없는데, 해 봐야 악몽에 시달렸다는 가설 정도가 유효하겠으나 그렇다기에는 안색이 지나치게 좋았다.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서두르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앤은 허둥지둥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에릭을 불러세운다. 가벼운 손짓에도 화들짝 놀란 그가 급하게 뒤를 돌아본다.

“무슨 일이오?”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요. 오늘 좀 이상하잖아요.”

“……내가?”

멀뚱한 표정으로 앤을 내려다보던 에릭이 곧 시선을 피한다. 뒤늦게 사춘기를 겪는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에릭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저 급히 완성해야 할 음악이 있어 며칠 바쁠 거라고만 일러둘 뿐이다. 결정을 마친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낯간지러운 설렘뿐이다. 혹여나 그녀가 거절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한켠에 밀어 잠재워 둔다. 예전이라면 마음만큼 쉽게 되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이미 어떤 믿음의 곁에서 오랜 세월을 함께해 왔다. 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 그들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것처럼. 에릭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다.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앤은 못이기는 척 어깨를 으쓱인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어련히 알려주겠거니 하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매몰찬 거절도 아니었으니 구태여 매달릴 이유도 없었다. 앤은 거의 뛰어가다시피 사라지는 에릭의 뒷모습을 물끄럼 보다가 결국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저러다 넘어질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에 잔소리하던 게 있는데.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는 몰라도 알아서 잘 하겠지 싶어 앤은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그렇잖아도 에릭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던 참이었다. 침실에서도 고스란히 들리는 그 선율은 귀 기울이고 있으면 더없이 충만한 감각을 가져다 준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건 이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수식이지 싶다. 그러니 이번에도 에릭은 세상 가장 뛰어난 곡을 완성해낼 거다. 가서 응원이라도 해 줄까, 하다가도 몰려오는 졸음에 앤은 누운 채 눈만 깜빡인다. 먹고 바로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달리 할일이 없기도 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중요한 마감이라니, 오페라하우스를 또 뒤집으려는 건가. 어느 쪽이든 앤은 관여하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훌륭한 음악을 지하에서만 듣는 건 조금 아까운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걸 위했지? 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무래도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것은 에릭뿐만이 아닌 듯 싶다. 아직까지 지하의 모든 통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앤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에릭을 아주 침대에 묶어 두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속한 무엇 하나 허투루 낭비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 당연할진대, 하물며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음악을 남에게 나누어 줄 생각을 하다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했다. 얼른 마음을 고쳐먹은 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도대체 그 노래의 용도가 뭔지는 몰라도, 가만히 누워서 기다리느니 가서 훼방을 놓는 편이 나았다.

 

한편 에릭의 악보 위에는 단 한 줄의 주조음만이 아주 헐거운 형태로 그려져 있다. 곡을 쓸 때에 이렇듯 확신이 없었던 적은 그에게도 처음이다. 영감이 메말라 있다기보다는 도리어 과하게 흘러넘쳐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혼란스럽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들의 고난과 사뭇 다른 데가 있지만, 어쨌거나 에릭은 머릿속을 휘도는 선율 중 무엇 하나도 섣불리 옮겨 적지 못하고 멍하니 여백을 바라볼 뿐이다. 아예 전부 다 쏟아내 볼까. 그랬다가는 가지고 있는 오선지를 죄다 써버린대도 모자랄 것 같다. 이런 레퍼토리라면 평생을 매진해도 소진될 일이 없겠군. 감개가 무량한 것과 별개로 당장의 작업에는 도움되지 않는 감상이었다. 에릭은 깃펜 쥔 손을 잠시 늘어뜨리고 눈을 감는다. 처음부터 차근히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그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기억에 대해 말하려면 그녀와의 첫 대면보다도 저 검은 호수 안으로 잠겨들었던 밤을 재차 불러와야 할 터. 실제로는 조금쯤 더 발랄한 장면이었을지 몰라도, 그 순간을 회상하는 에릭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누군가의 목숨을 저울에 수도 없이 올렸던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듯, 증명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처럼 어둔 물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던 그 때에 제가 얼마나 사무치도록 괴로웠었는지. 온 생애에 걸쳐 간절히 부르짖은 사랑을,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생명의 가치를 처음으로 실감했던 그 날. 그는 차라리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고 싶었다. 물속에서 그녀를 건져올린 것은 자신이건만 동시에 차가운 공허로부터 바깥의 진짜 세상으로 끌어당겨진 것도 그 자신이다. 구원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 없는 어떤 안배, 불가항력, 운명…… 그러나 신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들 각자가 오롯이 매달려 쟁취해 낸 사랑. 모든 것이 신의 뜻이었다는 말로 폄훼하기에는 너무도 필사적이었던 시간들을 건너 지금까지. 허공에 힘없이 걸려 있던 에릭의 손끝이 힘을 되찾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갈 길도, 도착할 끝도 모르고 내달리는 선율이더라도 일단은 출발해야 뭐라도 된다. 알 수 없는 종착지를 향해 가는 것은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펜촉 끝에서 하나둘 음표들이 피어나고 있다. 서곡은 느리고 무겁게, 라르고Largo로 시작한다.

 

앤은 멀찍이 모닥불 곁에서 에릭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구 방해를 하겠다던 결심은 어디로 갔는지,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그녀는 제법 얌전하다. 평소의 에릭이라면 기척을 느끼고 돌아볼 법도 하건만 모처럼 작업에 몰두한 그는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열심이다. 돌이키면 최근에는 저렇게 바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간 쉬었던 시간까지 모조리 부어넣기라도 하듯 에릭은 분주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과정을 남김없이 지켜보며 앤은 문득 궁금해진다. 자신이 없었던 지난 시간 동안 그를 살게 했던 음악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인물의 화풍이 변화하는 것처럼 음악이라고 그리 다를 바도 없을 텐데. 듣는 귀는 갖지 못했다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 있으니, 아쉬워할 수밖에. 앤은 제가 놓쳐버린 에릭의 과거를 상상한다. 그때 그는 분명히 보다 광포하고 흉악하며 거침없는 모습이었으리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랑을 원했겠지.

에릭의 현재는 그가 바라마지않던 사랑으로 가득하다. 앤의 존재가 지워지지 않는 한 그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앤은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여기에 있다. 그녀는 다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곡에 열중하는 에릭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러운 데가 있다. 순수한 노력으로 빛나는 그의 얼굴은 어쩌면 천진하기까지 하다. 그것을 기꺼이 관찰하며, 앤은 연인의 잠시간 소홀함 같은 것쯤 눈감아 주기로 한다. 어느 무대를 장식할 곡이든간에 그것을 가장 처음 듣게 되는 사람은 그녀 자신일 테니. 그렇다면야 그의 모든 음악은 결국 앤, 자신의 소유임을 이미 아는 듯이. 에릭이 자아내는 음악에 한껏 귀를 기울이던 그녀는 어느새 끝없이 부풀어오르는 온기로 충만해져, 저도 모르게 까무룩 눈을 감는다. 타닥대며 스러져 가는 장작불의 배음이 끊겼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피아노 선율의 틈사이를 절묘하게 채우고 있었다.

 

*

 

사흘 밤낮을 꼬박 매달린 덕에 에릭의 세레나데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앤의 식사를 챙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눈조차 제대로 붙일 여유가 없었으니 그럴 만한 성과였다. 그 탓에 앤은 며칠간 넓디넓은 침대에서 혼자 잠들어야 했지만, 에릭이 아침의 에스코트만큼은 빼놓지 않고 챙기고 있었으므로 그녀 입장에서도 더 붙일 말은 없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 구태여 기세를 꺾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 음악의 용도마저 물어본 적이 없네, 앤은 반짝이는 포크를 쥐고 멍하니 생각한다. 어차피 물어 봤자 또 어려운 말만 잔뜩 늘어놓을 테니 별 의미는 없으려나. 설명을 요구한다면 에릭은 기꺼이 그렇게 해 줄 테지만, 앤의 판단으로는 그럴 시간까지 아껴서 작업을 빨리 끝내도록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희미하게 이어지던 선율은 어느덧 제법 풍성해졌다. 그것은 평소의 에릭이 상연하던 오페라와 달리 낭만적인 구석이 많다. 이런 음악이 극장에 울려 퍼진다면 다들 놀라서 뒤집어질 게 뻔하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아름답게 만개한 장미 다발이나 다름없는 음악이라고, 습관처럼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앤은 모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분홍과 노랑이 서로를 물들이듯 어우러지며 피어난 여름밤 장미 정원의 이미지가 앤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정원을 비추는 달빛은 차갑지 않고, 가득히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그곳을 거니는 연인에게는 어떠한 방해도 없다. 어디선가 익숙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하면 그들은 춤을 출지도 모른다. 먼 세상의 장면처럼 느껴지지만 글쎄, 그건 과연 멀기만 할까.

앤은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에릭을 보러 가야지. 그러면서 스케치라도 좀 할 수 있다면 더 좋고. 음악이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며 앤은 새삼스레 낯간지러운 기분이 된다. 처음 이 지하로 걸어 들어오던 날의 기억이 선연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을 알았다. 아무리 힘든 길을 걸었대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사랑을 품에 안게 되리라는 것, 더없이 자명한 그 사실을. 앤은 모퉁이에 기대어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에릭을 지켜본다. 그의 모습은 숨이 막히도록 눈부시다.

 

한차례 검토가 끝나고, 에릭은 끝마디의 마지막 음표를 오선지 위에 덧그린다. 페르마타로 끝나는 선율은 그의 손끝이 건반에서 떨어진 뒤에도 한동안 잔여하며 공중에 파문을 일으킨다. 악보 뭉치를 한데 모아 갈무리하는 손길이 잘게 떨리고 있다. 에릭은 뒤쪽에서 서성이는 앤의 기척을 진작 알아챘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한다. 완성된 세레나데를 손에 쥐고서야 뒤늦게 실감이 났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불현듯 엄습하는 공포는 에릭을 다 좀먹지 못한다. 앤이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는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에릭 곁에 주저앉는다. 무엇도 숨기지 않는 말간 얼굴이 그를 올려다 본다. 에릭은 그 앞에서 어느 때보다도 무방비해진다. 그만큼 무력해진다.

“그렇게 열심이더니, 이제 다 끝난 거예요?”

“……그대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군.”

언뜻 동문서답이었지만 앤은 정말로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면 뭐가 그렇게 급해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내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랬냐는 듯 멀뚱해진 그녀를 보며 에릭이 쓴웃음을 짓는다. 한번 마음먹으니 기다릴 수가 없더군,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은 이제야 후련하다는 것 같기도, 꼭 그만큼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들어 주겠소? 에릭은 더 망설이지 않기로 한다. 곡의 완성과 함께 바로 전해줄 수 있도록 며칠 내내 품에 지니고 있던 반지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진다. 앤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앤이 피아노 건너편, 그녀를 위해 마련된 자리로 가 앉는다. 답지 않게 바짝 긴장한 에릭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덩달아 입이 마르고 가슴이 뛰는 것 같다. 기분만이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앤은 준비됐다는 듯 에릭을 향해 살풋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에릭의 눈꺼풀이 옅은 숨소리와 함께 내리감겼다가 다시 뜨인다. 선명한 금빛으로 타오르는 눈동자가 건반을 향한다.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뒤바뀐다.

 

에릭은 악보를 넘기지 않고도 유려하게 연주를 이어 나간다. 수백 번 고민을 거듭하며 써내려간 선율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완벽한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느리게 시작되었던 음악은 문득 급박한 리듬으로 변주되었다가, 다시금 완만하게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고유의 패턴을 이룬다. 그 흐름에 집중하는 동안 앤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들의 지난날을 회상한다. 단지 일방적인 믿음, 그것 하나로 이루어낸 사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에릭을 위해 존재할지 모르는 더 나은 선택지를 경계하며 염려하고, 둘의 세계가 완전히 맞물릴 수 없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이해도 분명 있다. 비극에 걸맞도록 설계된 이야기의 구조, 그렇게 부여받은 불행을 떨쳐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움츠려 지내던 나의 주인공.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나는 기어이 손에 쥐었다고. 앤은 셈여림에 따라 한껏 옹송그렸다가도 다시금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듯 하는 에릭의 연주를 본다. 그는 음악의 곁에서 가장 자유해 보이고, 지금 이 순간 그의 음악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녀 자신이다. 어려운 용어 같은 건 하나도 모르지만, 그가 써낸 선율이 그녀의 마음에 닿아 울렸다고 말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에릭의 노래는 촛불의 빛으로 환한 지하를 가득 메우며 흐드러진다. 그렇게 만개했다가 다시금 잦아들기 시작하는 멜로디, 보다 섬세하고 차근한 진행 위로 에릭이 부르는 허밍이 희미하게 올라탄다. 끊어질 듯 이어져나가는 그의 음성은 마치 흐느끼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울음인지 웃음인지는 둘 중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확정되기 전에 세레나데는 끝난다. 가볍게 떨어진 터치가 건반을 벗어나 허공에 잠시 머무른다. 한동안 숨을 몰아쉬던 에릭이 아직 한참 여운 속에 가라앉아 있는 앤에게로 다가간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그가, 떨리는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앤의 손을 조심스레 찾아 쥔다. 그녀의 여린 손끝에서 서느런 온기가 옮아드는 것을 온전히 느낀다. 참아 왔던 눈물이 그제야 뺨을 타고 흐른다. 고개 숙인 채 말없이 바닥을 적시던 에릭은 저를 감싸안는 앤의 손길에 기대어 고개를 든다. 일렁이는 황금빛이 새카만 심연 속에 잠겨든다. 앤은 잠자코 에릭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 노래를 만들었소.”

요동치는 호흡을 힘겹게 갈무리하며 에릭이 말한다. 듣기에 더 좋은 문장을 공들여 벼릴 수도 있겠으나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인들 그녀 앞에서 끝내는 모두 윤색되어 소용없을 것을 알았다. 그러니 이제 해야 할 말은 단 하나뿐. 처음 목적했던 그 이야기를 꺼내어 건네기만 하면 되는데. 사시나무 떨듯 요동치는 에릭의 몸을 앤은 가득 보듬어 안는다. 이렇듯 겁먹은 모습을 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마냥 짜릿하지만은 않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앤은 흠뻑 젖어든 에릭의 눈가를 조심히 매만진다. 무엇이든 괜찮으니 말해 보라는 위로인 동시에 허락이었다. 에릭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품속을 뒤진다. 까만 새틴으로 단정하게 마감된 케이스가 간신히 들려 나온다. 그가 그것을 연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마련된 샛노란 다이아몬드가 황홀할 정도로 부신 빛을 반짝인다. 하지만 앤에게는 그 찬란한 반짝임보다도 눈물 젖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에릭의 눈동자가 더 아름다운 것이 당연하다.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앤이 참았던 숨을 터뜨린다. 웃음과 울음 섞인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오고, 에릭은 그 환성을 더없이 벅찬 마음으로 듣는다. 그의 삶을 집어삼키려 도사리던 어둠은 이제 없다. 부지불식간에 품속으로 날아든 까마귀 한 마리가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마침내 그가 묻는다. 그의 연인에게 간절히 청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될 줄을 알고서 내내 기다려온 것처럼,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버텨내며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내 모든 것이 이미 그대의 소유요. 그러니 부디…… 나와 결혼해 주겠소?”

앤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 숙여 그에게 입 맞춘다. 눈물 섞인 키스가 끝난 다음이면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왼손을 내민다. 어서 결혼반지를 끼워 달라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그를 위한 확증이었다. 에릭은 오랜 시간 그녀의 약지에 자리하고 있던 약혼반지를 조심히 빼낸다. 휘황한 빛을 흩뿌리는 예물이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전보다 묵직해진 무게감이 현기증 속에서 부유하던 그녀를 일깨운다. 한참 반지를 들여다보던 앤은 시큰한 눈가를 문지른다. 만약 이게 전부 하루아침에 깨져 버릴 단꿈이라면, 어느 순간 또다시 원래의 현실로 내쫓기게 된다면 어쩌나. 그 때에도 이 왼손의 증명만으로 버텨낼 수 있을까. 바라던 세상 전부를 가졌음에도 안심할 수 없는 지금, 앤은 이제 만족을 모르게 된 자신이 두렵다. 그것마저 꿰뚫어보듯 에릭의 눈이 고요히 일렁인다. 그러나 서로의 두려움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또한 서로뿐이라는 사실 역시 그들은 알고 있다. 앤의 젖은 얼굴을 에릭이 옷소매로 가만가만 닦아낸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깊이 뒤엉키는 시선 속에서 그들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찾아낼 수 있다. 그러기를 원하는 한 우리는 언제라도 함께일 거라고, 입안에서 맴돌던 말들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내려앉는 입맞춤에 녹아내린다. 그들은 서로를 힘주어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이제는 어엿한 부부가 될 두 사람이 아프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