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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 - 바이런 드림 / 4천 자

쏘―냐. 말끝을 늘어뜨리는 그 특유의 어조가 귓가에 껌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를 보지 못한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하필 목소리만큼은 왜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고개 숙인 쏘냐의 얼굴 위로 갈색 곱슬머리가 쏟아져 그늘을 드리웠다. 차갑게 식은 발코니의 난간이 화를 삭이느라 열 오른 피부를 식힌다. 여름밤치고 제법 서늘한 날씨였다. 지나치게 맑은 하늘 위로는 점점이 박힌 별들이 기분 나쁠 만큼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난간에 한참 이마를 붙이고 있던 쏘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또, 쏘―냐.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렇게 그리운 것도 아닌데 환청까지 듣다니 꼴사납구나. 쏘냐는 인상을 한껏 찌푸린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지. 등을 돌리려는데 시야의 끄트머리에 뭔가 희멀건 것이 걸렸다.

쏘―냐!

주춤, 걸음이 멈춘다. 공중에서 하얗게 흔들리는 것은 분명 누군가의 소맷자락이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여긴 이 층인데. 의심 어린 눈동자가 발코니 아래를 향한다. 난간에 거머리처럼 매달린 바이런이 거기 있었다. 기겁한 쏘냐가 그에게 달려갔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난처한 척 웃는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여기서 시체를 치워야 할지도 모르니까. 곤란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나 짜증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 역시 거짓말이라서. 쏘냐는 바이런을 끌어올려주는 대신 찡그린 낯으로 팔짱을 낀다. 이게 아닌데, 진짜로 당황한 것 같은 기색이 그의 잿빛 눈에 어린다. 일단 찾아와 얼굴을 보면 뭐라도 좀 해결될 줄 알았나. 빤한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불쾌했다. 고작 이 층에서 떨어진다고 목숨줄이 끊어지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붙는다. 점점 험악해지는 쏘냐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던 바이런이 짐짓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올라가서 얘기하면 안 되겠어?

쏘냐는 결국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애초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난간을 타넘고 올라온 그의 어깨를 세게 밀친다. 한껏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얼굴을 이번에야말로 후려치고 싶었는데, 쏘냐는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을 그냥 내렸다. 때려줄 가치도 없었다. 매달려 있느라 지쳤는지, 원래도 창백하던 납빛 뺨이 오늘따라 더 희게 질려 있었다. 그를 쏘아보던 시선조차 거둔다.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걸음은 한 발 내딛기 무섭게 가로막힌다. 순식간에 몸을 비집고 들어와 코앞에 버티고 선 바이런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쏘냐는 이를 악문다. 그를 피해 다시, 다시 걸음을 뻗을 때마다 그가 쫓아왔다. 춤이라도 추듯 제자리에서 주춤주춤 맴도는 꼴이 우습다기보다 짜증스러웠다. 사실은 화가 났다. 폭발하려는 쏘냐의 손을, 바이런은 가볍게 잡아 쥔다. 닿았다는 사실조차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몸짓.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쏘냐가 멈춰선 사이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춤출까, 우리. 쏘냐는 대번에 거절한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바이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꽉 말아쥔 채였던 그녀의 손을 가만가만 펼쳐 잡을 뿐이다. 맞붙은 손바닥에서 손바닥으로 미미한 온기가 옮았다. 한때는 이 따뜻한 손을 영영 잡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나지막한 허밍이 발코니에 울린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멜로디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맞잡은 손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따뜻했고 지금만큼은 오롯이 저를 향하고 있는 잿빛 눈동자 또한 그러했으므로. 저도 모르는 사이 스텝을 따라가며, 쏘냐는 바이런의 시선을 피한다. 꺼진 모닥불 같은 눈동자 대신 난간 너머 우거진 수풀 사이를 노려본다. 시원한 밤바람이 뺨을 스쳤다. 몸이 한 바퀴 빙글, 돌며 머리칼이 둥글게 날렸다. 쏘냐를 다시 받아 안은 바이런의 눈길이 지긋하게 내려앉았다. 거 봐, 나쁘지 않잖아.

나쁘지 않다니 대체 뭐가? 반문보다 발이 먼저 나갔다. 기어코 구두굽으로 바이런의 발등을 내리찍은 쏘냐가 다시 힘주어 팔짱을 꼈다. 그와의 재회가 조금도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마냥 반기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지금도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하고 대뜸 춤부터 추지 않았나. 하지만 굳이 사과를 요구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서, 쏘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이런이 먼저 항복했다. 양 손을 들어올린 그가 애원 섞인 투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쏘냐가 대답한다. 남작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러면? 경멸하죠. 틈을 주지 않고 대꾸한 그녀는 재빨리 입을 꾹 다문다. 바이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단히 오해한 것 같네……. 때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함께 아스라이 흩어지는 목소리가 어쩐지 슬픈 듯도 하다. 그러면 이제 더 볼 것 없다는 듯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바이런을, 쏘냐는 저도 모르게 잡아세웠다. 저기, 바이런 남작.

막을 새도 없이 뱉어진 말을 주워담고 싶다. 그런 생각까지도 꿰뚫어본 바이런이 기다렸다는 듯 돌아서 눈을 휘며 웃었다. 내게 할 이야기가 있어? 방금 전의 쓸쓸한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금세 화색이 도는 뻔뻔한 낯짝에 쏘냐가 한숨을 삼켰다. 마음을 바꾸기로 한다. 굳이 이런 날, 이런 때에 분위기를 잡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바이런의 곁에서 무르익기에는 아까운 밤이었다. 쏘냐는 팔을 뻗어 발코니 너머를 가리킨다. 의문 어린 잿빛 눈동자가 반문했다. 깜빡이는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정문으로 걸어나갈 생각은 아니겠죠? 다음날 어떤 끔찍한 추문이 거리를 메울지 생각해 봐요. 몰래 숨어 들어왔다면,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나가도록 하세요. 이어지는 쏘냐의 목소리에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진심이야? 바이런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물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눈에 힘을 잔뜩 준 쏘냐가 다시 한 번 발코니 너머를 가리켰다. 바이런은 별 수 없이 어깨만 으쓱인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결코 굽히는 법 없다는 것 또한. 바이런은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겨 발코니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렇게 무작정 몸을 던지면 위험할 텐데, 시야에서 훅 사라지는 바이런을 쫓아 쏘냐가 난간에 바짝 기댔다. 쿵, 둔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는 한동안 사방이 조용했다. 설마 머리를 부딪힌 건 아니겠지, 걱정을 한가득 집어먹은 쏘냐가 입술을 말아물었다. 아래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면 어느새 바이런이 다시 튀어나와 웃는다. 달빛 아래로 거리낌 없이 걸어나오는 그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놀랐어? 장난 섞인 말투가 귓가를 간질인다. 멀리 풀벌레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푸른 초목 사이에 버티고 서서 저를 올려다보는 바이런이 문득 낯설어 보인다. 그의 입가에 맴돌던 웃음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없다. 어느 때보다도 올곧은 듯한 저 눈빛조차도 결국 한여름밤이 몰고 오는 착각일까. 쏘냐는 그를 오래 바라보지 못한다. 도망치듯 침실로 달려 들어간다. 이불 자락을 품에 끌어안고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무엇이 원망스러운지도 모르고 그저 가슴이 답답해서. 단 한 가지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쏘냐는 커튼을 둘러친다. 촛불을 모조리 불어 끈다.

순식간에 어둑해진 창가를, 바이런은 아직 지켜보고 있었다. 쏘냐가 편히 잠들지 못하기를 바라는 심술궂은 마음으로. 무리한 탓에 다리가 저렸지만 지금은 어쩐지 고통조차 멀게 느껴졌다. 흔해빠진 병증보다야 더 중요한 것이 있지. 그러고도 한참을 정원에서 서성대던 바이런은 새벽별이 다 질 즈음에야 걸음을 떼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에는 이 마음도 매듭지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일단 묻어두기로 하고. 내일 다시 올까, 차라리 꿈 속에 초대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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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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