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인 불명
뮤지컬 배니싱 / 2천 자
명렬은 연구실 한켠의 해골 모형에게 습관적으로 말을 붙인다. 명순아, 나 왔어. 이름까지 지어 두고 정성스레 닦아 가며 관리하는 모형과의 대화는 늘 이렇듯 간단한 안부 인사로 시작된다. 실은 일방적인 토로에 가까운 그 대화란 것이 날마다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명렬 혼자서만 모르는 일이다. 얘깃거리야 항상 시답잖은 것들뿐이지만 달리 털어놓을 데도 없고, 자꾸 이렇게 말을 걸다 보면 어느 날엔 이 앙상한 친구가 정말로 대답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잠깐이나마 즐거울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생각이다. 의신이 쓰는 의자를 차지하고 앉은 명렬은 주인 없이 텅 빈 연구실을 한 바퀴 휘 둘러본다. 잠깐 뜸을 들이던 명렬이 곧 의자 하나를 더 가져다가 모형을 앉혀 놓는다. 그리고 불평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오늘도 허탕이네. 의신이 형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요즘 진짜 이상해, 낮엔 잘 보이지도 않는데 밤에는 또 몰래 나다니는 것 같단 말이지. 걱정되게 자꾸 어디로 사라지는 건지 모르겠네. 형은 나한테 신경을 좀 더 쓸 필요가 있어. 응?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명순이 너밖에 없다. 잔뜩 허탈해하던 명렬의 얼굴에 금세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어린다. 양 손으로 정성스레 해골을 붙잡고 고개 끄덕이는 시늉을 대신 해 주다 보면, 명렬은 어쩐지 그 텅 비어 있는 눈구멍을 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침 적당한 물건이 있다. 이 선글라스 어때, 명순아. 우와. 잘 어울린다! 형도 다녀와서 보면 멋있다고 할 거야. 오늘은 혼자서 뭐 했어? 계속 서 있느라 힘들지는 않았어? 이따 형 만나면, 나 없을 때도 너 잘 챙겨 주라고 할게. 어때. 내가 최고지. 명렬이 혼자 주절대는 사이, 의자에 반쯤 걸려 있던 해골 모형의 자세가 조금씩 미끄러지며 명렬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모양이 된다. 과제가 너무 많다느니 시험 성적이 걱정이라느니 한참 떠들던 명렬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향해 기울어진 채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해골을 똑바로 앉혀 놓는다. 아니, 얘가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나 좀 봐, 명순아.
듣고 있어?
대답 없는 해골 모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렬은 흐트러진 정장 재킷을 잡아당겨 매무새를 고친다. 말끔하게 빗어넘겼던 머리칼이 자꾸만 허물어져 눈가를 간지럽힌다. 불안으로 잘게 떨리는 손아귀에는 방금 전까지 쥐고 있었던 수화기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신경질적으로 제자리를 맴돌던 명렬이 모형을 재촉한다. 듣고 있으면 대답 좀 해 봐, 명순아. 너도 나 무시하는 거야? ……미안, 말이 좀 헛나갔다. 넌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인데. 미안해. 내가 많이 예민해졌나 봐. 의신이 형이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난 아직도 구제불능인 것 같아. 드디어 기회를 잡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난 그냥, 그냥 뭐든 좀 더 잘하고 싶었을 뿐이야. 명순아, 너는 내 심정 다 알지? 내가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해 왔는지도 알지? 그런데 왜 아무 말이 없어. 다 괜찮다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러나 입도 혀도 없는 해골 모형에게서 대꾸가 돌아올 리 없다. 머릿속에서 곧잘 꾸며내곤 하던 명순의 발랄한 목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는다. 바짝 맨 넥타이가 목을 죄는 것 같아, 명렬은 겨우 손을 움직여 숨통을 트이게 한다. 명순아. 명렬이 나직히 부른다. 의신의 개인 물건을 거의 들어내 살풍경해진 연구실 안에 겨우 남아 있는 것은 오래된 실험용 집기들 몇 점과 명렬의 오랜 친구, 해골 모형뿐이다. 명렬은 한참이고 명순을 들여다본다. 기껏 씌워 주었던 선글라스는 어디로 가고 없고, 공허한 어둠만이 명렬과 눈을 마주친다. 명렬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울음을 이를 악물고 참는다. 비틀대던 걸음이 끝내 허물어진다. 해골 모형이 명렬의 성마른 손에 붙잡혀 힘없이 흔들린다. 대답할 이 아무도 없건만 명렬은 도무지 말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너까지 날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어떤 마음인지 너는 다 이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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