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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 에릭 드림 / 2만 자, 오마카세, 빠른마감

모처럼 시내 나들이에 신이 난 앤은 피앙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룻배에서 훌쩍 뛰어내린다. 새로 갖춰 입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산뜻하게 휘날린다. 앤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혼자서 외출하는 건 그만큼 흔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부터 지상으로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기분이 안 나니까. 기왕이면 배를 타고 나오는 편이 더 근사하기도 하고. 그때까지도 영 탐탁잖은 표정으로 앤을 바라보고 있던 에릭은 마지못해 손을 흔들어 그녀를 배웅한다. 외진 길로 다니지 말고, 거리의 시정잡배들과는 말도 섞지 마시오. 무엇보다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아와야 하오. 한참 잔소리를 늘어놓고도 미련이 남는지, 얼른 떠나지 않고 미적대는 에릭을 향해 앤이 해사하게 웃는다. 내가 무슨 열 살짜리 어린앤 줄 알아요? 다녀올게요. 발끝으로 뱃머리를 꾹 밀어내며, 앤은 연인의 귀가를 재촉한다. 이럴 때면 누가 더 아이 같은지 모를 일이다. 차박대는 물소리를 내며 나룻배는 지하의 깊은 내부를 향하여 다시 멀어져 간다. 에릭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사라진다.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런 외출은 아직까지 앤 혼자만의 몫이었다.

 

1861년의 파리는 언제나 생각보다 낭만적인 모습이다. 이곳에 드나든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늘상 지하에만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앤이 거리를 구경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종종 에릭의 안내를 받아 누비고 다녔던 오페라 가르니에의 구조마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였으니. 그리하여 파리 도시의 모습은 늘 앤에게 생경한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마차가 길 한복판을 내달리는 풍경, 실크햇을 쓴 신사들의 팔을 붙잡은 채 풍성한 프릴 달린 드레스로 바닥을 휩쓸고 다니는 숙녀들의 모습까지도 그녀에게는 새롭고 신기한 자극이다. 다음에는 에릭에게 양장점을 소개받아야겠다고, 방금 곁을 스쳐간 마드모아젤의 드레스를 상기된 뺨으로 바라보며 앤은 생각한다. 저렇듯 공작새의 깃처럼 검푸른 광택이 도는 옷감은 이십일 세기에서는 흔히 구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에서만 가능한 일들이 있듯 이 시절에도 역시 마찬가지인 법이다. 비록 이미 지나간, 혹은 애초부터 실제로는 존재한 적 없었던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검은 진주와 스피넬을 엮어 만든 장식이 앤의 머리에서 반짝인다. 그것이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도록 매무새를 고치며, 앤은 얼마간 들고 있었던 양산을 접어 왼팔에 걸친다. 조만간 비가 오려는지 햇볕이 그리 강하지 않았거니와 붐비는 거리를 그대로 쏘다니기에는 거추장스럽기도 했다. 우선은 잡화점에 들러서 레이스를 몇 줄 사야지. 그다음엔 물감이랑 화집 구경도 좀 하고, 지난번 먹었던 바게트 샌드위치는 어느 가게 거였더라? 한껏 들뜬 얼굴로 거리를 누비는 앤의 말간 낯 위로는 곁을 지나는 행인들의 시선이 심심찮게 날아든다. 한눈에 보기에도 앳된 이목구비, 이방인, 그리고 혼자. 시대에 걸맞는 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어딘지 배경에 녹아들지 못하는 이질감이 그녀의 주위를 두르고 있다. 그러나 뭇 사람들의 눈초리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앤은 오늘의 할일 목록을 하나씩 차근히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에릭이 챙겨 준 여비는 반나절 유희를 위한 것치고는 다소 과한 면이 있었지만. 그를 위해 가지고 돌아갈 선물을 고르다 보면 지갑은 순식간에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기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 스스로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에릭에게 어울릴 만한 행커치프를 고민하며 앤은 슬몃 미소를 머금는다. 한켠에 먼저 골라 놓은 넥타이핀을 포장하던 점원이 남편분 선물인가 봐요, 너스레를 떨었다. 무심한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앤은 좀처럼 웃음을 숨길 수 없다. 오늘따라 왼손 약지에 자리한 반지의 존재감이 여실하다.

한참이나 선물을 고르고 나선 잡화점 바깥은 어느새 우중이다. 그렇잖아도 흐리던 하늘이 새카만 먹구름으로 뒤덮여, 아직 오후 다섯 시가 못 된 시각인데도 거리는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곳곳에 우산을 들고 뛰어가거나 서둘러 마차를 잡아 타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지고 있던 양산이나마 겨우 펼쳐 들며 앤은 곤란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양산치고 천이 제법 두꺼우니 당분간 버텨 주기야 하겠지만, 에릭이 머무는 지하까지 돌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종이로 포장된 선물들이 죄 젖어 버릴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듯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거리를 홀로 배회할 수도 없고, 근처의 선술집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에도 곤란한 일이다. 에릭이 알면 한바탕 잔소리를 해 대겠지. 혹시라도 데리러 와 주지는 않으려나,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뛰어 가? 너무 들떠서 멀리까지 나온 것이 잘못일까. 자책하다가도 앤은 일단 걸음을 옮겨 보기로 한다. 언제까지고 가게 앞에 버티고 서 있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금방 지나갈 소나기 같지는 않았다.

 

앤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걷기 시작한다. 그나마 겉옷을 챙겨 온 게 다행이었다. 지름길을 찾아야 할 텐데. 어쩔 수 없이 에릭의 충고를 무시하고 골목길로 접어들며,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잡는다. 그래도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니 별일이야 없겠지만. 끄트머리에 은방울꽃 무늬 레이스가 달린 양산은 금세 푹 젖어 비가 샌다. 앤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간간이 털어낸다. 분명 에릭과 함께 걸어 본 적 있는 길인데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기서 오른쪽이었던가, 아니면 한 블럭 더 가야 하나? 품에 소중히 챙겨 넣은 선물꾸러미에도 조금씩 비가 스미고 있었다. 정신없이 걸어가던 앤의 발길이 점점 빨라진다. 이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앤은 무언가 까맣고 커다란 덩어리에 어깨를 세게 부딪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녀가 곧장 나동그라진다. 무어라도 붙잡으려고 허우적대던 손안에 눅눅하고 부드러운 실크의 촉감이 감겨든다. 적어도 얼굴을 부딪히거나 선물을 깔아뭉개는 일만은 간신히 면한 앤이 앓는소리를 내며 고개를 든다. 사람인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숙녀를 넘어뜨려 놓고선 사과 한 마디 없다니. 그러나.

“……놓으시오, 마드모아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앤은 순간 호흡을 멈춘다. 선명한 위화감이 그녀를 덮친다. 눈앞에 버티고 선 장신의 남자, 단정하게 눌러쓴 검은 중절모와 발끝까지 뒤덮는 망토. 무엇보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저 가면. 뼈처럼 희고 시린 그것이 빗물에 젖어 기묘한 빛으로 번들거린다. 일말의 온기도 묻어나지 않는 날카로운 황금빛 눈동자가 앤을 관찰하듯 훑는다. 얼룩지는 경멸과 혐오 너머로 이방인에 대해 미약한 당혹감이 묻어난다. 이것은 앤이 모르는 모습은 아니다. 이제는 시간 속 희미해지고 낯설어졌지만, 그와 처음 대면하던 때의 숨 막히는 감각을 앤의 몸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이야기잖아. 반나절 만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골목을 헤매는 사이 또 다른 세계로 내던져지기라도 한 건지. 앤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에릭?”

그러나 눈앞에 선 이는 분명 그녀의 사랑하는 연인은 아니다. 호명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다가선 그가 앤의 목덜미를 한손에 틀어쥔다. 눈 깜빡하는 사이 밀어닥치는 밤의 어둠처럼, 턱끝까지 차올라 흔들리는 바닷물처럼. 금세 숨이 막힌다.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 없는 이름에 대하여,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저항하지 않는 앤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다. 힘겹게 떨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까무룩 감긴다. 앤은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잃는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다.

*

 

쓰러진 여자를 얼떨결에 붙잡아 지탱하면서, 유령은 불안으로 들끓는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다. 어쩌다 이런 이방인에게 정체를 들킨 거지? 아니, 애초에 그녀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기억 속에 존재했던 적 없는 얼굴임에도 느껴지는 이유모를 친숙함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유령은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동시에 그녀 또한 이 세상과 불화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았다. 남의 옷을 가져다 걸친 듯 어딘가 어색한 기류를 품은 여자였다. 몸짓이나 말투, 심지어는 눈빛까지도. 그러니 어쩌면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방인. 유령. 산 자들의 세계에 어울리지 못하고, 영원토록 경계를 떠도는 불행한 운명에 묶인 자.

오늘따라 피부를 스치는 공기가 낯설고 불쾌하다. 혼절한 여자를 한참 내려다보던 유령은 끝내 그녀를 안아들고 빗속을 가로지른다. 그의 안식처는 이곳에서 멀지 않다. 골목의 끝에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있다. 이후의 처분은 그녀가 깨어난 뒤 이야기를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으리라. 이러한 유보는 전례 없는 일이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녀가 괜찮은 새신부가 되어 줄지도. 어쩌면 기적일지 모르는 이변을 어느 때보다도 불편하고 기껍게 여기며, 유령은 어둔 땅속, 그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아래로 깊어질수록 끈적이는 습기와 더불어 차갑고 축축한 물비린내가 짙게 풍긴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이 어두운 호숫가에는 그들을 위해 배가 정박되어 있다. 여자를 먼저 태우고 유령은 뒤따라 노를 잡는다. 그런데 여기가 원래 이런 생김이었던가? 암벽에 들러붙어 자라난 물이끼와 수초의 얼룩, 그리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점 넓어지고 높아지는 통로의 굴곡마저도 오늘따라 생소하기만 하다. 꼭 남의 집에 몰래 찾아온 불청객이 된 것만 같은 기분. 나고 자란 고향보다도 익숙한 곳이건만, 시커먼 물살을 천천히 헤쳐 가는 내동안 유령은 알 수 없는 미시감을 느낀다. 하지만 유일한 은신처에서마저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한다면 그는 대체 어디에 몸을 뉘어야 하는가. 이런 감상에 빠져들고 마는 것을 보아하니, 이제 정말 죽음이 가까워 온 모양이라고 자조하며. 유령은 노를 젓는 속도를 조금씩 늦춘다. 이러나저러나 수면이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이제 곧 도착이다. 여자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마른 가슴팍이 고르게 오르내리고 있는 걸 보면 그저 잠든 것이겠지. 비를 맞았으니 잠시 불가에 두고 곁을 지키는 것이 좋을까, 갈아입을 만한 옷가지 같은 것을 그가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유령의 목에 별안간 밧줄이 날아든다.

거친 올가미가 살갗을 파고든다. 발버둥쳐 봤자 더욱 감겨들 뿐이라는 것을 유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은 유례없이 이상한 하루가 될 모양이지. 잠깐 사이 판단을 마친 그가 재빨리 올가미의 반대편을 붙잡아 당긴다. 숨통을 틀어막는 대신 손에 휘감긴 밧줄이 공중에 팽팽하게 당겨진다. 어쩐지 익숙한 촉감이다. 유령은 이 밧줄의 출처와 사용법을 모르지 않는다. 제가 고르고 손질한 물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어떻게? 반문하는 잠깐 사이, 재차 날아들어 이번에는 허벅다리를 옭아맨 밧줄이 그를 나룻배 바깥으로 거칠게 내던진다. 속수무책으로 끌려 가는 유령을 차가운 호숫물이 흠뻑 적신다. 물속에 넘어진 그가 거추장스럽게 감겨드는 망토를 떨쳐내는 동안, 희끄무레한 형체가 나룻배를 급히 뭍으로 올려 여자를 안아드는 것이 보인다. 익숙한 포엣셔츠 차림의 남자다. 감히 이곳까지 숨어든 선객이 있었나. 수많은 함정은 어떻게 파헤친 걸까. 그런데 저 얼굴. 제 것과 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 그것을 알아본 유령의 사고가 덜컥, 정지한다.

이 순간 곤혹스러운 것은 ‘에릭’ 역시 마찬가지다. 주저앉은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는 경찰의 끄나풀이라기에는 어설픈 구석이 있었고, 그렇다 해서 단지 자신을 사칭하는 작자라고 취급하기에도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지하로 흘러드는 통로의 구조를 알고 있다는 점부터 시작해 옷감의 낡은 부분부분마저 똑같은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 그의 차림새. 무엇보다 그가 덮어쓴 가면 아래에는 거울 속의 반영보다도 선명한 금빛 눈동자와 아마도 흉측한 기형의 외모까지 그대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솔직히는, 에릭은 물속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의 분신보다는 놀라지 않았다. 만약 신이라는 그 빌어먹을 절대자의 실수 또는 농간으로 세계 일부가 뒤섞여 혼재하게 된 것이라면 저자의 존재는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마치 처음 앤이 이곳에 찾아들었던 일처럼. 문제가 있다면 그녀는 본래 이곳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이므로 세계를 덮어쓰는 오류 중에서도 유일무이하다는 점이고, 그녀를 솔로몬의 아이처럼 둘로 나눌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소한 걱정은 차치하자. 우선은 앤의 안위가 중요하다. 저 작자가 무슨 연유로 그녀를 데리고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를 일이겠으나, 당장 넋이 나간 채 쓰러져 있는 그의 처분은 앤의 상태를 살핀 뒤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에릭은 앤을 모닥불 곁에 눕히고 살핀다. 목을 졸린 듯 창백한 피부에 검붉은 잔흔이 얼룩져 있다. 그녀를 모르는 자신이라면 친한 척 다가오는 이방인에게 과격한 처사를 했대도 놀랍지 않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는 그것과 별개의 문제다. 구태여 관대함을 베풀 이유도 달리 없었다. 어차피 이 세계는 ‘내’ 것인데. 같은 생김을, 그리고 과거를 가졌다 해도 결국 그 또한 초대한 적 없는 침입자나 마찬가지다. 그저 앤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며 기다리던 에릭은 곧 그녀가 지쳐 잠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조금 기다리면 그녀는 자연히 깨어날 것이다. 에릭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사이 불청객과 대화를 나누어 볼 심산이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단지 산책을 하기 위함은 아닐 테니. 분신의 등장은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추궁하여 캐내면 될 일이겠지만. 에릭은 다시 물가로 내려간다. 살아 움직이는 그의 거울상이 제게로 다가오는 기척에 첨벙대며 일어난다. 그는 당장이라도 에릭을 후려칠 듯한 기세로 힘껏 노려본다. 그렇게 하면 거짓된 환상이 모두 날아가고 진실만이 남겨지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에릭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그 눈에 비치는 풍경 또한 이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말도 안 돼.”

“무엇이?”

동일한 두 명의 인물이 한자리에 함께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이? 아니면 저기 누워 잠든 앤의 존재가? 반문에도 유령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다. 혼란과 증오가 그의 눈 안에서 일렁인다. 그가 가장 처음 질문한 것은 다름아닌 앤에 관한 것이다. 저 여자는 누구요. 그러면 에릭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나를 살게 하는 유일한 사랑, 내 삶의 이유. 나의 피앙세이며 구원자. 그토록 확신에 찬 목소리에 유령이 절망한다. 일평생 간절히 원했던 단 하나, 그것이 가능한 미래가 제 것이 아닌 세계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없이 비참하게 한다. 그 자신만은 영영 가질 수 없는 사랑. 대체 어떤 자격이 부족하기에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그의 프리마 돈나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죽음보다도 못한 삶이 그를 지난하게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그가 진작 겪어 알듯 사랑은 억지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아니오. 여전히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유령이 씹어 뱉는다. 사랑을 아는 존재는 더 이상 유령일 수 없다. 그는 지상의 빛 아래 어울려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제게 똑바로 향하는 유령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의 참혹한 심정을 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와 자기연민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어느 샌가 불가로 돌아간 에릭은 앤의 곁을 지키는 중이다. 홀로 남아 유령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본다. 확실히 제가 살던 지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여분의 의자라거나 생화로 가득한 꽃병, 레이스 달린 테이블보처럼 곳곳에 여자, 앤이 지내며 남겼을 흔적이 자리한다. 그는 겪어본 적 없는 세상이었다. 무거운 우울이 유령을 사로잡는다. 호수의 잔물결을 바라보며 끝내 죽음을 고민하던 그의 뇌리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다. 가면. 이곳의 자신 또한 같은 가면을 쓰고 있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약속했다면서, 무엇 때문에 아직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 그가 에릭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존재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영영 손에 쥘 수 없는 행복이라면, 모두가 평등하게 고통받아야 한다. 때마침 얕은 기침 소리와 함께 앤이 깨어난다. 밧줄을 떨어낸 유령은 마침내 물 밖으로, 연인이 있는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긴다. 거칠게 찰박대는 물소리. 근처에 부유하던 그의 중절모가 일렁이는 파문을 타고 저편 어둡고 깊은 곳으로 멀어져 간다.

 

깨어난 앤의 시야에 첫 번째로 비치는 것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에릭의 눈동자다. 힘없이 웃으며 앤은 그를 끌어안는다. 여기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제 하나뿐인 연인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다. 에릭은 제게 매달리는 앤을 천천히 토닥인다. 상처가 제법 오래 가겠군.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는 여실한 걱정과 분노가 배어난다. 괜찮아요, 대답하며 앤이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녀는 그들에게로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본다. 당장 있을 곳을 빼앗겼으니 혼란스럽겠지. 하필 여기로 떨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안된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연인에게 사랑이 가능하다면, 저 남자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아니라도 당신을 사랑할 사람은 분명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앤은 저도 모르게 가슴 한켠이 아리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결코 둘일 수 없다. 그녀는 이미 유일의 의미를 나누었으므로. 앤은 유령인 채 살아가는 남자를 감히 동정한다. 그녀의 시선이 제게 향하고 있음을 느낀 유령이 비뚤게 미소한다.

“겁 없는 숙녀분이군.”

그러니 이런 괴물과 결혼까지 약속한 거겠지. 가면 쓴 얼굴을 스스로 쓸어내리며, 유령은 그들을 향해 버티고 서 있다. 당장이라도 저를 찢어 죽이고 싶다는 듯한 표정으로 으르렁대는 분신의 기분 따위야 알 바가 아니다. 어쩌다 이런 상황 속으로 등 떠밀려 들어오게 된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비참과 불행을 눈앞의 연인에게, 그리고 분신에게 돌려줄 수만 있다면. 비록 그러기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부정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하지만 제 살을 깎아내는 일도 그에게는 더없이 친숙한 것이다. 조롱 섞인 목소리가 연인을 향한다. 마드모아젤께서는 아직 괴물의 정체를 모르는 모양이오. 그렇다면야 내가 친히 알려 주지 않을 수 있나. 유령은 그들에게로 더욱 가까워진다. 그의 젖은 몸에서 걸음마다 물이 흘러 떨어진다. 짙은 얼룩이 마른 바닥을 수놓는다. 제 얼굴을 매만지는 그의 손이 가련할 정도로 떨고 있다. 연인은 이제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안다. 경악한 에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가면이 떨어져 나뒹군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공포에 질린 것은 에릭뿐이다. 분신에게 달려들지도, 도망쳐 숨지도 못한 채 굳어버린 그의 곁에서. 앤은 차라리 화가 난 것 같다. 파리하게 질린 그녀의 손이 얼어붙은 에릭의 어깨를 안심시키듯 매만진다. 그녀는 맨얼굴을 드러낸 유령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진 피부와 비틀린 입매가 넘치는 희열을 이기지 못하고 잘게 경련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지도 않는다. 입을 꾹 다물고 유령을 한참 쏘아보던 앤이 그의 정강이를 힘차게 걷어찬다.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한 그가 짧은 신음을 토하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뒤편에서 떨고 있던 에릭이 놀라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앤은 어느새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고 있다. ‘유령’의 사고방식이야 그녀가 진작부터 뻔히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앤은 더 이상 참을 생각이 없다. 이런 식으로 당해주는 건 이제 사양이다.

“지금 장난해요?”

유령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는 앤을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왜 겁먹지 않지? 천사 같던 크리스틴조차 이 얼굴을 보고서는 헛숨을 들이켰었다. 앤에게 걷어차인 다리가 희미하게 욱신거린다. 그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다. 앤은 멍청한 얼굴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유령을 향해 소리친다. 그런 식으로 자길 괴롭히면 마음이 좀 편해요? 당신 인생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줄 알죠? 사실은 미움받고 싶지도 않으면서, 누구보다 사랑받길 원하면서. 지금껏 치열하게 살아온 이유도 그거잖아요. 언젠가는 운명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지상의 빛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숨 쉴 틈도 없이 외쳐 대는 앤을 바라보며, 도저히 유령은 당신이 뭘 아느냐고 따져 물을 수가 없다. 그녀의 걱정 어린 관심이 진실된 마음임을 그는 안다. 동시에 그것이 프리마 돈나가 제게 베풀었던 연민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것까지도. 앤의 어깨너머에서, 에릭은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숨을 죽인다. 그는 언젠가 앤이 제 손을 잡아 빛 아래로 이끌어 주었던 때를 상기한다. 이 순간 그녀는 다시 한 명의 ‘에릭’을 구해 내고 있는 것이리라. 앤의 온정이 타인을 향하고 있다는 데에 질투를 느끼면서도, 에릭은 그 대상이 결국 또 다른 자신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복잡한 심정이 된다. 그녀는 정말로 특별한 이유 없이, 어떤 조건도 없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앤은 어느새 울고 있다. 그녀를 바라보며 동요하는 유령의 모습이 처음 에릭을 만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유령은 그녀가 아주 옛날에 읽었던 모습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그렇게 존재하는 그를 지금까지와 동일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한들 결코 미워하고 증오할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함께 보내 온 시간이다. 앤의 에릭은 그것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그녀가 구한 것이 바로 그이고, 그 역시 그녀를 구했다. 숱한 역경 속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노력은 이 순간 모두의 불행을 원하는 유령의 악의와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다. 그것마저도 당신의 본질임을 알아. 그것을 사랑스럽다고 여기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 자리하는 연인은 분명 변화를 겪었고, 앤은 그렇게 달라진 그의 모습을 사랑한다.

평소와 같은 안색을 되찾은 에릭이 앤을 지탱하듯 뒤에서부터 감싸 안는다. 그가 손을 뻗어 앤의 눈물을 닦아낸다. 그러는 동안 허공에서 멈칫대던 유령의 손이 아무도 몰래 아래로 떨어진다. 시간을 건너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끝내 찾아냈음에도, 이곳에도 역시 그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이런 종류의 확인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지. 유령이 쓰게 웃는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도 에릭은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 같은 과거와 얼굴을 가졌다고 한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다. 그에게 진행형인 고통도 에릭에게는 이미 지나간 갈래의 일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정리되고, 유령은 호수에서 망토를 건져 와 그것을 불가에 널어 놓는다. 그의 중절모는 멀리로 흘러가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어디로든 돌아가기 위해서는 옷차림부터 갖추는 편이 좋았다. 필요하다면 내 것을 하나 주겠소, 모처럼 에릭의 제안에도 유령은 고개를 저어 거절한다. 이 가면으로 충분하오. 아까보다 기운이 빠져 차분해진 목소리가 느릿느릿 대꾸한다. 그러고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 타닥대는 장작 소리가 어색한 고요를 가른다. 앤은 에릭의 곁에 가까이 붙어앉아 그를 곁눈질한다. 내가 너무 심했나, 하던 생각은 그가 가면을 주섬주섬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금방 씻겨 나간다. 그녀는 에릭의 얼굴이 그토록 하얗게 질리는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아무렴 자업자득이지. 합리화를 마친 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데려다 주고 올게요.”

“돌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알고?”

“내가 오가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한번 해 보는 거죠.”

과연 설득력 있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에릭은 내심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혹여그녀가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 염려하는 것처럼. 그러한 속내를 전부 꿰뚫어본 듯, 앤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내 자리는 여기예요, 에릭. 알잖아요. 괜한 걱정 말아요. 에릭이 그녀의 손에 고개를 비빈다. 그 모습을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유령이 앤을 재촉한다. 어서 가지. 더 머물러 봐야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으니. 앤이 멋쩍게 웃으며 에릭에게 손을 흔든다. 다녀올게요. 그리고 그녀가 아직 덜 마른 망토를 둘러쓴 유령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가 당황할 새도 없이 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어진다. 우선 어두운 곳으로 가야 해요. 저쪽 구석 계단이 좋겠네요. 이제 눈을 감고, 내 손 놓지 말아요. 그리고 천천히 걷는 거예요. 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면서. 노래하듯 설명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더없이 달콤하다는 생각. 그보다도 유령은 그에게 돌아갈 곳이 정말 남아 있는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한때 그의 삶을 상연했던 무대는 이미 퇴색되어 무너져가는 중이건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능한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유령은 언제까지나 유령인 채 남아 홀로 외롭게 숨을 거둘 것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그가 끝내 손에 쥘 수 없었던 사랑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신을 저주하겠지. 유령은 손 안에 들어찬 앤의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언제고 버려지고 남겨져야 하는 운명이라니. 콧등이 시큰거린다. 허나 볼썽사납게 눈물이나 흘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떠올린다. 그가 머물던 지하를. 그가 손수 건설한 그의 왕국을. 차가운 공기의 흐름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정말로 그곳에 발을 딛고 서 있다.

수없이 늘어선 촛대가 불을 밝히는 지하. 앤이 알던 곳보다 살풍경하고, 무엇보다 기묘한 한기가 도사리며 뼛속 깊이 틈입하는 여기. 마치 거대한 카타콤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앤은 제가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날을 떠올린다. 검은 호숫물에 집어삼켜질 수도 있었던 그때를.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전환점이자 어쩜 진정한 발단이었을지 모른다. 멍하니 멈춰 선 그녀의 손을 유령은 서둘러 놓아 버린다. 정말 돌아왔다는 것에 대해 놀라워할 여력은 없었다. 무엇보다 괜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테니. 그러면서도 유령은 앤에게 차 한 잔의 말미를 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두 번의 만남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으므로. 그녀를 돌려보내기 전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주겠소? 앤은 그의 부탁을 선선히 받아들인다.

유령이 마련한 티세트는 제법 훌륭했다. 레몬 딜 버터에 얇게 썰어낸 오이를 버무린 샌드위치, 겉면에 초콜릿을 입힌 마들렌 그리고 아몬드가 듬뿍 얹어진 플로랑탱까지. 고작 십여 분만에 이런 음식들을 차려내다니, 어딘가 다과가 나오는 화수분이라도 숨겨둔 걸까. 어떤 에릭이든지 요리에는 능력이 뛰어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음악에 관한 것이야 구태여 말을 얹을 필요도 없을 테지만. 까만 부조 위로 금박을 덧입힌 찻주전자에서 훈김이 피어오른다. 핏빛으로 우러난 홍차가 얄따란 주둥이에서 흘러나와 찻잔을 덥힌다. 앤은 그것을 조심히 집어올려 입가로 가져간다. 따스한 훈연 향이 먼저 풍기고, 뒤이어 고소한 풍미가 혀끝을 간질인다. 차를 홀짝이는 그녀에게 유령이 말을 붙인다. 앤이라고 했소? 어쩌다 세계를 횡단하게 된 건지 궁금하군. 달그락 소리와 함께 찻잔을 내려놓은 앤이 옅은 침음을 내며 말을 고른다. 아무래도 그녀가 원래 속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아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곳이 한낱 인간의 손에 창조된 ‘작품’ 내부의 세계라는 사실은 더더욱. 그러다 보면 앤이 할 수 있는 말은 몇 남지 않게 된다. 그녀가 천천히 말문을 연다. 그냥, 밤길을 걷고 있었을 뿐이에요. 갑자기 이런 침침한 곳으로 떨어져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쉽게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유령은 고개를 끄덕인다. 저 역시 그녀와 함께 세계를 건너지 않았던가. 두 번째 질문은 그녀의 연인에 대한 것이다. 어쩌다 그를 사랑하게 된 거지. 조심스러운 물음에 앤이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이어지는 대답에는 기쁨이 섞여 있다. 에릭, 그러니까 내 남편이 될 그 사람도 처음에는 당신이랑 비슷했어요. 나를 도통 안 믿었죠. 사랑에도 증명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그게 그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는데. 항상 목숨을 걸고 사랑하게 되네요. 멋쩍게 웃는 앤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해사하게 빛난다. 그들의 사랑이라고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란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지. 그래서 제가 영영 추한 채 남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유령은 문득 생각한다. 그들 연애에 얽힌 일화를 낱낱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미래를 약속했다면 응당 결혼이라는 맹세를 나누기 마련이니, 그에 대한 것 또한 더 듣지 않아도 좋았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시련이 있었으리라. 그것마저도 질투하려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유령은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는다. 침울해 보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앤이 한 마디 덧붙인다. 주제넘는 짓일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알려주고 싶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의 기분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니까.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을, 그렇게 끝없는 외로움을. 이미 한 명의 ‘에릭’을 구했다면 다른 한 명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어쩌면 오만과 함께. 그녀가 유령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당신도 ‘에릭’이잖아요.”

내가 아니라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에게 꼭 들어맞는 사랑. 그리고 유령의 눈에서 툭, 눈물 한 방울이 부지불식간에 흘러내린다. 하지만 앤은 손을 뻗어 그것을 닦아 주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유령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앤은 다만 그를 위하여 품속의 손수건을 꺼내어 가만히 내려둘 뿐이다. 그것을 받아드는 대신 옷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유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의 찻잔에 아직 절반쯤 남아 있던 홍차가 출렁인다. 그토록 원했던 단 한 가지. 그것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잠시의 위안 속에서. 앤을 평생 그리워하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은 애써 무시하고, 유령은 이제 그녀를 쫓아 보내야 한다. 건너편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을 분신과 그를 사랑하는 앤에게 남겨진 온건한 미래를 지켜 주기 위해. 이것은 아마 최초이자 최후의 선행일지 모른다. 이런 마음으로 다시 누군가를 대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이 가능했더라면.

“이제 돌아가시오.”

앤은 거절하지 않는다. 잔을 깨끗이 비운 그녀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잘 마셨어요. 희미한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걸린다. 유령은 그것을 못내 괴로운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돌린다. 배웅은 필요 없겠지, 낮은 중얼거림에 앤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은 끝내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고개 숙인 채 굳어버린 그를 지나쳐, 앤은 한켠에 구석진 통로 앞으로 다가가 선다. 눈을 감는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원래의 시간으로, 그녀가 있어야 할 유일한 장소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랑의 곁으로.

*

 

“에릭?”

그는 꺼져 가는 모닥불을 뒤적이며 불쏘시개를 채워 넣던 참이다. 제가 정확한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앤은 마구 뛰어 에릭에게 매달리듯 안긴다. 급하게 그녀를 받아 안는 에릭의 손에서 부지깽이가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낸다. 한 시간이 한 달 같았소. 투정을 부리듯 속삭이는 그의 뺨에 앤은 몇 번이고 입술을 누른다. 보고 싶었어요. 까르르 웃는 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에릭이 대뜸 그녀를 들어올린다. 순식간에 허공에 달랑 들린 그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에릭은 그대로 침실로 직행한다. 폭신한 이불 위에 앤을 내려놓은 그가 머리맡에 앉아 턱을 괸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했소?”

“언젠가 그를 위한 짝이 나타날 거라는 정도?”

세계의 중요한 비밀에 대한 건 얘기 안 했어요. 옛날에 당신이 내게 얼마나 무섭게 굴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그가 당신을 만만하게 보고 날 빼앗으려 하면 어떡해요? 앤이 손을 뻗어 에릭의 콧등을 장난스레 톡, 건드린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구하러 가야지. 에릭이 미소지으며 그녀의 손을 감싸 쥔다. 당신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 이만한 확신을 갖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그럼에도 언젠가 그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에릭은 언제고 미쳐버릴 것만 같다. 오늘과 같은 이변이 두 번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다음번에는 자신이, 혹은 앤이 엉뚱한 곳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의 경우처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에릭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연인을 갈라 놓는 죽음이었다. 불행, 사고, 운명, 뭐가 되었든지간에. 모든 종류의 피할 수 없는 우연 혹은 인과. 그것을 위하여 달려가는 시간은 도무지 막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녀를 두고 더 깊은 지하로 떠나야 하는 그때가 들이닥친다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앤을 홀로 남겨두는 것도, 함께 가자 종용하는 것도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그녀가 저를 살게 했으니 그녀 역시 삶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텐데. 에릭의 금빛 눈동자가 근심으로 깊어진다. 앤은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녀가 에릭을 다시금 보듬어 안는다. 따스한 온기가 품에 가득 들어찬다.

“불안해요?”

“늘 그렇지.”

앤이 묻고, 에릭은 조용히 긍정한다. 그녀가 제게 과분한 사랑이라는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앤은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다. 그에 대해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에릭은 금세 아득해진다. 사랑은 계산과 거리가 멀다는 격언 같은 것은 소용없는 이야기다. 그는 왼손 약지에 자리한 반지를 매만진다.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스민다. 그리고 에릭은 저를 향하는 앤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마주 들여다본다. 그것은 때로 지하의 호수 같기도, 끝없는 스올 같기도 그리고 무한한 우주 같기도 하다. 모든 탄생과 죽음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그러니 나는 당신을 위해 언제나 최선의 것만을 주어야 할 텐데. 당신이 나의 최악을 마주하고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확답을 이미 주었다고 하더라도. 에릭은 문득 그의 유언장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 그는 남들과 같이 묘지에 안장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의 삶과 죽음은 모두 앤의 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고, 마지막 이후를 위하여는 그녀에게 풍족한 생활을 보장해야 했다. 그녀가 그녀의 시간을 온전히 소진할 수 있도록. 하지만 에릭이 남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가르니에가 매달 지불하는 2만 프랑,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이름뿐인 지위 그리고 여기 피아노를 비롯하여 그가 가진 지하의 물건들이 전부다. 그럼에도 그의 모든 것은 곧 앤의 소유임이 당연하기에. 그는 사랑스러운 피앙세를 향해 말한다. 유언장을 고쳐 써야겠으니 공증인이 되어 달라고.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앤은 조금 놀란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반문하는 대신 에릭을 가만히 끌어안을 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가 계속 불안해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에릭의 품에 고개를 파묻은 채 그의 등을 찬찬히 쓸어내리던 앤이 말한다. 죽음 뒤의 일에 대한 건 조금 미뤄 두는 게 어때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은 아직 길잖아요. 나는 그걸 먼저 대비하고 싶어요. 어느새 물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목소리로 에릭이 되묻는다. 이를테면? 앤은 고개를 들고 에릭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우리가 나누어야 하는 문제라면 뭐든지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밤 늦게 혼자서 돌아다니지 않겠다는 약속이라거나. 그러면 에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한가득 벅차오르는 심정으로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아 그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언제부터 이렇듯 무른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순한 양처럼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원하는 무엇이든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탁상 위에 양피지를 가져다 펼쳐 놓고, 둘은 어떤 규칙을 정해야 좋을지 골몰하기 시작한다. 기실 요리라든가 청소, 각종 물품의 마련까지 생활에 필요한 일들은 대부분 에릭이 나서서 도맡고 있었으므로 달리 상의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내게 더 바라는 건 없어요? 앤의 물음에 한참 고민하던 에릭이 우물거린다. 욕심을 부리자면 끝도 없는 일이오. 당신을 이 지하에만 가둬 놓을 수는 없는 일이잖소.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기다리던 앤이 웃음을 터뜨린다. 당신이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죠. 당신 행복이 내 행복인 걸요. 에릭은 그녀를 아프도록 끌어안는다. 그런 음침한 계획은 당장은 보류하는 편이 좋았다. 대신 그는 앤에게 제안한다. 몇 번이고 괜한 근심걱정으로 미뤄 온 이야기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 이번을 놓치면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였다.

“내 사랑.”

봄이 오면 나와 결혼해 주겠소? 에릭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다. 맞닿아 오는 온기에 새삼스레 뺨을 붉히며, 앤은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부터 다른 대답은 없었다. 그러니 시기 따위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꽃피는 오월 아닌 가혹한 계절이더라도, 그와 여생을 함께할 부부로 맺어질 수만 있다면. 앤은 몇 번이고 기꺼이 호수 안으로 몸을 던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한 시련이라고 한들 뭐 어때, 얼마든지 날 시험해 보라지. 에릭을 향하는 사랑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닳아 무너지는 일은 삶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없으리라.

“봄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요.”

당신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앤이 환하게 웃는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에릭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앤에게 입 맞춘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 그의 분신은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나 그런 것쯤 연인과의 키스보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가 돌아와 다시 훼방을 놓을 일도 없을 테니. 잠깐의 백일몽에 불과했던 그 시간을 에릭은 금세 잊는다. 그의 목에 자연스레 팔을 감고 매달리며 앤은 살며시 눈을 감는다. 까맣게 물드는 시야 한켠에 가면을 벗은 유령의 잔영이 비친다. 그때 그는 분명 희열로 떨고 있었으나, 앤은 또한 그의 찢긴 가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녀가 개입할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 앤은 지금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연인에게 충실해야 한다.

시간은 어느덧 한밤중이다.

 

침실을 밝히던 촛불의 빛을 모두 끄고, 어둠 속에 나란히 누운 연인은 여전히 손을 꼭 맞잡은 채다. 그야말로 정신없는 하루였다. 내색은 않았지만 한껏 지쳐버린 앤은 순식간에 단잠에 빠져든다. 에릭은 새근대는 그녀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고 보니 탁상 한켠에 아직 풀어보지 않은 꾸러미가 있다. 어련히 제 선물이겠거니 짐작하면서도, 에릭은 앤의 소소한 기쁨을 빼앗지 않으려 그것을 애써 모르는 척한다. 그녀는 자잘한 물건들을 가져다 저를 꾸며 놓는 취미가 있었다. 반짝이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까마귀다운 면모다. 하기야 이렇게 커다란 인형은 흔하지 않겠지. 앤의 앞에서 그토록 고분고분한 그의 모습을 오페라 가르니에의 일원들이 목격한다면 아주 기겁을 하겠지만. 에릭은 아직 그녀를 세상에 내보일 생각이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페라하우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곳 지하의 생활과 무관해야 함이 마땅하다. 단순히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는 앤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계산 같은 것은 모두 제게 맡기고, 그녀는 온갖 편리하고 좋은 부분들만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 그것이 일면 앤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에릭에게 다른 길은 없다.

에릭은 좀처럼 편히 잠들지 못한다. 이런 날이라면 흔히 악몽에 시달려 왔으므로, 마음을 놓고 잠들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몰랐다. 그는 아직도 앤이 떠나는 꿈을 꾸곤 한다. 그녀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버리거나, 끝내 들이닥친 죽음이 그녀를 영영 앗아 가는 꿈을. 앤의 이름을 아무리 외쳐 불러도 그녀는 듣지 못했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날 때면 늘 먼저 일어나 있던 앤이 그를 위로하며 안심시키고는 했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불안은 이미 체화되어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때 앤을 호수에서 제때 건져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며 결국 거부했더라면. 에릭은 이제 앤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로소 그는 유령의 기분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그는 어떻게 모든 것을 목격하고도 앤을 내게 돌려주었나. 거대한 자괴감과 비참이 에릭을 덮친다. 고칠 수 없는, 결코 달라지지 않는 유령의 성정이 에릭의 영혼을 좀먹는다. 익숙한 지옥으로 송두리째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아. 밀려드는 고통 앞에서 그는 속수무책이다. 그때 곁에 잠들어 있던 앤이 문득 앓는소리를 내며 뒤척인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앤을 살핀다. 혹여 불편한 구석이 있는지, 나쁜 꿈을 꾸기라도 하는지. 그러나 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의 그 천진한 낯으로 말갛게 웃을 뿐이다. 그녀가 잠결에 에릭의 이름을 부른다. 몇 번이고 간절하게, 애틋하게. 그녀가 중얼거린다.

“사랑해요…….”

그것은 마치 최초의 고백을 떠올리게 해서. 금방이라도 흘러 넘칠 듯 고여 있던 에릭의 눈물이 기어이 마른 뺨을 적신다. 그는 말없이 앤을 끌어안는다. 부서질 것처럼 작고 가냘픈 그녀의 몸에 매달린다. 언제고 그를 구원하는 것은 앤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앤의 온기가 에릭에게 천천히 스며든다.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바람. 그리하여 어떤 고난도 시련도 더는 그들을 괴롭힐 수 없도록. 하지만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 주었던 적 없다. 배신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확신 없는 세계에서 연인에게 가능한 것은 당장이라도 깨어질지 모르는 잠시간의 평화뿐이다. 그렇게 야속한 새벽은 깊어져만 가고. 멀리, 깊은 호수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앤의 품속에서 숨죽여 흐느끼며 에릭은 홀로 밤을 지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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