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인지 ; 04
베르다미어는 시드 스넷타에서 걸어 나오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걸 본 트레보가 ‘하하, 그렇게 한숨 쉬시다간 빨리 나이를 먹는다고요? 핫하!’라고 말해도 그리브를 찬 정강이를 뻥 차지 못할 만큼, 그는 힘이 쭉 빠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타르타르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는 그가 여신을 구하거나 티르 나 노이로 가거나 하는 일들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럼 이유라도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인간이 가서는 안 될 곳인지 아닌지 안 가봤는데 어떻게 알아. 타르라크는 이미 그곳에 다녀왔다고 말해줬지만, 베르다미어는 본인이 가보지 않으면 아무튼 모르는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그랬더니 책을 읽어보라는 거 아닌가? 그걸 읽고 관심을 끊으란다. 그는 곱씹다 보니 짜증이 나서 땅을 뻥 찼다. 그 기세에 주변에 있던 갈색 여우들이 캥캥거리며 물러났다.
“...또 던바튼에 가야 하잖아.”
베르다미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걸어가기에 먼 곳은 문 게이트를 타면 된다지만, 달이 그를 어디로 옮겨 줄지는 달이 떠봐야 알았다. 그 시간에 차라리 열심히 걸어서 던바튼에 가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그는 씩씩거리며 서 있다가 다시 땅을 뻥 찼다. 애꿎은 작은 돌멩이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이젠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그는 가방을 고쳐 매었다. 티르 코네일부터 던바튼까지는 이제 눈 감고도 갈 수 있었다.
광장에 누워 있는 밀레시안의 위로 자꾸만 무언가가 쌓였다. 로브, 포포 셔츠와 바지, 포포 스커트, 금화(이건 좀 좋을지도), 나무 막대기, 마족 스크롤... 베르다미어는 어느 순간 그것들을 몽땅 떨치고 일어났다. 망연자실하게 누워 있겠다고 해서 없는 책이 생기지는 않았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시간이 좀 빨리 가겠지. 그는 머리를 질끈 묶고 결연하게 일어났다. 사실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다는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40일은 너무하지 않았어? 그 시간이면 스킬을 하나 더 익힌다고.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가방에서 호미를 찾아 들었다. 다시 흙냄새에 파묻힐 시간이 왔다.
그리고 그가 본인이 감자인지 감자가 본인인지 슬슬 헷갈릴 때쯤, 베르다미어는 밭이랑 사이에서 일어나 아이라에게 찾아갔다. 지금쯤이면 책이 들어왔으리라는 희미한 희망이 그의 가슴 속에서 반짝거렸다.
“아아, 어쩌지? 또 헛걸음하시게 했네요. 여태 안 들어왔어요.”
몇 초도 안 되어 희망이 촛불 꺼지듯 픽 꺼졌다. 베르다미어는 아이라에게 뭐라 항의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안경을 낀 소녀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책이 오면 제가 부엉이를 보내 드릴게요.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게 해서 죄송해요.”
“... 아냐... 아이라 잘못은 아니지...”
베르다미어는 약간 음울하게 말하고 대충 손을 흔들었다. 또 감자를 캐서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기는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그는 던바튼의 성벽 위로 올라가서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잘 보였다. 지나가는 밀레시안들이 로브나 잡다한 물건을 떨어트리지도 않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선택이었다. 베르다미어는 구름이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하늘을 유영하는 걸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메이븐 사제가 건넨 모리안 여신에 관한 책의 내용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돌이 된 전쟁의 여신. 어느 측면에서는 비극적이고, 어느 측면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신이 왜 도움을 요청한 걸까? 신이 육체를 잃어 낙원인 티르 나 노이로 그 영혼이 이동했다면, 티르 나 노이에서는 신의 권능이 무용한 것인가? 타르라크는 왜 그곳이 낙원 따위가 아니라고 했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그는 등이 약간 배겨 자세를 고쳐 누웠다. 그의 수많은 질문이 하나로 귀결되는 건 다음 순간이었다. 왜 나에게도 나타났을까? 그는 여신이 꼭 자기 자신만을 집어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여신의 부름씩이나 받는단 말인가? 그때의 그는 메모리얼 던전에서 본 세 용사보다도 미숙했는데. 그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쉰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강해졌지만, 세계를 구할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상에 그보다 강한 사람은 널리고 깔려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먼저 여신의 부름을 받고 뭐든 해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베르다미어는 해가 지기 시작한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나는 포기하지 않을까?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는지 아직 몰라서 그렇지. 그럼 알게 되면 그만둘 거야? 그건 스스로 답하지 못한다.
그가 눈을 깜박이는 속도가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누워 있자면 마을의 왁자지껄함과 부산스러움이 약간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바람이 그의 이마를 살살 쓸고 지나갔고, 마침 해도 지고 있어서 빛이 밝지 않았다. 잠들지 않기에는 모든 요소가 너무 유혹적이었다. 그래서 베르다미어의 눈이 슬며시 감길 때쯤, 깃털 뭉치가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푸압.”
그는 잠에서 번쩍 깨어 얼굴에 달라붙은 깃털 뭉치를 떼어냈다. 딱 봐도 배달 초심자인 부엉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부엉이의 부리 아래를 긁어준 후, 부엉이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풀어 읽었다. 책이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베르다미어는 티르 코네일에서 암탉에게 그랬듯이 부엉이의 정수리를 검지 손가락 끝으로 복복 긁어주며 서점으로 내려왔다.
“어서 오세요~ 아! 여기 있어요, 찾으신 책.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하니까 책값은 안 받을게요.”
“고마워. 여기, 부엉이.”
“어머나! 아직 어린 애라서 가끔 비행을 실수하더라고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으응. 아이라도 고생했어. 잘 읽을게.”
베르다미어는 다시 성벽 위로 돌아와서 책을 펼쳤다. 첫 장부터 심오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 개의 질서, 절대신 아튼 시미니, 모든 법칙을 초월하는 낙원... 베르다미어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곳이 있으면 에린은 왜 존재하는 건데? 그는 역시 낙원 운운하는 책은 묘사가 좀 종교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그는 아예 배를 깔고 앉아서 책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구전으로 전해짐에도 지방별로 묘사가 거의 일치하는 낙원, 젊음과 영원의 땅, 뿌리지 않아도 거둘 수 있는 비옥함이 영원히 함께하는 세계. 베르다미어는 눈을 내리깔고 소리를 내 다시 읽어보았다.
“그곳은 노쇠와 죽음의 힘이 닿지 않는 곳...”
“...인간의 눈물과 분노가 의미를 잃는 곳.”
카즈윈은 낡은 책의 글자를 툭 건드렸다. 그는 이 책을 찾느라 게이트의 서고를 삼 일 밤낮 뒤적였으나 정작 책의 내용은 그다지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책의 결론은 결국 실제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로 정리되었고, 유의미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하긴, 모험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단 학술적인 내용에 가깝긴 했다. 카즈윈은 책을 덮고 책장 사이에서 나풀거리며 날아오른 먼지를 대충 손으로 휘저었다. 빠르게 대충 읽긴 했지만, 책의 몇 가지 문장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한 사람의 낙원은 다른 사람에게는 지옥을 의미할 수 있다. 누구도 늙거나 병들어 죽지 않는다.
카즈윈은 책을 옆에 놓아두고 도로 드러누웠다. 그는 게이트에서 가장 높이 있는 그의 비밀공간에 있었다. 가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와서 둥지를 틀고 있긴 했지만, 그와 고양이는 서로 관심이 없었고 서로를 방해하지도 않았기에 공존할 수 있었다. 그는 머리 위로 떠가는 저녁별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노쇠와 죽음의 힘이 닿지 않는 종족들이야 이미 존재하는데. 그가 눈을 깜박였다. 그럼 티르 나 노이는 그들 안에 있는 건가? 허무맹랑한 생각이 주르륵 흘러서 사라졌다. 책이 설명하는 낙원은 이상향에 대한 갈망의 투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상적이었다. 그래서 카즈윈은 항상 그것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고 죽음도 노쇠도 없는 곳이 정말 낙원인가? 만약 어떤 영혼은 간절히 죽음을 바란다면? 그들의 휴식을 강제로 박탈하는 거라면? 모든 인간의 욕망을 들어주는 곳이 낙원이라면, 어떤 욕망이 상충할 때 낙원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작게 하품했다.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끝없는 질문을 던질 수는 있겠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스무고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스무고개는 답이라도 나오니 좀 더 나았다. 실존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곳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역시 그는 낙원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책의 마지막 문장에 공감했다. ‘현실적인 모험가들에게는 낙원의 꿈 대신 차라리 다른 일을 하도록 권하고 싶다.’
그의 머리 위로 떠가는 저녁별은 보랏빛 하늘을 넘어 검푸른 빛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는 머리에 베지 않은 빈손에 부드러운 털이 스치는 걸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검은 고양이가 그를 보고 작게 야옹, 하고 울었다. 카즈윈은 대충 아무 곳이나 쓰다듬어주고 다시 손을 늘어뜨렸다. 그에게는 상상 속의 낙원보다 당장 훈련과 사명이 중요했다. 주신께서 주신 땅과 계시를 수호하는 것, 그 사명을 관철할 수 있는 기사가 되는 것,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것. 그 목표들에만 집중해도 마음이 모자랐다. 그는 조바심은 내지 않았지만, 이따금 목표가 벅차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래도 꾸준히 걷다 보면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느리게 눈을 끔벅이다 문득 생각했다.
그 밀레시안도 그렇게 믿을까.
나는 사람 사이에 끼는 게 싫다. 베르다미어는 던바튼에서 걸어 나오면서 생각했다. 연인 비슷한 아무튼 그 무언가가 흐른 관계 사이에 끼는 건 더 싫다. 그는 강하게 생각했다. 티르 코네일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던 베르다미어가 돌연 머리를 붙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안 궁금해!!!”
주변에 있던 닭들이 그의 목소리에 놀라 후닥닥 달아났다. 그는 이제 막 크리스텔의 전언을 듣고 나온 차였다. 그 말인즉슨 라비 던전에서 타르라크와 크리스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타르라크가 말한 ‘여신은 그냥 너를 이용할 뿐이다’라는 말만으로도 베르다미어의 작은 머리가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는데, 크리스텔까지 타르라크를 만나고 싶다며 부탁해오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안 궁금했어! 둘이 무슨 사이였는지 안 궁금했다고! 하긴 크리스텔 입장에서는 매우 간절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베르다미어는 타르라크에게 받은 부탁도 있고 하니 크리스텔에게 함부로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과거에 그들이 어쨌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그는 길바닥 한중간에 쭈그려 앉아서 낑낑거렸다. 던전을 전전하느라 고생한 팔다리가 욱신거리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머릿속에 찾아온 과부하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여신은 인간을 버렸고, 그냥 꿈으로 사람을 꾀어내서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마족은 여신의 힘을 빌려 에린으로 오고 있다. 여신은 마족의 침입을 방조하고 있다. 아니다, 사제로서 모든 것을 걸고 말하건대 여신은 인간을 언제나 살피고 있다. 베르다미어는 쭈그려 앉은 채 이마를 쳤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붙들고 늘어져서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크리스텔을 시드 스넷타에 데려가서 삼자대면시키면 안 되는 걸까? 개인적인 문제는 알아서들 해결하고 나 좀 도와달라고 하면? 될 리 없었다.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앉은 채로 심호흡하다가 일어났다. 가긴 가야 했다. 본래 마족이었던 사람이 자기 과거까지 밝혀 가며 전해 달라고 부탁한 걸 저버릴 수는 없었다. 베르다미어는 한숨을 쉬며 마저 길을 걸어갔다.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또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귀걸이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 그냥 귀걸이 하나였는데. 고생을 좀 많이 하긴 했지만, 그냥 귀걸이였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그의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글라디우스를 내려다본 베르다미어가 고개를 저으며 걸었다. 시드 스넷타를 걸어서 갔다 오면 시몬이 또 어디서 누더기를 걸치고 온 거냐며 잔소리하는 모습이 선했다. 옷만 누더기가 되면 다행이지. 사람 사이에서 시달리느라 마음도 누더기가 될 것 같았다.
그는 걸어가면서 잠잠히 생각을 이어갔다. 여신이 정말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왜 그렇게 다급하고 슬픈 목소리였을까? 왜 누구라도 제발 들어 주기를 바라는 목소리처럼 들렸던 걸까? 왜 여신은 잠긴 문을 두드리듯이 간절했을까? 두갈드 아일에 들어서면 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뺨을 만졌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내뱉는다. 모험가들을 꾀어내기 위한 여신의 모략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모험가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싶었다면, 던전에 들어서는 혈기 왕성한 모험가들의 앞에 나타나서 부디 도와 달라고 한마디만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계시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려와 내가 선택했으니 용사의 길을 걸어 달라고 했다면 거절할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더 손쉽게 해낼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여신은 무작위의 꿈에 나타나 부디 도와 달라고, 한밤중에 도망쳐 와 닫힌 문을 두드리듯이 말했다. 그는 손에 닿는 높게 자란 풀잎을 하나 꺾었다. 걸으면서 손을 흔들면 풀잎이 살랑거리며 세계의 부드러운 면모를 손바닥에 전해 주었다. 베르다미어는 그것을 느끼다가 생각했다. 거짓이든 거짓이 아니든, 더 나아가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실들은 너무 깊이 숨겨져 있어서 직접 바라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를 저버리기에는 마음에 물렁한 구석이 있었다.
한참을 걸어 시드 스넷타에 도착한 베르다미어는 또 다른 책을 받고 타르라크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휑뎅그렁해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 부탁? 크리스텔이라면 이 책을 번역할 수 있어? 만나주지도 못하면서 부탁은 하고 싶어 해? 그는 낮에는 곰, 밤에는 사람인 드루이드를 쳐다보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참지 못하고 있는 힘껏 책을 내리쳤다.
“너는 진짜 나쁜 놈이야!!!”
빡, 하는 소리가 눈 오는 시드 스넷타에 울려 퍼졌다.
카즈윈은 한밤중에 숙소 책상 앞에 앉아서 작은 종이쪽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쪽지들 위에는 짧은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여신의 꿈을 꿨다고 주장함’, ‘던바튼으로 가서 전설 속의 세 용사에 대해 추적하기 시작함’, ‘드루이드와 접촉’, ‘마족의 언어로 된 책을 번역’, ‘아다만티움의 출처 조사’, ‘모리안의 배신에 대한 언급’... 그는 물끄러미 어떤 사람의 궤적을 따라가는 메모들을 바라보았다. 흥미 때문에 정리해 놓은 거긴 했지만, 한데 늘어놓으니 심상치 않은 사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오늘 조원급 이상의 기사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에 슬쩍 들어가서 빠르게 보고서를 훑어보고 나온 차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밀레시안의 행동은 이제 그쪽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이제 더 상위의 자격이 필요할 만큼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카즈윈은 그런 행동을 자주는 못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리하고 싶은 욕구도 별로 없었고. 그는 빈 종이를 가져와 다시 짧은 문장을 적었다. ‘티르 나 노이로 향하기 위해 무위를 증명’. 그리고 나서 그는 오랫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쫓는 것에 대해 탐욕이 없는 존재다. 그들은 자유로우며, 명예나 영광, 강대한 힘이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바람처럼 이 땅에 와서, 별빛처럼 오래 반짝이며 그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이 세계를 만끽한다. 그는 아는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나면 의문은 하나가 남는다.
그렇다면 그 밀레시안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매달리는가?
베르다미어는 온갖 오해와 온갖 마을 쏘다니기, 던전 돌아다니기를 마치고 나서야 그의 품에 안긴 세 권의 책을 바라보았다. 한 권은 번역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모두 얻었다. 내용이 썩 좋은 책은 아니었다. 복수의 서라는 이름을 가진 만큼, 모리안 여신의 이름을 입고 인간들에게 보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내용을 흘긋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졌다. 게다가 슬슬 눈치를 보아하니 에린을 정복하겠다고 마족들이 쳐들어올 예정인 것 같았다. 그는 드래곤 유적지 근처의 수레에 기대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세계가 파괴되려고 한다는 거잖아.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보니까 그걸 막아야 하는 거고? 베르다미어는 내가 왜? 라고 잠깐 생각했다가, 세 권의 책에 이마를 박았다. 왜긴 왜야, 정들어서 그렇지. 그것도 그렇지만, 그는 이미 이 세계를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게다가 복수의 서나 마스 던전에서 본 기억에서 인간을 신나게 욕하던 게 마음에 안 들어서라도 뭐든 해봐야 했다.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말이야 그렇다 치자. 가치를 폄하한다느니 미움을 퍼붓는다느니 하는 말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건가? 게다가 인간들은 서로 죽이고, 미워하며, 욕심 때문에 동족을 구렁텅이에 빠트린다고? 왜 모든 인간이 그런 것처럼 말하지? 그는 책을 고쳐 안고 걷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분명 그럴지도 모른다. 나쁜 마음을 먹고 남을 해치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는 걸 거리낌 없이 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는 인간마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것 또한 본인의 정의를 위해 다른 존재를 깎아내리는 행위가 아닌가? 그는 불만스럽게 생각하다 흘긋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흐르는 얇은 구름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게 한순간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베르다미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결론을 내린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싶었다. 정의와 선 같은 거대한 신념과 이유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저 자신을 둘러싼 평화로운 세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밟고 선 땅이 포화에 휩싸이는 꼴은 두고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꿋꿋하게 나아가기로 했다. 베르다미어는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며 던바튼으로 향했다.
평화를 이 땅에 불러올 이름을 가진 자는 별빛과 꿈을 타고 천천히 수레바퀴의 축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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