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5화

꿈의 시작(5)

“번역은 끝났어요. 다만 책의 뒤 부분에 내용과 관계없어 보이는 글이 있더군요. 혹시 몰라 그것도 번역해두었어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나는 크리스텔에게 받은 번역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복수의 서. 저자는 마우러스 구이디온. 분명 타르라크가 말했던 그의 스승의 이름이었다. 이 책을 발견한 곳을 생각하면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충 훑어본 내용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증오로 가득차 있었다. 헌데 자브키엘의 마법에서 세상을 구원한 마법사라고 알려진 그가, 왜 이렇게도 인간을 미워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마지막에 써둔 독백 글은 무슨 마음으로 쓴 것일까.

크리스텔이 아직 떠나지 않은 내게 토크를 조심스레 건네었다. 부서진 토크에는 섬세하게 글이 새겨져 있었다.

[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해도 ]

“마지막 내용을 읽고  관청에서 분실물을 찾아보았어요. 정황상 그 책에 나온 ‘증표’에 해당하는 게 이 토크 같은데…, 아무래도 메모리얼 아이템 같아요.”

“수고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던바튼을 떠나기 전, 크리스텔에게 물었다.

“혹시 타르라크의 답은 받아보았나요?”

내 질문에 그녀가 장미처럼 아름답게 웃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훔치며, 크리스텔이 내게 보여준 건 검은 장미였다. 고혹적으로 피어난 검은 장미는 그때의 크리스텔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이걸 받았어요. 사제님께서 타르라크 씨의 부탁으로 키우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라비 던전의 검은 서큐버스의 이명을 떠올렸다. 타르라크 또한 크리스텔에게 마음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다행이에요, 크리스텔.”

“솔라 씨에겐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언제든지 도울 테니 뭐든 말씀해주세요.”

“하하…, 그럼 잘 부탁 드려요.”

곧장 시드 스넷타로 가는 길에 나는 던컨 촌장님 댁을 들렸다. 마침 저녁식사 때인지 집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촌장님이 나를 발견하고 불렀다.

“오, 마침 자네가 왔구만. 오늘 옥수수가 들어와서 스프를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곤란한 참이었네. 괜찮으면 같이 들게나.”

“저야 좋죠.”

나는 반색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촌장님은 내게 스프를 잔뜩 퍼주었다. 고소한 옥수수 향이 코를 간질였다. 가벼운 기도를 한 촌장님과 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따끈한 음식이 들어가니 마음이 좀 녹는 것 같았다. 아까만 해도 불안하던 것들이 이제는 좀 막연히 멀어진 기분.

“잘 먹는구만. 요새 밤낮으로 바쁘게 돌아다녀서 그런지 영 피곤해 보였는데 말이야.”

“통 잠을 못 자긴 했어요.”

촌장님의 걱정 어린 말에 대충 얼버무린 것과 달리 휘젓던 스푼을 멈추었다. 이 사실을 말해야 하나 다시 갈등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실 촌장님께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예전에 전해 듣기로 촌장님은 젊을 적 유명한 전사였다고 한다. 그런만큼 이곳저곳 소식에 밝고 지혜의 깊이도 깊었다. 못해도 이 상황에 대해 조언 정도는 들을 수 있겠지.

결국 나는 촌장님께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시간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일어난 사건은 많았다.

낮에는 곰이 되는 드루이드 타르라크와 그를 사랑해 마족의 몸으로 인간을 택한 크리스텔, 에린으로 시시각각 좁혀오는 마족의 손길. 마지막으로 모리안 여신의 배신으로 의심되는 행동까지.

“그랬군…, 고생이 많았겠어.”

대화가 이어질수록 심각한 표정을 짓던 촌장님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 듯 했다. 그러나 그의 연륜은 금방 그 고뇌에서 벗어나는데 충분했다.

“자네가 말한 부러진 토크를 내게 보여주겠나?”

“네, 여기요.”

나는 품에 있던 토크를 꺼내주었다. 촌장님은 토크를 받아들고 보더니,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그리곤 이곳저곳을 다니며 똑같이 부러진 토크 반쪽을 찾아내었다.

“역시나….”

토크는 원래가 하나였다는 듯이 틈 없이 물렸다. 남은 반쪽에 새겨진 글자도 이어져 한 문장으로 완성된 것은.

[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다 해도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리 ]

애틋하고 강렬한 문장이었다.

“사실 이 토크는 내가 마리를 처음 만났을 때 얻은 것이라네. 흰색과 갈색 사슴 한 쌍이 마리를 싼 담요를 물고 있었지. ”

마리는 사라진 세 전사 중 한 명이자 아직 어린 소녀였다. 촌장님의 지인이었던 시라, 그러니까 마리의 어머니이자 마우러스의 아내는 자신이 죽기 전 마리를 던컨 촌장님께로 보냈다. 마리의 기억을 모조리 기운 채로….

“시라는 귀족들의 사주로 죽임을 당했고 그 사실 때문에 마리가 다치지 않도록 기억을 잃게 한 게야.”

나는 그제야 마우러스가 인간을 증오하게 된 이유를 추측하게 되었다. 아내의 죽음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그는 절망했던 것이 아닐까.

잠시만…, 그렇다면 마우러스는 자신의 딸인 마리를 해치게 된 거야?

나는 그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비극은 비단 마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말게나. 자네 또한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좋지 못한 이야기에 저녁식사는 침묵에 빠졌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촌장님께 복수의 서를 보여주었다. 책의 내용을 읽은 촌장님은 한탄했다.

“허어, 이것이 정말 마우러스 그 친구가 쓴 것인가…. 하긴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제 아무리 인간세상을 지킨 대마법사라한들 어쩔 도리는 없겠지. 그보다 이 서술들로 보아하니 분명 이 책은 뒤로 이어지는 내용이 더 있어보이는구만.”

나는 촌장님이 짚은 두 구절을 보았다.

[ 이 세계에 아로새겨진 질서와 창조주의 의지에 대한 확신으로 복수를 세 번 외치는 이 책을 확인하고 가슴 깊이 그 의미를 새겨 들으라. ]

[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에 진실의 눈을 뜨게 하려는 자들은 그 다음의 복수의 외침을 들으라. ]

확실히 이 뒤로 이어지는 복수의 서가 세 권 정도 더 있을 거라는 추측은 합당했다. 나머지 책을 구할 수만 있으면 아마 마족 측의 정보를 알 수 있을지도.

“나도 여신의 배신이 믿기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썬 여신의 의도를 알아보는 게 우선일 것 같네. 나머지 복수의 서를 찾아보지 않겠나? 나도 변방으로 수소문해보도록 하지.”

“네. 전 일단 타르라크에게 가볼게요.”

“그러도록 하세.”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10시. 이웨카가 떠있는 티르 코네일의 밤은 살짝 쌀쌀한 공기가 떠돌았다. 나는 이제는 좀 익숙해진 시드 스넷타로 가면서 아까 하나로 합친 토크에 대해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시 만나리라는 끈끈한 사랑은 토크가 지금 두 조각으로 부러진 것처럼 끊어졌다. 비록 가족은 없다 하더라도 난 사랑이라는 감정에 몰이해한 사람은 아니다. 분명 마우러스의 슬픔과 분노에 공감이 갔다.

인간에게서도, 마족에게서도 속아서 소중한 걸 잃어버린 사람. 그에게 차라리 마리라도 남아있었더라면 마우러스는 마족의 편을 들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하지만 타르라크의 말에 따르면 정황상 마우러스가 글라스 기브넨을 연성 중인 듯 하니, 지금으로선 그를 말리는 게 제일 최선의 선택이다. 더 늦기 전에….

깊이 생각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타르라크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벌써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졌지만 타르라크는 자지 않고 서있었다.

“오셨군요.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나요?”

나는 말없이 복수의 서 번역본과 부러진 토크 두 조각을 꺼내었다.

“이 토크는…?”

“마리의 물건이에요. 본인에겐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지만.”

마리의 이름이 언급되자 타르라크가 드물게 눈을 크게 뜨며 다급하게 설명을 재촉했다. 나는 던컨 촌장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실 촌장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지만, 나는 타르라크에게 이것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마리가…, 스승님의? 아니, 이럴수가….”

혼란해하던 타르라크는 링 토크를 들고 한참을 말없이 서있었다. 그 후, 내게 말했다.

“분명 마족 측에선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스승님을 회유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내막을 이용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스승님께서 마족을 돕는 걸 두고 볼 수 만은 없겠군요.”

“복수의 서는 여러 권이 있을 것으로 추측돼요. 나머지 책을 구해보죠. 그리고 이 링 토크는….”

“메모리얼 아이템이니 그 안에 무언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솔라 씨, 당신에게 모든 짐을 지게 할 수는 없으니 이 메모리얼 아이템의 분석은 내게 맡기세요. 마나를 사용할 수는 없어도 분석 정도는 가능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이 복잡할 타르라크를 위해 일찍 자리를 떴다. 찾아야 하는 건 다음 권의 복수의 서. 마족 언어로 쓰여있으니 인간 세상에 책이 유통되고 있지는 않겠지만, 일단 던바튼 서점의 아이라에게 다시 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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