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일하기싫어

G24 스포일러 / 트헌+멀린 / 현대 한국 AU

이차 by 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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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0. 05 백업은 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쓴 건지 모르겠음..



다 잘렸다. 성적우수장학금 전액 수혜생에 알바를 4개 그만두면 사장님 5명이 바짓가랑이를 잡는 내가.

스무 살짜리 둘이 빵꾸 내고 도망가서 회식시간대 명륜진사갈비 서빙을 일당백으로 소화했던 영예의 순간이 영화 필름처럼 감겨 올라간다. 그때의 회전율은 가히 롯데월드 회전컵을 방불케 했다. 쌈 싸서 손님 입으로 토스했으면 두 테이블 더 돌렸을 것이다. 남겨져 같이 고생한 직원은 그 현장이 아수라를 담은 한 폭의 탱화와 같았다고 생생한 증언을 전했다. 트 모 씨가 대타 뛴 저녁 타임은 영업 사상 초유의 매출을 기록했고, 매장의 전설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고 그만둔 지금도 잊을 만 하면 사장에게서 카톡이 온다. 세 번쯤 왔을 때 안 읽고 차단했다.

아무튼 그 전적은 대학생 트 씨가 자신의 능력을 체감하고 본인이 알바몬 최상위 고급 인력임을 깨달은 동시에 힘을 봉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 잘하는 거 좋다. 그런데 한 번 캐리했더니 사방에서 헬프 치는 거다. 안녕하세요 오픈 타임 하는 을이에요ㅎㅎ. 전에 마감 같이 했었죠 ^^ 병입니다. 저 정이라고 하는데 다름이 아니라. 형 저 기억하시져. 삽시간에 전 직원의 대타 치트키 취급이다. 마지막은 뭐냐. 내가 우리집 막낸데 누가 네 형이야.

알고 보니 사장이 헌이가 일 잘한다고 대타 쓸 거면 걔한테 말하라더랬다. 똑같은 시급 줘도 잘하는 애한테 더 주고 싶다나. 아니 사회에는 보너스라는 유익한 제도도 있는데. 왜 더 빨리 차단하지 않았는지 철 지난 후회가 스쳤다.

그런 뼈아픈 경험을 딛고 적당히 꼼꼼하고 적당히 성실하지만 지각 안 하고 딱 시급 값만 하는 일꾼으로 컨셉 잡았다는 뜻이다. 보너스도 안 나오는 비정규직, 깨지지만 않으면 된다. 이 일-잘함-력은 알바생일 때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장한테 잘 보여서 정식 입사하고 싶은 프랜차이즈도 없다. 장학금 받고 알뜰하게 돈 모아 졸업하자마자 다음날 새벽 첫 비행기 잡아 타고 모두의마블 세계여행 찍는다. 북한 빼고 다 간다. 사업 아이템? 넘친다. 개허세 같지만 트 씨는 정말로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도 번듯하게 자리잡을 능력이 됐다. 글로벌 역마살 낀 그를 담기에 한반도는 너무 좁다.

서론이 길었다. 어쨌든 트 씨는 관두겠다 선언하면 그 즉시 모든 사장님을 미련 둘둘 감은 눈시울 습한 구 애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혹자는 자냐고 / 깨웠으면 미안한데 / 지금 나와 주면 안 되겠냐고 새벽 2시 5분 전에 그렁그렁 울며 비는 오리 이모티콘을 보냈다. 운동부 학생들이 단골인 맘스터치를 그만두기 전날에는 사장이 퇴근하려던 그를 앉혀 놓고 제발 다시 생각해 보라며 일장 설득을 했다. 게네들 주문 10분만에 내놓는 튀기머는 자기가 본 이래 남한에 너뿐이라나. 이북에선 보셨는지. 설득한답시고 하는 말에 시급 얘기가 없어서 나왔다.

관두면 관뒀지 해고 당한 적은 없는 백전무패 알바 전설. 전국의 사장님들 대상 앙케이트 결과 (다른 매장에)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남자 1위. 일 잘하는 걸로 치면 과장 더해서 이쪽이 사장을 해고할 수도 있다. 그런 트 씨도 자영업이 파편처럼 흩어지는 전무후무한 판데믹 사태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미친 역병 새끼.

마지막으로 잘린 매장의 사장이 그랬다. 이놈의 역병이 물러가면 꼭 몸 건강히 다시 만나자고. 네 계약서 보관해 놓겠다고 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한데 워딩이 불길하다. 전염병 만료가 빠를까 근로계약 만료가 빠를까.

당장 알바를 못 하면 생계가 곤란한 건 아니다. 아직 부모 집에 사는 대학생이고 어디까지나 개인 저축을 위한 벌이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실직이 아니다. 사회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하는 치명적인 전조다. 돈은 안 돌고 야마만 돈다.

전세계를 덮친 이게-사는-거냐 사태에 꾸역꾸역 적응한 지도 벌써 수 개월. 트 씨는 이제 본인 픽 맛집이 폐업하는 악몽에 잠을 설치지 않는다. 실제로 두 곳이 망했기 때문이다. 대신 폐업한 식당이 재개업하는 꿈을 꾼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행복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수강 정정을 마치고 폰 든 손을 늘어뜨렸다. 2학기도 꼼짝없이 비대면이다.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귀찮은 MT나 술 모임 권유가 쏙 들어간 건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거절하기도 신물이 나던 참이다. 그거 빼곤 다 별로. 아시아 최상위 대학에서도 집단 컨닝이 성행하는 판국이다. 성적장학금은 공정성 때문에 한시 폐지하니 마니 하더니 등록금 반환을 고려한다던 학교는 전교생에게 십만 원 남짓 돌려주고 입 닫았다.

십만 원. 입금된 즉시 만 원권으로 뽑아 거실 한가운데 섰다. 촤르르르륵. 머니 건에 장전된 화폐가 날았다. 한때 적금이었던 것은 이제 만 원 열 개가 되어 바닥으로 흩날렸다. 4년 전액 장학금의 꿈도 흩날렸다. 바닥을 덮은 녹색 종이들이 때가 안 됐는데 떨어진 잎새 같다. 돈의 몰락을 멀거니 보며 트 씨는 시구를 떠올렸다. 세종대왕 하나에 전필과. 세종대왕 하나에 교필과. 또 세종대왕 하나에 전필과. 교내식당과 카페와 도서관과 휴게실과. 지폐에 씌워진 홀로그램이 반짝인다. 별은 다 못 헤는데 돈은 열에 다 헸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사업 아이디어는 당근마켓에 파는 게 더 비싸게 먹힐 것 같다. 사용감 없고 하자 없음. 사용감은 님이 사도 안 생길 것 같음. 즉석 채팅 배송(배송비 무료).

습관처럼 알바몬을 찾았다. 마스코트 캐릭터 모니가 방글방글 웃는다. 트 씨는 안 웃었다.

그래도 여름에는 안 잘리고 하던 게 있었다. 그마저 잃고 말았던 것은, 언젠가 온 백성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 소리를 드높이던 날이었다.

집에서 하는 거라도 찾아야 했다. 못해도 집 주변. 이대로 저금만 까먹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 돈은 박혀만 있어도 이자가 붙지만 사람은 아니다.

꿀알바는 기대도 안 한다. 이 잡듯이 뒤져서 뭐든 하나 걸리기만 하면... 채용 조건 최대한 풀어 놓고 물색하던 에임이 딱 멎었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금토일월 야간. 버스로 두 정거장. 1명 모집.

카드 어딨어. 아니지. 자전거! 마스크도!

점장님이세요?

네? 네.

면접 보러 왔는데요.

네? (채용 모집 방금 올렸는데)

바쁘시면 기다릴게요.

아... 그럼 잠깐 앉아 계실래요? 아까 다른 분도 서류 넣으셔서 마침 오시라고 하...

저 오늘부터 근무 가능해요. (지금 그 유니폼 벗어 주면 입는다는 뜻)

어... 이력서 갖고 오셨어요?

오면서 보내 놨어요.

...이야... 뭐가 많으시네.

물류 체크 할 줄 아시겠네요.

네.

담배 모르시는 거 있어요?

아뇨.

...

점장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 쓰고 할인 상품 증정 상품이랑 몇 가지 알려 주고 퇴근했다. 젊어서 그런지 심플해서 좋다. 물품 위치 눈대중으로 대강 봐 두고 바닥 먼저 쓸었다. 쓰레기통 확인하고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을 때까지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어서 오세요. GS25입니다. 문구가 찍힌 포스기 화면이 생소하다. 점장 말로는 바뀐 지 꽤 되었다는데 마지막으로 일했던 게 고등학생 때라 그러려니 했다. 크게 달라진 건 없고 객층 키 안 눌러도 된다는 거 포함해서 대체로 편해졌다.

스피커에서 인기 차트가 흘러나오는 건 변함없다. 점장은 재량으로 바꿔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그렇게 해서까지 듣고 싶은 건 없었다. 어차피 들어야 하는 건 따로 있다.

일하게 된 곳은 집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작년 즈음 아파트 단지 앞에 새로 들어온 곳이다. 그런데 이 시국에 버스 타고 다니긴 좀 그렇고. 그래서 차선책이 처음 갔을 때처럼 자전거다. 교통비도 굳으니 일석이조. 시국이라 매장이 휑한 것도 이점이라면 이점이다. 노트북 들고 다니면서 남아도는 시간에 온라인 강의 듣자는 생각이었다. 잘하면 일하면서 페이퍼 몇 장 쓰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여덟 시간씩 일주일에 나흘. 야간수당에 주휴수당 하면(편의점은 최저도 못 받는 게 국룰이지만 다 받아내는 수가 있다)... 체증까진 안 내려가도 숨통은 트인다. 마스크 쓰고 빡세게 페달 밟은 보람이 차고 넘쳤다.

저번 학기 그 교수님은 여전히 발음이 구렸다. 5초 전으로 돌리길 세 번째. 그래도 이만하면 알아듣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누구나 억양이나 강세에 나름의 규칙성이 있기 마련이라 그간 쌓은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불명확한 발음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근데 이건 대체 뭐라는 거지.

새벽 1시에 미간을 좁히고 노년 교수의 음성을 반복 재생하던 남성은 종소리에 한쪽만 낀 이어폰을 뺐다. kf94 마스크에 까만 선글라스를 쓴 젊은 남자 둘이 들어왔다. 한 명은 검은 챙모자를 눌러썼고 다른 한 명은 투블럭 헤어를 새하얗게 탈색했다. 후자는 귀에 눈에 띄는 피어스를 여러 개 했다. 그들은 과자 매대를 기웃거리다 카운터로 돌아왔다. 새우깡 2개에 포카칩 파란색 하나. 초코 우유 하나 뚱바 하나. 그리고 칭따오에 마이구미.

"신분증 보여 주세요."

백발이 성성한 쪽이 멈칫하더니 제 몸을 더듬었다. 허리춤 툭툭. 뒷주머니 툭툭. 가슴 쪽도 만지다가 입은 옷에 앞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행을 쳐다봤다.

"봉투 드릴까요."

"네."

"20원 추가됩니다."

투블럭은 일행에게 신분증 확인도 시키고 계산도 시킨 죄로 봉투를 들었다.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둘 다 맨발에 삼선이다.

투블럭은 전개 상 어제와 같은 시간에 다음날 또 왔다. 이번엔 혼자였다. 아니, 완전 온 건 아니고... 뭐하는 거지?

트 씨는 오늘도 교양을 듣다 이상한 낌새에 고개를 들었다. 구경이라도 났는지 투블럭이 유리문 밖에서 목을 이리저리 빼며 안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트 씨와 눈이 마주치자 별안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얼굴에는 어제처럼 까만 선글라스와 마스크다. 매대 사이를 부산하게 오가더니 조용하고 신속하게 사고 나갔던 어제와 다르게 컵라면 하나를 10분 동안 골랐다. 여기를 힐끔거리는 것 같은데 선글라스 때문에 확증이 없다. 겨우겨우 계산대까지 오고서도 수상한 행동거지는 계속됐다. 괜히 주위를 둘러봤다가, 뒷머리를 긁었다가, 손을 가만 두질 못했다. 못내 이상하게 여긴 트 씨가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저쪽의 긴장감이 이쪽까지 느껴진다.

"세정제 앞에 있어요."

"예? 아... 네."

얼빠진 목소리가 돌아왔다. 버퍼링 걸린 것처럼 버벅대는 손이 마지못해 세정제 펌프를 눌렀다. 그가 겸연쩍게 양손을 문지르는 사이 계산을 끝낸 트 씨가 컵라면을 봉투에 담아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그는 안녕히 갔다.

딸랑. 

"어서 오세요."

"저기 혹시, 제 팬이에요?"

안녕히 가다 말고 어서 온 그가 선글라스를 벗고 한 말이었다. 드러난 푸른 눈에 기대가 감돌고 있었다.

제 팬이에요? 제 팬이에요. 제팬이에요... Japan이에요? 저요? 아님 그 육개장 사발면이요?

메타적인 문제로 불가피하게 트 씨라는 지칭을 쓰고 있지만 이 사람은 설정 상 한국인이고 농심 본사도 서울 동작구에 있다.

인트로가 예사롭지 않다. 촉이 곤두섰다.

주마등은, 죽음이 닥쳤을 때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뇌가 이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뒤지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뇌과학적 근거는 전무하나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한다. 지금 트 씨의 머릿속에서는 그 주마등 비슷한 것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온갖 서비스직을 전전하며 맞닥뜨렸던 진상들의 낯짝이 빠르게 넘어간다. 인터넷에서 본 황당무계한 진상까지 직접 겪었던 것처럼 섞여 돌아갔다. 정보가 너무 적다. 고의인가 무지인가 천성인가 유형 분류조차 되지 않았다.

아. 하나 생각났다. 호프집 뛸 때 혼자 와서 소주 진탕 퍼먹고는 자기 병 피리 부는 거 보라고 1분에 한 번씩 벨 누르던 병라리네스트. 연주인지 연속 개구 호흡인지가 끝나면 감상료로 오백 원을 요구했다. 돌아가면서 당한 직원들이 안 가려 하자 올 때까지 벨을 눌렀다. 이따금 벨 대신 병을 불었다.

그날의 부우 부우 공병 소리가 부활해 귓전을 울렸다. 너무 황당한 말을 들으면 맞게 들었는지도 분간이 안 간다. 황당하다는 건 말뜻을 한번에 알아들었다는 뜻도 된다. 나도 몰랐던 내 최애가 있다?

"누구신데요?"

질문에 비하면 무난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음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는지 백발 벽안의 남자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에요? 뭐야, 점장님이 그렇다길래 그런 줄 알았지. 아님 말고."

이건 또 뭔 소리야. 되물을 생각도 못하고 쳐다보자 남자가 선글라스 힌지를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눈꼬리가 휘었다.

"아니 그, 며칠 전부터 일하러 오신 분 맞죠. 전에는 못 봤어 가지고. 어제 처음 보고서 혹시 숙소인 거 알고 온 팬인가 해서... 낮에 점장님 계실 때 그냥 해 본 말인데 점장님이 그런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잠깐, 잠깐, 잠깐."

해명을 하려는 것 같은데 전혀 모르겠다. 트 씨가 계산대에 손을 짚고 눈썹을 찡그렸다. 어절이 강조하듯 끊어졌다.

"어제 봤을 때 팬이라고 생각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의심만?"

"왜?"

"우리 노래 듣고 있어서."

"..."

다시 물었다. 누구신데요.

다음은 이어진 문답의 요약문이다.

Q. 어디서 나온 분이십니까?

A. 데뷔한 지 두 달 된 아이돌 그룹의 리더입니다. 어제 걔는 멤버.

Q. 어디에 사십니까?

A. 요 앞 1단지. 이사 온 지는 2주쯤.

Q. 점장이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A. 했는데 그쪽 반응 보면 아무 생각 없었던 것 같다.

점장 제정신인가?

"대강 알았는데, 전 그쪽 노래 들은 적 없어요."

"지금 나오는 것도 우리 노랜데?"

그가 날렵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트 씨의 시선이 천장 구석에 달린 스피커에 가 닿았다.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는데 얼핏 들어도 보이 그룹 곡이 맞는다. 트 씨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제가 선곡한 게 아니고 본사에서 보내 주는 거예요. 음원 차트 그대로 흘려 줘요."

"아, 뭐야! 점장님이 알바가 튼댔는데. 그것도 뻥이었어?"

남자의 얼굴에 실망이 역력해졌다. 뻥은 아니다. 듣고 싶은 거 틀라고 했으니까. 근데 허락해 줬다고 무조건 다 하는 건 아닌데.

정말로 듣고 있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았겠다. 어제 트 씨는 나이 든 교수의 눌한 발음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그거 궁금해서 또 온 거예요?"

"아니, 나도 확신은 없어서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랬지. 우연인가 싶어서 한참 있어 봤는데 세 곡 연속 우리 노래가 나오잖아. 타이틀 빼면 다 수록인데. 그래서 맞는구나 하고."

세 곡이나 나왔을 줄은 몰랐다. 그러면 오해의 소지야 있다. 그런데 왜? 빵 뜨지도 않은 신생 그룹이 벌써부터 인기 차트를 석권했을 리는 없고. 둘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로를 마주 봤다.

아이돌 팬덤은 사람들이 자는 시간에도 스밍을 돌리기 때문에 부진한 그룹의 순위도 새벽에는 급상승한다는 것을 팬덤 문화에 무지한 두 사람이 알 리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팬 처음 봐요? 누가 보면 그쪽이 팬인 줄 알겠네. 게다가 일부러 숙소 근처에 취직하는 건 스토커 아닌가?"

"아잇. 말했잖아! 숙소 얘기는 농담이었다고. 그리고... 팬은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 봐. 뭐 그쪽은 팬도 아니지만."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안 물어본 얘기를 늘어놨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데뷔 100일 기념 팬미팅도 할 텐데 물건너가게 생겼잖아. 사녹 때나 멀리서 봤지 더 가까이서 만날 기회가 없었어. 우리 데뷔 곡 생각보다 흥했거든? 인기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데. 코로나만 아니면."

"은근슬쩍 반말 하시네요?"

"또래 같은데 그쪽도 놓으면 되지. 아님 보고 결정하시든가. 자. 어제 안 가져왔던 겸 해서 확인."

그는 이번엔 제대로 챙겨 온 민증을 내밀었다. 확인한 나이는 동갑이었다.

"그대로 존댓말 하든지 맘대로 해. ...나보다 나이 많은 건 아니지? 액면가는 안 많아 보이는데."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트 씨를 살폈다.

트 씨가 툭 뱉었다.

"멀린이 본명?"

"어? 응 맞아. 예명 같지? 그래서 그냥 본명으로 활동해."

그러더니 선글라스를 집어넣고 스마트폰을 꺼내서 두드린다. 금방 자기 이름을 검색해서 대령했다. 프로필 있고. 소속사 있고. 멤버 별로 사진도 있다. 단체로 올블랙을 까리하게 차려입은 걸 보아 각 잡은 치명 시크 컨셉이다. 멀린의 프로필 사진에는 완전히 다른 눈빛으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찍혀 있었다. 트 씨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머리도 살결도 새하얘서 블랙 입히면 눈에 띌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리더라고 하지 않았나. 성격은 시크랑 인사도 안 해 본 것 같다. 눈매 덕에 불량스러운 인상은 있는데 말을 끊임없이 한다. 멋있지. 그지그지. 왜 말이 없어. 별로야? 그럴 리가 없는데. 나 잘 나오지 않았냐? 사진발 내가 제일 잘 받아. 카감(카메라 감독)님 그냥 기절해. 크~.

반응이 밋밋하자 한껏 떠들던 목청이 불퉁해졌다.

"뭐야. 시시하게스리. 관심 없으면 없다고 하세요. 멋있기만 하구만."

"딴사람 같긴 하네. 그보다는 신분 확인 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신분 확이인? 아까 민증 줬잖아!"

"민증 말고. 아이돌이라고 거짓말한 걸 수도 있으니까."

우와아아. 공기 반 소리 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이없어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뜻이었다. 트 씨는 멀린이 자기 머리를 틀어쥐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도는 걸 멀뚱히 지켜봤다.

"야."

"왜."

"이 얼굴이 어떻게 아이돌이 아냐!"

"눈밖에 안 보이는데."

"눈에서 이미 견적 나오지! 와, 나 진짜 황당한 애 다 보겠네. 야! 마스크 핏 이런 일반인 봤어?"

"공적 마스크에 핏은 얼어 죽을..."

"야, 아니.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어딨는데. 그거만 알자."

"뭐 마려운 것처럼 돌아다니길래 도둑인가 했지."

"이젠 도둑이랜다..."

"많아 요즘에. 세정제나 마스크 훔쳐 가."

"그래? 그럼 내가 아까 뭐, 다시 돌아왔을 땐 자수하러 왔구나 했겠다?"

"양심의 가책이 무거워 보였지."

"하..."

멀린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스크 겉면을 만지면 손을 통한 감염 및 전염 위험이 있어 참았다.

외로이 감정을 추스린 그는 다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또 뭘 찾는 듯했다. 트 씨는 빗자루를 들고 일어섰다. 의혹도 풀었고 한참 노닥거렸으니 슬슬 일할 시간이었다. 멀린이 투덜댔다.

"넌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보는 눈 제일 없어."

"그거 영광입니다."

"이거 봐 봐."

"뭐? 됐어."

"뭔 줄 알고 싫대? 봐 봐."

멀린은 언제 펄펄 뛰었냐는 듯 1분이면 된다며 유튜브 화면을 들이밀었다. 트 씨는 흥미가 없었다. 보나마나 자기들 뮤비려니 했다.

"이 가수는 알지? 모르면 간첩이다."

빗자루를 막아선 화면에 나오고 있는 건 직찍 무대 클립이었다. 점내에 쩌렁쩌렁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익숙한 노래에 낯익은 얼굴. 시끄러운 음량에도 불쾌감 한 점 유발하지 않는다. 독보적인 음색과 호소력은 고르지 못한 음질 속에서도 유감없이 번뜩이며 듣는 사람을 휘어잡았다. 단번에 주의를 사로잡혀 들여다보고 있자 멀린이 싹 웃었다.

"노래 진짜 잘하지? 예쁘지?"

첫 음반부터 전 차트 1위를 독점하고 케이팝에 신풍을 일으켜 스스로가 새로운 장르로 떠오른 싱어송라이터. 라고 멀린이 종알종알 설명했다. 발라드는 말하면 입 아프고 팝과 재즈와 포크에 트롯까지. 장르 가리지 않고 타의 추종을 불허해 생태계 교란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고 한다. 다룰 수 있는 악기는 자그마치 8개가 넘는다. 그녀를 두고 감히 음역이나 기교를 논하는 것은 무례에 준했다.

디바. 작년 초 혜성 같은 데뷔로 지금까지 고공행진을 이어 오고 있는 그녀의 행적이 눈부시다는 것은 아이돌은 안중에도 없는 트 씨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에 이른 그녀의 영향력은 거의 레이디가가셀레나고메즈테일러스위프트아리아나그란데아이즈원블랙핑크송가인이다. 그래서 이건 왜?

트 씨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쳐다봤다. 대뜸 뭘 보여 주나 싶다. 멀린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좋으니까 보라고. 디바는 싫다는 사람도 못 봤어. 너 같은 알못도 디바는 알아보겠지. 좋지? 그치? 사실 내가 팬이야. 너무 귀여웡. 아, 좋아 안 좋아?"

성가시다. 자기 PR이 실패하니 최애 PR이다. 트 씨가 무어라 대꾸하려는 찰나 딸랑. 문이 열리고 초록색 플라스틱 상자가 줄줄이 밀려들었다. 뒤로는 종이 박스가 부지런히 하차하는 중이었다. 언제나 오는 대로 어림잡아 열 다섯 박스다. 직원은 날랜 속도로 물류를 이따만큼 들여 놓고는 다음 행선지로 바람 같이 떠났다. 입구가 물류로 인해 순식간에 비좁아졌다. 적막한 새벽을 가르고 들이치는 일거리를 말을 잃고 바라보던 멀린이 물었다.

"...도와 줄까?"

트 씨는 호의에 미소로 화답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구요, 라면은 집에 가셔서 맛있게 드세요."

다음날 트 씨는 20분 일찍 출근했다. 10분 전에 도착하는 평소보다도 10분 더 이르다. 점장은 카운터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스포츠 뉴스를 보고 있었다. 트 씨는 자못 비장한 걸음으로 그 앞에 섰다. 따지기 전에 손 세정부터 하면서도 기백은 칼을 가는 듯했다.

"빨리 왔네요? 살 거 있나?"

"1단지 사는 흰 머리 아시죠."

점장은 바로 떠오르지 않는 듯 생각을 골똘히 했다. 다소 느릿한 반응이 나왔다.

"아... 아이돌인지 뭔지 한다는 걔. 둘이 어젠가 봤대죠? 엊그젠가."

엊그제 보고 어제도 봤네요 덕분에. 트 씨는 말을 눌러 삼켰다.

"제가 그 사람 팬이라고 하셨다면서요."

"안 그래도 그 친구도 와서 똑같은 소리 했어요. 애먼 사람 잡았다고 엄청 뭐라고 하데. 쪽 다 팔았다고."

"점장님도 모르는 얘기 하셔서 그런 거잖아요. 오해하고도 남겠던데."

"왜요? 그 친구가 뭐라고 해요?"

"그게 아니고 손님한테 확실하지도 않은 얘기 하시면 난처해요, 제가."

확실한 얘기도 마찬가지지만 우선 참았다.

"미안해요. 그때 되게 졸렸는데 계속 뭘 물어보더라고."

"...졸려서 그러신 거예요?"

"아뇨. 팬은 맞는 줄."

"..."

"처음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 오셨잖아요. 호랑이 같이. 나 깜짝 놀랐어요. 다른 지원자 부르지도 못하게 하고."

주식도 안 했는데 엔백만 원이 십만 원이 되면 다 그렇게 될 것이다.

"뭐 사정이 있구나 했죠. 이 근처에 아이돌 그룹 산다던데 팬인가... 하던 차에 그 머리 하얀 친구가 자기들 노래 듣고 있니 어쩌니 하니까. 아 그럼 맞나 보다..."

"..."

느긋한 말씨를 듣고 있자니 골이 아파 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열 내는 사람만 손해였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이보다 더한 인간은 쌓으면 하늘에 닿을 만큼 봤다. 악덕 고용주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퇴직 사유에 들여쓰기도 못 내민다. 특히 이 시국에는. 엎드려 절 받은 꼴이지만 사과했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아니니 딱 잘라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아무튼 제가 직접 드린 말씀 아니면 그러지 마세요. 손님도 곤란하잖아요."

"알았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그렇게 화난 것 같진 않던데."

"뭐라고 했다면서요?"

"했죠. 근데 저보다는 그쪽 얘기를 더 많이 하던데. 아이돌인데 못생겼다고 욕했어요?"

그런 적 없다. 대관절 말을 제대로 전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겠대요?"

"조만간 할 건가 봐요."

"시큐리티 부를게요."

"이왕 안면 튼 거 친하게 지내요. 나이 친구 아니야? 단골인데 잘 봐 두면 서로 좋죠. 너무 뭐라고 하지 말고요."

"귀찮게만 안 하면 상관없는데 철면피던데요."

"연예인이라 그렇지. 무뚝뚝한 것보단 낫잖아요. 인물 훤하죠? 붙임성도 좋고."

트 씨가 우려하는 게 그거였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어이쿠 사람 잘못 봤습니다 즉각 퇴장해서 쪽팔림에 다시는 얼굴 못 비추고 이불 속에서 셔플이나 밟을 텐데 그럴 조짐이 없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자화자찬하다 자기 최애 영업하는 거 봤지.

백 퍼센트 또 온다.

"친구 하기 싫으면 팬 해 주면 되죠. 한창 반응 궁금할 시긴데 심심한가 봐요."

"그러니까 저는,"

멈칫. 제발 개족같은 소리 stop it을 둥글게 말하려던 트 씨가 일시 정지했다. 팔짱 끼고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자 전에 없던 여유로움을 입가에 떠올렸다. 알바가 점장을 향해 선언했다.

"까짓거 한번 해 보죠."

몇 시지. 눈 뜨기보다 그 생각을 먼저 했다. 알람 안 울렸음(아마도). 깨운 사람 없음(아마도). 방 안 새까맘. 아... 밥 먹고 넷플릭스 보다 기절했지.

멀린은 주섬주섬 이불을 걷었다. 밤 10시를 넘겼고 스마트폰 배터리는 42%였다. 요즘 뜨는 콘텐츠. 대 집구석 시대, 얼마나 기절하게 재밌으면 넷플릭스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시청 기록을 빅데이터 삼아 자신 있게 추천하는지 함 보자. 기절하게 재미없었다. 그 결과가 때아닌 숙면이다. 베고 잔 왼팔이 저렸다. 어우 난 왜 신파만 보면 잠이 오냐. 스마트폰 꽁무니에 충전기를 꽂고 방에서 나왔다.

조용하다. 거실에도 불이 꺼져 있다. 뒤늦게 저스트댄스에 빠진 멤버들이 저녁 먹고 3시간째 털고 있을 시간인데 아무도 없다. 어딜 갔어? 멀린은 잠 덜 깬 채로 집안 배회하다 어두운 중 유일하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문을 열었다. 민증 대리 인증 시켰던 멤버가 침대 위에서 에어팟을 꽂고 있었다.

"다 어디 갔어?"

"편의점. 너 깨웠는데 안 일어난다고 자기들끼리 갔어. 금방 갔는데."

"아... 그래? 걔넨 뭘 또 사냐. 전에 사 온 거 쌓여 있는데."

"알바생 보러 간다던데?"

"뭐?"

피가 싹 내려갔다. 누굴 보러 가?

"그 왜 우리 노래 듣고 있었던. 얘기 듣고 애들 다 궁금하다 그랬잖아."

"다 갔어? 4명이서?"

"어. 왜?"

왜왜. 왜 그러는데. 너 빼고 가서 그래? 인사만 하고 올 거랬는데. 어리둥절하게 묻는 앞에서 얼어 있던 멀린이 접혔던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미친 미친 미친 미친. 이놈의 입. 이놈의 입. 고3 담임이 너는 입이 방정이랬는데 틀린 것 하나 없다. 바지 잽싸게 갈아입는 동안 오만 생각이 다 났다. 수습 어떡하냐. 그거(트 씨) 또 얼마나 질색팔색을 할 거야. 그날 왜 애들한테 설명 안 했더라? 왜긴 왜야. 다 꿈나라 갔길래 혼자 컵라면에 밥 말아 먹고 홀랑 까먹었지. 우당탕 소리 내면서 현관 열어 젖혔다가 또 우당탕 소리 내면서 뛰어올랐다.

밤공기 죽인다의 꽃말은 아 맞다 마스크!

재빠르게 입 코 덮고 또 또 뛰쳐나가려다, 방문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넌 왜 안 갔어?"

"난 너랑 봤잖아."

영화라도 본 것처럼 말하고 앉았다. 한 명이라도 안 간 게 불행 중 다행이긴 한데. 유감스럽게도 불행은 이제부터다.

유리벽 너머서부터 이미 카운터에 우글우글한 사내놈들이 보였다. 아찔한 정신 다잡고 멀린은 아까처럼 뛰는 대신 보폭을 크게 해서 걸었다. 가자마자 쟤들부터 쫓아내고, 그리고, 아 몰라. 가서 생각해. 언젠 계획 세우고 살았다고. 무계획이 계획이다.

양문이 우렁차게 제껴졌다. 매달린 종이 쩔렁쩔렁 소리를 질렀다. 멤버 놈들은 옹기종기 카운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계산대 위에 햄스터라도 있는지 숙인 머리들을 맞대고 있다. 그게 아니면 마피아 게임이라도 하는 모양새다. 그 가운데에서 트 씨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멀린을 똑바로 봤다. 어떡해~. 쟤가 마피안가 봐~. 멀린은 로봇처럼 뻣뻣하게 웃었다. 금색 눈이 이쪽을 노린다. 과연 잡아먹을 듯한 무서운 형상...이 아니다. 도끼눈을 뜨고 있지도 않다. 트 씨는 초킬로 멀린을 찍는 대신 여상스럽게 알은척을 했다.

마침 왔네. 이리 와 봐.

엥?

오라기에 갔다. 검거나 색 입힌 머리들 사이로 두꺼운 종이 한 장이 보였다. 귀퉁이마다 어지럽게 무언가 적혀 있다. 싸인이다.

따끈따끈하게 즉석에서 그려 준 멋들어진 친필.

마지막 주자가 멀린에게 네임펜을 넘겼다. 멀린은 얼결에 받아들고 트 씨를 멍하니 봤다. 트 씨가 손끝으로 종이를 톡톡 쳤다.

"싸인."

"장난하냐?"

내려갔던 피가 거꾸로 솟았다. 관심 없다 못생겼다(?) 도둑이다 악담 퍼붓고선 우리 애들 꾀어내서 뻔뻔하게 싸인? 무슨 더러운 꿍꿍이인진 몰라도 싸인이 받고 싶으면 최소한 그에 준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예의라는 걸 빈말로라도 구색을 갖춰야 했다. 어제 같은 일이 있었으면 특히 더. 헐 아이돌이다. 완전 팬이에요. 싸인 한 번만용. 젭알 젭알...은커녕 구덩이 파 놓고 불공정 계약서 들고 협박하는 조폭 깡패다. 싸인은 뭔 놈의 싸인. 알탕 드라마 찢고 나왔냐?

멀린은 멤버들을 돌아봤다. 하나같이 맑은 얼굴로 멀린을 종용한다. 네 싸인 여기. 여기 빈 데다가. 야야 도현이도 오라 하자. 전화 걸어 봐. 완전체 고.

천진한 웃음들이 심장을 엔다. 순진한 멤버들은 오프 미팅이 고픈 나머지 앞에 둔 게 팬인지 사기꾼인지도 몰랐다. 팬 비슷한 거라도 발견하면 무인도에 어느날 떨어진 것처럼 사람! 사람이다! 앞뒤 제치고 2m 반경까지 달려간다. 기대와 설렘으로 무장한 관심 굶은 신인돌 네 명쯤 구워삶는 건 누워서 채널 돌리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미어지는 가슴으로 생각했다. 얘들아. 우리 꼭 대박 나자. 대박 나서. 레드 카펫 안 깔아 주면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성공해서 팬코(팬 코스프레) 하는 지능형 사기꾼 따위는 입밴으로 걸러 버리자.

"어 도현 뭐해. 걍 있어? 아니 우리 편의점 왔잖아. 너 잠깐..."

멀린이 멋대로 전화를 바꿔 들었다.

"어 나. 아니 그냥 있어. 애들 다 갈 거야. 어어."

멀린은 끊기도 멋대로 끊고서 상황 파악 부족한 멤버들을 문 쪽으로 몰았다.

"볼일 다 봤으면 올라들 가셔. 난 이 인간이랑 대화 좀 해야겠어."

길쭉한 남자들이 양치기 개에 몰린 양떼처럼 어영부영 밀려났다. 어어 어어. (왜 뭔데?) (몰라.) 이따 와서 말해 줘?

여전히 손님이 없는지 사람이 빠지자 도로 휑해졌다. 멤버들이 멀리 사라지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멀린은 고개를 돌렸다. 있는 힘껏 쌍심지를 켜고 뚜벅뚜벅 걸었다. 카운터로. 뻔지르르하게 떡하니 팔짱 끼고 서 있는 놈을 향해. 코앞까지 다다라 손바닥으로 계산대를 쳤다. 탕!

"왜 하룻밤 새에 생각을 고쳐 드셨나."

"심경의 변화가 좀 있어서."

"그러니까 그 연유를 묻는 거잖아요."

"뭐... 점장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피차 좋은 거 아니겠어? 너희 멤버들은 좋아하던데."

"피차 좋긴 뭐가 좋아. 관심 반푼어치도 없다고 먹금한 게 누군데?"

"필요하면 바꾸는 거지."

필요? 바꿔? 멀린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무슨 생각 하냐, 너? 나 하나면 몰라도 애꿎은 애들한테 팬이라고 거짓말을 왜 해?"

"거짓말 안 했는데?"

"웃기시네. 안 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헤헤 웃으면서 잘도 싸인해 줬겠다?"

"진짜야. 원래 아니라고 설명했어. '제가 리더 분께 오해라고 말씀 드렸는데... 전달이 안 된 모양이네요?'"

"..."

"이것도 인연이니까 싸인 받고 싶다고 했지. 실은 어제부터 관심 생겨서 노래 다 들어 봤다고."

"...그건 진짜고?"

"의심이 많네. 듣기만 했겠어? 아는 사람들한테도 돌렸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거야말로 뻥...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낯 위로 트 씨가 카톡 화면을 불쑥 내밀었다.

https://youtu.be/hFQL7BS6lrs

아는 사람 데뷔했는데

 오후 10:01  듣고 인증

너 위에 건 왜 대답 안함?  오후 10:01

저ㅅㅋ  오후 10:01

읽어라 좀

ㅇㄴ  오후 10:02

지할말만하고가  오후 10:02

뭔데ㅠ저게  오후 10:03

아는사람 누구??

뻥ㅋㅋㅋ  ¹  오후 10:04

연식아 이따 우리집 와서

김치 갖고 가  ⁴  오후 10:10

홍보 되긴 하는 건가? 인간관계가 멀쩡한 건지조차도 의심스럽다. 인증 아무도 안 했다. 적어도 이중에는 링크 눌러 본 사람 없는 것 같다. 이걸 고마워해, 말아... 게슴츠레 보고 있던 액정 화면이 뒤로 쑥 물러났다.

"여기 말고도 들어가 있는 곳은 전부 돌렸거든? 못해도 10명은 들었을 거야."

"어... 그래. 그러면 고맙고."

"내용 봤다시피 기대는 하지 말고."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거냐?"

"마케팅은 소속사가 할 일 아냐? 개인이 돕는 건 이 정도지."

"사람이 어떻게 된 게 한마디도 안 빼놓고 얄밉지?"

"그거 들으라고 하는 말?"

"독백이니까 대꾸하지 마라."

트 씨는 키들거리며 카운터 안쪽에서 뭘 꺼냈다. 불룩한 검은 봉투였다. 얼떨결에 받아 안은 멀린이 눈을 꿈뻑였다. 차갑고 딱딱하다. 또 묵직하다. 입구를 벌려 보니 뚱바 6개가 부대껴 들어 있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전에 샀던 걸로 골랐어. 비싼 건 서로 부담스러울 것 같고... 네가 대신 좀 전해 드려."

"야, 이거... 사비냐?"

"사비지, 그럼. 편의점은 직원 할인도 안 돼."

"아니 뭐, 이런 걸... 다 주고 그래. 미안하게. 야... 고맙다. 잘 마실게."

멀린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봉투 손잡이를 바투 잡았다. 잠시 둘 다 말이 없었다.

"근데... 진짜 왜 갑자기 챙겨 줘? 점장님이 하라고 하신 거면 안 그래도 되는데."

"걱정 마. 나도 다 얻는 게 있으니까."

"엉?"

"빨리 해, 싸인."

눈앞에서 아까 멀린이 치워 버린 네임펜이 까닥였다.

"오늘 안 오신 분 한번 들르시라고 해 줘. 그분 것도 받으면 코팅해서 잘 보관해 뒀다가,"

"...뒀다가?"

"대박 나면 팔아야지."

멀린이 웃었다. 실없이 하하하 웃었다. 눈은 안 웃었다. 그러다 약 다 된 리모컨처럼 뚝 그쳤다. 멀린은 밖으로 나갔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서였다. 슬슬 들어오는 밤공기가 선선했다.

야외 테이블 한 켠에 뚱바 봉다리가 놓였다. 멀린은 늘어선 테이블 가운데 서 있었다. 트 씨는 여전히 카운터 안쪽에 선 채 지켜봤다. 카운터에서 야외 테라스까지 열 걸음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편의점 앞에 위치한 도로로 헤드라이트 켠 소형차가 지나갔다.

밤길을 오가는 행인들 사이로 발성 트레이닝으로 다져진 성량이 터졌다.

나와 임마. 붙자. 나와! 너 임마 그거 벗고 나와. 앞치마 아니 유니폼. 어. 유니폼 벗고 나와. 안 들리냐? 자식아. 나오라고오오오...

트 씨는 고민했다.

폭행 위협을 받고 있는가?

네.

신변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는가?

딱히.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가?

네.

그럼...

시큐리티를 부를까?

아직.


후편: 또일하기싫으면 쓸수도있고아닐수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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