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연극이 끝난 뒤에

G24 스포일러 / 케흘마르 / 아포칼립스 엔딩 이후 날조

이차 by 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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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작업물(2020. 07. 15)


타라에 어둠이 내렸다. 왕성 2층으로 향하는 문에서 나타난 기사가 홀로 들어섰다. 저녁 청소가 끝난 홀은 잘 닦여 반질반질했다. 수면처럼 비치는 바닥을 그리브를 장착한 다리가 가로지른다. 귀족들이 어지러이 돌며 춤추는 연회장을 마르에드는 정해진 선로를 착실히 밟듯 나아갔다. 왕성 입구에 이르자 병사들이 먼저 알아보고 경례했다. 이윽고 육중한 양문이 열렸다. 두 개의 달이 감싸는 왕성의 정경은 낮과는 다른 운치가 있었다. 마르에드는 걸음을 서둘렀다. 다다를 곳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그리 됐다. 라데카가 그리는 궤적처럼 브레이드가 나붓나붓 흔들렸다.

뜰을 빠져나온 마르에드는 남쪽으로 걸었다. 밤이 찾아온 수도 이곳저곳에 등화가 밝았다. 골목에서 나타난 길고양이가 알은척을 하는가 싶더니 금세 저만치 뛰어가 버렸다. 고양이는 마르에드의 행선지 쪽으로 꽁무니를 뺐다. 걸어가다 보니 돌벽 사이 구석에 사람이 먹이를 준 흔적이 있었다. 그릇에 고개를 박고 첩첩거리던 고양이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눈에 익은 그릇이었다. 처음 보는 고양이가 잠깐이지만 가늠하듯 다가온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냄새가 같아서였을까.

마르에드가 멈춰 선 곳은 고양이 밥그릇과 멀지 않은 집이었다. 여상하게 문을 열려다 마음을 바꿔 가볍게 두세 번 두드렸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의아한 얼굴이 마르에드를 보고 짐짓 퉁명스러워졌다. 마르에드가 웃고 있던 탓이다.

"왜 두드려? ……열쇠 잃어버린 줄 알았잖아."

"다녀왔어."

"……어서 와라."

마르에드를 맞이한 것은 귀가 잘린 은발의 엘프, 케흘렌이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훈기와 함께 갓 만든 음식 냄새가 훅 풍겼다. 음, 이 냄새는 크로크 무슈. 그리고……오믈렛?

"씻고 먹을래, 먹고 씻을래."

"음, 그럼……."

두 사람은 다른 집과 여상한 평화로운 저녁 풍경에 녹아 있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을 생기를 띤 이 집은, 한때 모르비스의 연구실이었던 곳이다.

*

케흘렌의 처분을 결정하는 회의에는 마르에드도 참석했다. 국왕으로부터 원정대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공을 인정 받은 대우였다. 회의석의 분위기는 자못 비장했다. 에린의 파멸을 목전까지 이끈 검은 달의 교단의 핵심 세력 중 하나이니만큼 가혹한 처사가 내려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참석한 모두가 입매를 굳게 잠그고 엄숙하게 앉아 있는 장내에 살벌한 긴장감이 도사렸다. 마르에드는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다.

회의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론이 빗발쳤다. 각자 진지한 태도로 예우를 갖춰 말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결국 화살처럼 쏟아지는 비난이었다. 예상한 흐름이었다. 당연함은 물론 하나같이 마땅하기 그지없는 주장들이었다. 올바른 입에서 케흘렌의 죄가 물살처럼 토해져 나왔다. 신도들을 유괴하여 산제물로 바친 죄, 아이들마저 혹사시킨 죄, 필리아를 습격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힌 죄, 타라를 불바다로 만든 죄, 이하 직접 행하지 아니 하였다 하더라도 에린과 국왕의 안위를 위협한 모든 행위에 적극 가담한 죄.

죄, 죄, 죄.

마르에드는 최대한 평온을 가장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할 것 같았다. 내뱉어지는 죄목들에 마음이 고스란히 짓눌렸다.

에레원은 개회 선언 이후 발의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기실 집의가 예정된 순간부터 결론은 나왔었다. 이곳은 기정된 목적지로 달려가는 일치단결의 장이었다. 교단이 벌여온 행각을 말미암아 국왕이 독단으로 처분을 내렸더라도 여론은 지금과 거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에레원이 의제를 논할 공석을 마련한 것은 에린 전체를 아우른 치명적이고도 이례적인 사태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에레원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갑론을박이 없는 토의는 길 필요도 없었다.

"의견이 좁혀진 것 같네. 다들 같은 생각인 거지?"

"자, 잠시만요. 외람되지만 에레원 폐하. 아직 누님, 아니 마르에드 씨가……."

불안한 눈길로 마르에드를 힐끔거리던 피르안이 급히 나섰지만 에레원은 고개를 돌렸다.

"이의가 없으면 이대로 처분 결단을 내리겠어. 서기."

"……폐하."

"뭐지, 마르에드?"

"이의 있습니다. 교단의 부관, 케흘렌의 극형에 반대하는 바입니다."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혹자는 경악에 물들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교단 괴멸에 크게 기여한 자가 처형에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었다. 더구나 마르에드는 에레원 국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필해 온 호위 기사다. 일말의 동정심을 오래도록 쌓아온 두터운 충성심과 맞바꿀 셈인가? 그것은 차라리 반역에 가까웠다. 그러나 마르에드는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의연함을 내비쳤다. 에레원이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그건 어째서지?"

"그자의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를 벌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그자가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네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사면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겠다는 결심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에레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네가 원하는 처사가 따로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케흘렌을 제게 일임해 주십시오."

"그 말은?"

"가석방을 요청합니다. 제 보호 관찰 아래 그가 지은 죄의 무게만큼 사회에 봉사시키고자 합니다."

숨죽였던 장내가 단숨에 소란해졌다. 누군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 대역죄인에게 기회를 주자는 말씀이십니까! 그자가 속죄로써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것은 목숨밖에 없습니다. 갱생을 빌미로 삶을 부여받을 만한 죄가 아니란 것쯤은 아시지 않습니까! 동조하는 원성이 비수같이 쏟아졌다. "하물며 마르에드 님이 그런 요청을 하시는 것은……!" 그 속에서 첨예한 음성이 공기를 가른 순간, 에레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일순에 웅성거림이 사그라들며 에레원에게 이목이 집중됐다. 마르에드는 조금 전부터 묵묵히 에레원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레원 역시 올곧은 시선으로 마르에드를 향했다.

"마르에드, 너는 냉철하니까 속없이 한 말이 아닐 거라고 믿어. 그러니 내 질문에 답해 줬으면 해."

마르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석방이 되면 네가 감시할지언정 그가 거리를 활보하게 될 텐데, 사람들의 불안감은 어떻게 할 거지?"

"아시다시피 교단의 괴멸 이후 그는 전투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엘프에 불과할 뿐더러 사람을 전처럼 간단히 해치지는 못할 겁니다. 무엇보다 그에게 더 이상 악행을 일삼을 의사가 없다는 것은, 조사에 성실히 임한 태도로 미루어 볼 수 있다고 감히 추측합니다."

에레원은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케흘렌은 그랬으니까. 체포되는 과정에서 저항도 하지 않았으며 이어지는 구속 수사에는 모르는 것만 빼고 전부 털어놓았다. 냉랭한 적의가 사라진 얼굴은 체념한 듯도 무감한 듯도 했다. 그는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그를 집어삼킨 짙은 탈력감에 자해나 자살을 우려한 에레원이 감시를 강화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케흘렌은 그저 손발을 구속당한 채 독방에서 눈을 감고 뜨기만을 반복했다. 수심을 감추지 못한 마르에드가 몇 번 눈길을 주고 말았을 때도 케흘렌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소금 기둥이라도 된 것처럼.

단단해야 했다. 케흘렌의 눈을 떠올리며 마르에드는 탁상 아래에서 깍지 낀 두 손을 붙들어 맸다. 묻는 건 에레원이었지만 사방에서 십수 쌍의 눈이 마르에드를 주시했다. 대답 하나 허투루 해선 안 된다는 긴장감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어수룩한 낌새를 주었다간 끝이다.

에레원의 질문이 이어졌다.

"너는 그를 사회로 복귀시키려는 거지? 솔직히 말해 쉽지 않아 보이는데."

생존할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그 말대로였다. 케흘렌은 운 좋으면 일자리를 얻는 데 고초를 겪을 것이었고 운 나쁘면 길가에서 돌 맞아 죽을 것이었다.

"녹록지 않으리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뜸을 들이던 마르에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 입주 가사 도우미로 고용하려 합니다."

결과적으로 케흘렌은 살았다.

그날 마르에드는 케흘렌의 처형을 면하기 위해 사람이 꽉 찬 의석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케흘렌을 살리고 싶어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케흘렌을 살리고 싶어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라는 에레원의 말에 따르며 생각했다. 값없는 호소다. 제 무릎에는 겨우 흙먼지가 묻었지만 그는 저를 살리려고 발끝까지 무엇을 뒤집어썼나. 자신의 무엇을 송두리째 바꾸고 또 버렸나. 지닌 이름은 나날이 무게를 덜 수 없는 것이 되어 왔다.

기적적으로 뒤집힌 판결이 내려졌다. 해산 명령이 떨어진 장내는 어수선했다. 하나둘 자리를 뜨는 얼굴들 모두가 찜찜함을 지우지 못한 채였다. 마르에드만이 떠나는 이들의 등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시네이드가 만류했지만 마르에드는 마지막까지 고집스러웠다.

그녀는 물러가기 전에 마르에드 스스로의 공적과 인망이 두터운 덕분이라고 격려했다.

바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피르안과도 짧게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피르안 역시 발의 초반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이었다. 마르에드가 다시금 예우를 갖춰 감사하려 하자 그러실 필요 없다며 제가 더 몸을 낮춰 요란이었다.

"그럼……. 얘기 나누세요."

피르안이 닫히는 문 사이로 웃었다. 마르에드는 그가 에레원을 보고 말한 것을 알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피르안까지 어울려 주리라곤 생각 못 했네요. 빚이 생겼군요."

"글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걸."

에레원이 머리카락을 꼬며 딴청을 부렸다. 몰래 사탕을 먹다 들킨 아이처럼 뺨이 붉었다. 그러다 마르에드로부터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시선을 느끼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소녀 티를 벗지 못한 국왕에게서는 어느덧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국왕의 호위 기사가 국왕을 위협한 자를 살려 달라는 건 반역에 가깝다는 거, 너도 알지? 이건 우리의 신뢰 문제기도 해."

"알고 있습니다. 주제 넘는 발언입니다만 폐하가 원치 않으신다면 저는 기사 작위를 내려놓을 각오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서 하는 말이야? 마르에드도 꽤 영리해졌는걸."

"예? 그런……,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에레원은 짓궂은 농담을 하고는 후후 웃었다. 마땅한 반응을 찾지 못해 멋쩍게 서 있는 마르에드에게 자색 눈동자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기사 마르에드가 아닐 테다. 지키고자 하는 것에 따라 지키는 이의 이름도 달라지는 까닭이다. 일생의 절반을 자신에게만 맹세해 온 기사가 타자를 위해 일신도 내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이 섭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그 명정한 의지를 직접 마주하는 것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나저나 입주라니……. 마르에드답지 않은 발상이라 놀랐어."

"그런가요? 친밀한 사이니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그래? 하, 하긴 마르에드 나이에는 이상하지 않은 거려나……."

에레원의 목소리가 갑자기 기어들어갔다. 어색하게 손가락을 모아 꼬물거리면서. 마르에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근심으로 물들었다.

"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폐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마르에드는 케흘렌을 빤히 쳐다봤다. 케흘렌은 마르에드를 흘금흘금 훔쳤다. 마르에드의 크로크 무슈는 기세 좋게 줄어들었다. 케흘렌의 수저 쥔 손은 미적거리기만 했다. 음식을 앞에 둔 예의가 아니라고 내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속으로 항변했다. 저 깨끗한 물빛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곧바로 타박이 돌아왔다. 왜 없어? 많잖아. 국왕도 있고. 금발 하이미라크 신자도 있고. 수긍했다. 그러네. 이번엔 다소 거친 격려. 왜 쫄아? 죄지었어? 주눅 들었다. 지었지……. 많이……. 성을 냈다. 그거 말고! 그냥 쳐다보는 건데 왜 안절부절못해? 힘을 얻었다. 맞아! 친구 얼굴 쳐다보는 게 대순가. 할 말 있냐고 자연스럽게 물어 보면 된다. 자연스럽게.

"왜, 그렇게 보……냐?"

멍청아!

케흘렌이 속으로 이마를 때리고 있을 때 마르에드가 툭 내뱉었다.

"우린 이상한 걸까?"

"뭐?"

"이렇게 사는 거 말야."

자학을 멈춘 케흘렌은 문득 집안을 돌아봤다. 처음에 비하면 몰라보게 생활감이 생겼고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안락한 집이다. 케흘렌이 매일같이 쓸고 닦고 구석구석 광을 내어 놀라울 만큼 청결하다. 이런 집에서 살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뭐가 이상해? 잘만 살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폐하가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

"국왕님이?"

"나답지 않다고…,"

말하던 마르에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웃긴지 먹던 샌드위치까지 내려놓고 점점 크게 웃었다. 케흘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르에드가 왜 웃는지 깨달은 탓이다. 자기도 어색한 마당에 모른 척은커녕 시원하게 웃어버리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웃지 마!"

"국왕님, 국왕님이래. 푸흐흐."

"야!"

불 밝힌 창틈 새로 경쾌한 웃음소리가 샜다. 돌벽 아래 배를 깔고 졸던 고양이가 반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르비스의 사몰 이후, 남겨진 그의 연구실이 거처로 정해지면서 청소는 마르에드와 케흘렌의 몫이었다. 워낙에 바지런한 엘프의 성미 덕에 마르에드가 구태여 힘을 들이지 않아도 낡은 빈집은 알아서 구색을 갖춰 갔다. 미르올과 바투르는 피르안을 따라 정리를 도우러 왔다가 일감이 없어 빈손으로 놀러 온 꼴이 되었었다.

케흘렌이 눈코 뜰 새 없이 청소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자주 멈췄다. 먼지를 털고 거미줄을 쓸고 얼룩을 지우는 일련의 과정. 그 안에서 오래된 사진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래서 손발을 내저어도 밀려드는 기억에 어찌할 길 없이 휩쓸리고 마는 것 같이.

기존했던 흔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을 그가 꺼린다는 걸 마르에드는 금방 알았다. 고작 두 사람 쓰기에는 너무 넓은 긴 식탁을 치우지 않은 것도 그 때문에서였다. 이사 전날, 식탁 옆에 서서 상념에 잠긴 곁으로 마르에드가 넌지시 다가섰다. "모형 음식이 놓여 있었대." 물끄러미 바라보던 탁기 어린 눈이 수면 위로 이끌려 나왔다. "그랬구나."

물기를 머금은 창빛 머리카락이 결국 케흘렌의 손에 쥐였다. 마르에드라고 칠칠치 못한 게 아닌데 목욕을 마치자마자 감기 걸린다고 쉼표 없이 닦달을 하더니 기어코 마르에드를 제 앞에 등 돌려 앉혔다. 말본새와는 다르게 흰 수건이 조심스레 뒤통수를 감싸왔다. 곧이어 마르고 단단한 손끝이 이곳저곳 꼭꼭 눌렀다. 물기가 남지 않도록 유념하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껍데기가 여물지 않은 채 나온 새알. 섬세한 모양으로 세공된 유리를 다루듯이. 케흘렌은 마르에드가 자칫 깨져 버리기라도 할 양 여겨졌다. 이 비취가 산산조각 나 쏟아져 내리면 어떡하지. 한아름 물길이 돼서 나를 적시면. 이미 소금처럼 녹아 버렸는데 햇빛에 타 사라지면. 나는 모르는 곳으로 네가 가 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이 정말로 바다 물결처럼 크게 일렁였다. 사위가 안개가 걷히지 않은 수평선 같았다. 서로를 겨누었던 무기 끝에서 전해지던 진동을 기억한다. 사력을 다해 상처 입히려 했던 최악의 순간들. 이제는 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손이 멈췄음을 느낀 마르에드가 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케흘렌의 얼굴이 확 잡혀 올라갔다. 말간 눈동자가 안개 속에서도 투명하게 응시한다. 깊은 건 저 눈인데 하염없이 제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을 감싸쥔 손이 따뜻했다. 마르에드 자신이 가진 색과 정반대의 온도다. 다정한 손끝이 아이를 달래듯 하얀 눈가를 쓸었다. 부옇게 어른거리던 눈물이 툭 떨어지고 선명해진 형상이 그득 들어찼다. 마르에드는 걱정을 띠었지만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케흘렌은 얼빠져 있던 입을 어물어물 움직였다.

"……그냥. 눈에 뭐가, 들어가서."

"겁이 나?"

입이 꾹 다물렸다. 마르에드 앞에서는 좀체 숨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훤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이는 사람이었나, 우리가. 어쩌면 오직 서로에게만 허물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리고 감추려는 행동은 뭐든지 얄팍하고, 커튼처럼 간단히 젖혀졌다.

"겁내도 괜찮아, 마르에드."

"……."

"우리는 무서워도 틀린 선택을 하지 않잖아."

곧고 짙게 뻗은 속눈썹이 회상하듯 아래로 잠겼다.

"그때도……. 우리 둘 다 작고 약했고, 다른 건 비교도 못할 만큼 무서웠는데도, 네가 날 지키고 내가 널 기억했잖아."

"……."

"다시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 이제 내가 널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까."

케흘렌의 고개가 재차 떨어졌다. 또 울어? 아니, 아니……. 언젠 울었다고 그래……. 밑단이 뻣뻣하게 젖은 목소리였다. 마르에드는 키들거리며 잔뜩 수그린 은색 머리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와중에도 그건 쑥스러운지 케흘렌이 팔등으로 밀어내는 듯했지만 시늉뿐이었다.

가만히 안겨 있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하고 안심되고, 따지자면 호사였다. 진짜 문제는 감정을 가라앉힌 뒤였다. 어릴 때부터 친했다지만, 수많은 위기를 뛰어넘고 극적으로 상봉했다지만 장성한 두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꼭 끌어안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떨어지는 게 두렵다. 벌써 공기가 어색하게 식어간다. 케흘렌은 다시 우는 척을 할까 하고 잠깐이지만 정말로 고민했다. 난감한 건 마르에드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서 어린 시절이 엄지로 책장을 튕긴 듯 빠르게 넘어갔다. 이렇게 꼭 안은 적이 있었던가. 어릴 때도 곧잘 안았다면 그때의 버릇으로 넘길 수 있다. 머리 땋기 했고, 손 잡기 했고, 담요 같이 덮기 했고, 뽀뽀……를 왜 해!

둘은 마침내 주춤주춤 떨어졌다. 다행히 정적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마르에드가 말문을 텄다. 케흘렌에게 구세주로 보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차, 창문 좀 열까?"

"아, 아니. 요즘 밤에 추워."

마르에드가 도로 앉았다. 속으로 뺨을 때리던 케흘렌의 뇌리에 떠오른 게 있었다.

"아까 너……, 오면서 가져왔던 거 뭐야?"

둘은 나란히 앉아 테이블에 둔 와인병을 바라봤다. 진한 검보랏빛 포도주는 척 보아도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케흘렌이 웬 거냐는 눈으로 보자 마르에드가 볼을 긁적였다.

"밀레시안 님이 쉬면서 마시라고 챙겨주신 건데……. 직접 담그셔서 품질이 좋은 모양이야."

"즐겨 마셔?"

"아, 아니. 사실 술은 한 번도 안 마셔 봤어. 그런데 너는 마실까 해서."

케흘렌은 마르에드를 멍하니 쳐다봤다.

둘은 코르크 마개를 처음 따 본 것치고는 빠르게 땄다.

처음 맛 본 와인은 뜻밖에도 입에 맞았다. 향부터 달큰하고 오래 숙성시킨 만큼 풍미가 깊었다. 조금씩 홀짝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뜨끈하게 열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 취기라고 하나 보다. 케흘렌은 흘긋 마르에드를 곁눈질했다. 마르에드는 불빛에 글라스를 비춰 보며 와인 색을 관찰하고 있었다. 상태가 나빠 보이면 바로 뺏어 들 생각이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기분은 오히려 아까보다 좋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뺨이 옅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꼬리도 느슨해져 눈이 마주치면 서글서글 웃어 주는 것이다.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달빛에 윤곽선이 하얗다. 어깨와 등을 타고 갈래갈래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대비적으로 푸르러서 마르에드는 더욱 청명해 보였다.

"예쁘다."

케흘렌은 진짜로 자기 뺨을 쳤다. 마르에드가 황급히 거꾸러지려던 케흘렌의 잔을 붙잡았다. 기실 말이 잔이고 손등을 감싸쥔 모양새라 이번엔 케흘렌의 손에서 힘이 주루룩 빠져나갔다. 마르에드의 순발력이 좋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포도주가 한바탕 엎질러졌을 것이다.

완벽히 사수한 것은 아니라 둘 다 손을 냅킨으로 닦아야 했다. 케흘렌은 넋이 나간 채였다. 골이 울리는 게 술 때문인지 방금 저지른 수치스러운 말실수 때문인지 헷갈렸다. 허공을 응시하며 제발 마르에드가 못 들었길 비는데,

"땋아 줄래?"

"응."

아무래도 케흘렌의 술버릇은 생각이 말로 나오는 것인 모양이다.

오랫동안 땋아보지 않았음에도 손가락은 알아서 길을 찾아갔다. 케흘렌은 청색 폭포처럼 늘어뜨린 뒷머리를 한 손에 그러쥔 다음 신중히 세 갈래로 나눴다. 그리고 차례차례 엮었다. 어릴 때보다 훨씬 긴 길이였지만 그만큼 케흘렌의 손도 마디가 길고 굵어져 있었다. 꼼꼼하고 세심한 손길이 푸른 가닥을 내리엮어 갔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당겨지는 한 올 한 올이 결 좋은 비단실 같다. 매듭을 지을 때마다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당기면 목덜미 쪽의 짧은 머리칼이 일제히 흔들렸다. 왜 잊고 있었을까. 신체 일부를 온전히 맡기고 기다리던 단정한 등. 더 이상 땋을 수 없게 된 가닥 밑을 동여매면 붓끝처럼 살랑이던 것. 열중해 하나하나 땋아 내려가면 튼튼하게 완성되는 브레이드.

모래를 털어내듯 기억이 번져 갔다. 마지막에는 항상,

"예쁘다고 해 줘도 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웃어주던 것도.

"……예뻐."

"고마워."

예쁘다고 하면서 퉁명스러운 얼굴이던 것도.

머리를 땋고 나서도 둘은 오래 이야기했다. 주로 어렸을 때 이야기를 했다. 결코 마음이 넉넉한 시절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웃긴 얘기를 해서 웃고, 서운한 얘기를 하다 웃고, 웃는 얼굴을 보고 웃고, 왜 웃냐고 웃었다. 애당초 골은 없었고 시간이 도려내졌을 따름이었다. 틈을 메울 안온은 얼마든지 있다. 할퀴어진 과거와 떠안은 죄악을 고통스러워 하기에는 삶은 너무도 바쁘다. 다시는 멀어지지 않게 서로를 바투 잡아 걷는 것이면 된다.

긴장이 눈 녹듯 녹아내린 케흘렌은 거푸 잔을 들이켰다. 한번 이야기의 물꼬가 트자 놀랍도록 마음이 편해졌다. 어린 시절 그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케흘렌은 그때 역시도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저 그때처럼 마르에드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솔직하게 기뻤다. 동시에 어색해서 과민반응을 보인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렇게 편한데 왜 떨었지? 꼭 좋아하는 애 앞에라도 선 것처럼…….

딸꾹.

누군가 전원을 내린 것처럼 취기가 쑥 내려갔다. 내려가다 못해 다시 올라와서 증기가 머리로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목에 걸린 것은 그대로였다. 딸꾹.

케흘렌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마르에드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올 것 같았다. 경직된 목이 뻣뻣하게 돌아갔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나 싶어 눈치를 보려던 찰나, 어깨 위로 무언가 쓰러졌다.

어느새 잠에 빠진 마르에드가 기대어 있었다. 마르에드임을 확인한 순간, 목께부터 머리끝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케흘렌의 머릿속에서는 두 문장만이 어지럽게 맴돌았다.

'우린 이상한 걸까?' '이렇게 사는 거 말야.'

'이렇게'와 '사는 거' 사이에 '둘이서'가 빠졌음을 뒤늦게 알아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는 일은 앞으로도 잦지는 않겠으나 분명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날이 오면 오늘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은 확실하겠다. 그때는 어깨가 아닌 무릎에서 재우는 정도의 발전은 기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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