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꿈의 시작(7)
“쿨럭, 쿨럭. 아…, 오셨군요.”
기침을 하던 타르라크가 다가오는 날 반겼다.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안색이 훨씬 파리했다. 걱정이 들어 물었다.
“몸이 안 좋아졌나요?”
“이곳은 항시 추우니 감기일 겁니다. 걱정하진 마세요, 익숙한 일이니. 그보다 알아낸 게 있습니까?”
익숙한 일이라고 주제를 돌리는 타르라크에게 나는 복수의 서 2권 번역본을 건네주었다. 그가 책을 읽을 동안 나는 나무장작을 꺼내어 캠프 파이어를 준비했다. 타르라크는 책에 빠져 내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뒤늦게 알아챘다.
“음?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감기 걸렸을 때는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 하니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만…, 생각해주신 건 고맙습니다.”
타르라크는 불이 타닥타닥 타오르기 시작한 모닥불 앞에 앉았다. 나도 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찬기운을 몰아냈다. 타르라크가 마저 책을 읽으면서 적막이 돌았다.
흰 눈이 소복히 쌓인 시드 스넷타에는 살아있는 이라곤 우리 둘 밖에 없어보였다. 그래서인지 세상과 분리된 또 하나의 세상에 들어와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묘한 감각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솔라 씨는.”
먼저 운을 뗀 건 타르라크였다.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가를 달싹이다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저를 돕는 겁니까?”
이제 와 말하긴 우스운 말이었다. 우리는 사전 협의없이 얼떨결에 한 배에 탄 타인이나 다름없다. 우연찮게 만났고, 슬금슬금 일이 커졌다. 짚고 넘어가지 않은 점을 타르라크가 꼬집은 셈이다.
나는 지난번, 노라에게 들었던 말을 상기했다. 선의엔 선의로 보답한다는, 단순하지만 진리와도 같은 윤리적인 행동양식. 하지만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이기심 앞에 몽상가의 순진함 따위로 변질되는 가치.
사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내가 타르라크에게 받은 선의는 사실 없다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굳이 내가 그를 도울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결론 내리자면 티르 코네일의 친절한 주민들도 처음에 내게 도움을 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
애초에 나는 보답을 받으려고 타르라크를 돕는게 아니다. 그래서 어째서라는 말엔 대답할 수 없다. 그렇게 생긴 내 침묵을 타르라크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고개를 젓고 잊어주라며 던진 말을 철회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화력이 약해진 걸 보고 나무 장작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겨울 토끼 한 마리가 기웃거리길래 나무 열매 하나를 굴려 보냈다. 토끼는 열매를 툭툭 건들더니 입에 넣고는 저 멀리 깡총깡총 뛰어갔다.
“솔라 씨는 2권의 내용을 읽어봤습니까?”
“네.”
“스승님께서는 신의 뜻을 인간이 대리할 수 없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멋대로 신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생각을 합리화시킨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저는 비록 인간이고 인간의 편이지만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고…, 그렇게 가끔씩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왜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부러 가볍게 답했다.
“어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만 있겠어요.”
“…맞는 말이긴 한데요. 하하.”
타르라크가 낮게 소리내어 웃었다. 처음 보는 그의 웃음이었지만 안색 때문일까, 아주 밝아보이진 않았다.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타르라크는 모리안 여신을 증오하니까, 그 여신을 돕는 스승님 또한 납득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다.
어째서 타르라크는 스승님의 사상에 동조하는 말을 하는걸까.
“그러고보면 당신은 루에리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군요.”
“루에리라면,”
“티르 나 노이에서 실종된 제 친구입니다. 단순하지만 명쾌하지만, 보이는 것보다 생각이 많은 친구라…, 제 이런 저런 사정을 알고 도움을 줬지요.”
오래 전 잃어버린 친우를 그리듯 타르라크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마리도, 그 나이대 여자아이처럼 명랑했습니다. …죽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어요.”
“….”
상실을 참아내는 타르라크에게 나는 아무런 위로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에 어설프게 동정을 표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나무장작을 더 꺼내 모닥불에 넣고 괜히 불씨를 휘저었다.
타닥, 타닥. 불씨가 튀었다가 눈밭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한 것 같군요. 그보다, 저번에 맡겼던 링 토크 말입니다. 두 개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더군요.”
“어떤 기억이 있던가요?”
“솔라 씨, 당신이 옳았습니다.”
타르라크가 부러진 링 토크 조각들을 품에서 꺼내어 손 위에 올렸다. 합쳤던 것을 다시 두 갈래로 나눈 모양이었다.
“하나엔 스승님의 기억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돌아가신 스승님의 부인인 시라님의 사후 기억이 담겨 있었어요.”
사후? 내가 놀라 반문하자 타르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죽은 뒤 유령이 되어서 스승님의 근처를 맴돌고 계셨습니다. 시라님의 시야로 모리안 여신을 보고서야 알았어요. 그 존재는 여신이 아니라…, 마신 키홀이었습니다.”
마신 키홀. 그 신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타르라크의 말을 경청했다. 모리안이 인간을 수호하는 신이라면 키홀은 마족, 즉 포워르의 신이다. 인간과 포워르의 전쟁으로 모리안이 돌이 되고나서 별다른 활동이 없었는데 아마도 이번 일을 위해 몸을 숨긴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이야기였다.
내가 믿었던 대로 모리안 여신은 인간을 수호하길 져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요. 저는 모리안 여신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신을 섬기는 드루이드로서,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니 부끄럽군요.”
“그래서 당신이 그런 의문을 가졌던 거군요.”
타르라크는 내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부디, 더 늦기 전에 티르 나 노이로 가서 에린 침략을 막아주세요. 제 힘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가슴께가 묵직하게 눌리는 기분이다. 나는 조금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잠깐의 고민과 승낙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갔는지 타르라크는 알지 못할 것이다.
몇 번 보지 못한 타인의 부탁에 덥썩 위험한 일을 맡아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하지만 나는 그런것 따윈 아랑곳 않은 척 유쾌한 척 말했다.
“복수의 서 마지막 권은 번역할 필요가 없을것 같네요. 그게 진실인지 아니면 속아서 쓴 거짓인지 판단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3권의 내용은 대충 예상이 갑니다만…, 중요한 건 스승님께서는 아마도 글라스 기브넨을 소환해 지휘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글라스 기브넨에 대한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몇 년 간 모아온 것이니…,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나는 그가 넘겨준 양피지들을 받았다. 두툼한만큼 타르라크가 그간 얼마나 열심히 모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잘 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말이다.
타르라크는 마지막으로 내게 당부했다.
“솔라 씨.”
“네?”
“…부디 몸조심 하세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그냥 뒤돌아서 바로 시드 스넷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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