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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는 카즈밀레
- 카즈윈 x 밀레시안
- HL 드림요소 있음
- 트위터에 이미지로 올렸었는데... 이 길이면 그냥 게시글도 괜찮겠다 싶어서요.
밀레시안은 풀잎이 뺨을 간질이는 감촉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느리게 깜박이다가, 멍멍한 귓가를 타고 들어오는 소리에 반짝 정신을 차린다.
난 분명히 그냥 성역을 지나가려고 했었는데. 몽롱한 탄식이 그의 뱃속에 한숨처럼 끼쳤다. 드래곤이 그때 나타날 건 뭐람. 뒤늦게 욱신거리기 시작한 몸을 보아하니 아마도 글러 먹은 게 틀림없었다. 발톱에 긁혔었나, 이빨에 물렸었나. 아니면 꼬리에 맞았나? 입안에 고인 비릿한 것을 기침과 함께 뱉어내며 헤아렸지만, 정확히 무엇에 나가떨어진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아마 드래곤이 한 번 더 발을 내리찍으면 끝날 것이다. 아니면 그 전에 실혈로 죽을 것도 같았다. 그거야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에 별 감흥은 없었지만, 하필 성역에서 이런 꼴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밀레시안은 천천히, 규칙적으로 눈을 깜박거리려 했다. 동시에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했다. 누가 보기 전에 일어나서... 드래곤 시야 밖으로 최대한 빠르게... 나름의 노력에도, 가슴팍이 부풀었다 꺼지는 속도는 점점 더 느려졌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냥 정신이 드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야겠군. 생각이 이어지는 게 숨이 끊기는 것보다는 빨라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릴 즈음, 밀레시안은 문득 주변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래곤이 떠난 걸까? 의문스러워 하고 있자면 입술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비릿함으로 가득 차 있던 입안에 씁쓸한 맛이 번졌다.
"... 삼켜."
먹먹한 가운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밀레시안은 순간적으로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지 의심했다. 입가로 무언가가, 그러니까 아마 포션 같은 것이 무기력하게 흘러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또, 익숙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가 불만스러운 듯한, 아니면 귀찮은 것도 같은. 땅바닥에 빈 유리병이 아무렇게나 구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벨린이 보면 성역에 무슨 짓이냐고 할 텐데. 엉뚱한 걱정이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금세 도망을 쳤다. 늘어져 있던 몸을 누군가가 비스듬히 안아 일으켰다. 희부옇게 번진 시야에 푸른빛이 흔들거린다. 다시 입술에 찬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삼키라는 말이 들리지 않았지만, 어깨를 쥔 손이 그것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밀레시안은 그게 쉬웠으면 벌써 알아서 포션을 마셨을 거라는 불만을 눌러 두고, 조금이라도 입에 흘려 넣어지는 것을 받아 마시려고 애를 썼다. 여전히 반은 바닥에 쏟아지는 꼴이었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고 묵묵히 다른 병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이게 무슨 생고문이야. 순간적으로 밀레시안의 뇌리에 스친 말이었다. 그래도 입에 넣어 주는 걸 매정히 뱉을 수는 없었기에, 그는 억지로라도 포션을 삼키는 데에 집중했다. 다음 병, 그리고 그다음 병을 비우고 나서 완전히 기진한 이를 바라보던 청회색 눈동자가 잠잠히 입을 열었다.
"... ... 잘했어."
죽음에 가까워졌던 몸이 천천히 수복되는 감각을 견디던 밀레시안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냥 되살아나기를 기다리지 그랬어. 말을 할 힘은 없어서 단지 바라봤을 뿐이었지만, 상대는 속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미간을 희미하게 구겼다.
"여긴 성역이야."
그래서? 밀레시안은 한쪽 눈썹을 얕게 올렸다.
"... 네가 피에 절은 채 누워 있다는 보고를 가장 빨리 받을 수 있는 건 나였어... 내가... ... ... 널 보고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는 말이 기사단 내에 도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야."
헤루인의 조장은 천천히 부상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쩌면 정말로 죽은 후 되살아나는 것이 더 간단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는 다른 것을 택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더군."
절반 정도로 줄어든 크기의 목소리가 밀레시안의 귓가에 스쳤다. 더 이어지는 것은 없었고, 단지 부축한 팔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을 뿐이었다. 부축받는 자는 발끝이 끌려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밀레시안은 조그마한 한숨을 삼켰다. 그 말이 좋았는지, 아니면 심술이 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만 그러고 싶었기에, 조금 더 그 팔에 무게를 실어 기대었다. 수리부엉이의 눈은 가붓한 무게마저 단단히 받쳐 들었다. 오랜 친우와 같은 피로함이 있었지만, 만약의 상황이 닥쳤을 때 느꼈을 감정에 비하면 가벼웠으므로 아무런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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