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4화

꿈의 시작(4)

메모리얼 아이템은 물건에 깃든 기억을 읽게 해준다.

아이템을 통해 환상에 빠진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와 사뭇 다른 풍경을 평소와는 다른 눈높이로 보고 있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그 기억의 주인인 타르라크와 일체가 된 나는 던전에 진입하기 전 여신상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던전은 지하에 만들어놓은 거대한 구조물이며, 여신은 제단에 물건을 바친 모험가들이 특별히 봉인한 던전의 어느 구역을 제하고 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있다. 여신이 봉인한 그곳이 티르 나 노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를 읊는 타르라크의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는 어째서 티르 나 노이를 찾는 걸까. 던전의 여신상은 간절한 기도에도 응답하지 않고 눈을 감고만 있었다.

갈 길 잃은 기도를 끝낸 타르라크는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 끝 무렵에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당신은 나의 주인님. 당신은 나의 주인님. 검은 장미의 영원한 주인….”

라이미라크 교단의 사제복이 아닌,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옷을 입은 서큐버스가 보인다.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크리스텔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곧 실랑이 같지 않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타르라크는 진실을 찾고 싶어하고, 크리스텔은 그에게 사랑을 원했다. 둘의 대화를 듣다보니 나는 크리스텔이 안타까워졌다. 사랑을 받아 힘을 키우는 서큐버스인 크리스텔이 드루이드를 사랑하게 되다니….

타협점을 찾지 못한 두 존재가 전투를 시작했다. 크리스텔은 타르라크를 이기면 자신이 그를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 조건을 걸었지만, 타르라크는 끝끝내 그런 크리스텔을 쓰러뜨렸다. 모든 사랑이 다 굴복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조언하며….

“….”

타인을 훔쳐보는 세상이 무너지고 나는 현실에서 눈을 떴다. 메모리얼 아이템의 사용은 처음이었지만 꿈을 꿀 때와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손을 쥐었다 펴며, 내 육체와의 괴리감을 줄이다가 나는 문득 한가지가 떠올랐다.

방금으로 크리스텔을 믿을만한 이유는 확실해졌다. 그녀는 단지 타르라크를 사랑했을 뿐이니…, 그렇다면 타르라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만남을 내가 주선해도 될까?

그리고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 르나는 무슨 선택을 했을까. 생각의 말미에 든 호기심은 나를 갈팡질팡하게 하였다. 눈을 감고 꿈을 꾸면 르나가 나오고, 나는 그녀의 결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의 정보도 얻을 겸, 자두는 것도 좋을 터.

…하지만 나는 곧 이 생각이 조금 불만스러워졌다.

르나를 따르면 편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내 삶이 마치 그녀의 복사본 같지 않은가. 반항적인 마음이 한구석에서 날뛰었다.

그래서 나는 지체없이 던바튼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텔에게 타르라크의 위치를 말해주되, 대신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는 당신을 반기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타르라크를 설득하는 건 당신 몫이에요.”

“그것으로도 저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솔라 씨.”

크리스텔은 기뻐하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제 둘 사이의 일은 둘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크리스텔과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가 시드스넷타로 향했다. 눈이 내리는 길을 지날 동안 크리스텔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얼굴엔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 안타까움이 혼재했다.

곧 인간의 모습을 한 타르라크가 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나는 뒤로 물러났다. 따로 그들만의 자리가 필요할 순간이었다.

이야기가 오가는지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려왔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둘 다 차분한 성격이라 격양되어 목소리를 높이진 않는 모양이었다. 1시간이 지날 무렵에야 크리스텔이 내게 왔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이었지만 나빠보이진 않았다.

“어떻게 됐나요?”

“제게…, 티르코네일의 사제님께 가보라고 하는군요. 거기에 자신의 답이 있다고.”

“그런가요. 수고했어요.”

“그리고 타르라크 씨가 당신을 불렀어요. 해 줄 이야기가 있는것 같아요.”

나는 조금 주춤거리며 그에게 갔다.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다행히도 그는 내가 멋대로 결정 내린 사항에 아무런 사감을 내비치지 않고 내게 말했다.

“혹시 아직도 티르 나 노이에 갈 생각입니까?”

“아마도요. 타르라크가 내게 보여준 것들은 여신이 인간을 배신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잖아요.”

“결정적인 증거라…. 그렇다면 알려주는 수밖에 없군요. 제가 그 날 보았던 것들을.”

타르라크는 긴 이야기의 서두를 꺼냈다.

동료였던 마리와 루에리를 잃은 그 날, 그들은 티르 나 노이를 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낙원이라기엔 그곳은 음산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그곳에서 글라스 기브넨을 만들고 있던 여신을 목격했다. 타르라크의 스승인 마우러스 구이디온이 그런 여신의 편에 서있는 것도 모자라 여신은 세 사람을 공격했다. 이후 마우러스는 타르라크만을 빼돌렸지만, 마나를 제어하는 신경이 엉켜버려 크리스텔에게 돌봄을 받아야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다 크리스텔에게 짐이 되기 싫어 이곳, 시드 스넷타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세 전사의 비참한 말로를 묵묵히 듣고난 나는 잠시 애도의 침묵을 지키다 입을 떼었다. 궁금한 점이 있고 이상한 점도 있었다.

“여신이 만들고 있다는 글라스 기브넨이 뭐죠?”

“글라스 기브넨이란 옛날, 센 마이 평원에서 일어났던 전투에서 마족들이 소환한 전설의 거인을 뜻합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마신이 부리는 괴물이었죠.”

“그런데 어째서 모리안 여신이 그런 걸 만들고 있었던 걸까요.”

“지금으로썬 인간들의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라는 게 자연스럽겠지요.”

그렇게 결론 내리기엔 여러모로 찝찝한 점이 있다. 마족에 적대했던 모리안이 왜 인간을 적대하게 되어 마족의 편으로 서게 된 것인가. 그 결정적인 계기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아무리 같은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마족들이 순순히 모리안을 따랐을까.

여러 의문을 타르라크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모리안을 증오하고 있기 때문에 내 말을 들어줄 가능성이 적었다.

“글라스 기브넨을 만들고 있었다는 건, 지금쯤 완성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네, 그때 본 것으론 뼈는 이미 발굴하여 맞춘 상태고, 시료까지 합성해낸 상태…. 게다가 아다만티움이 완전히 굳어진 글라스 기브넨의 뼈는 파괴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미리 파괴할 방법도 없으니 이제 마족들의 에린 침공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에린 침공.

그러니까 타르라크의 말에 따르면, 머지않아 여신은 글라스 기브넨을 이끌고 에린으로 올 것이다…. 라고 볼 수 있겠지.

여신이 글라스 기브넨을 만들고 있는 걸 타르라크는 직접 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에 석연찮음을 느꼈다. 이건 분명 증거 하나 없는 감이며 고집일 뿐이지만, 직감이란 건 때론 이성보다 뛰어날 때도 있는법이다.

여신을 정말로 인간을 증오하여 마족들을 동원해 에린을 침공할 셈인가.

…어쨌든 글라스 기브넨이 완성을 앞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것이 마족의 손에 있는한 인간에게 좋지 못한 방향으로 쓰일 것은 확실하다.

“그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글라스 기브넨을 막는 것이겠네요.”

“막을 수 있다면 말이죠…. 저에게 티르 나 노이에서 발견한 책이 있습니다. 마족어로 되어있어 저는 읽지 못하지만, 크리스텔에게 부탁하면 번역해줄 겁니다. 무언가 단서가 적혀있을지 모르니 한 번 확인해보세요.”

나는 책을 받아들였다. 우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크리스텔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녀를 부르면 될 일을 내게 부탁하는 걸 보니 이건 정말 나를 거쳐가는 형식적인 과정일 뿐이었다. 아니면 크리스텔에게 직접 부탁하기에 미안한 감정을 품은 건지.

책은 과연, 그가 말한대로 마족어로 쓰여있어 나는 단 한 글자도 읽지 못했다. 나는 책을 고이 인벤토리에 넣었다.

크리스텔에게로 가기 전, 나는 타르라크를 바라보았다. 시시때때로 눈발이 날리는 추운 이곳에 홀로 남겨질 그는 참 외로워보였다. 병색이 짙어서 그런걸까.

내가 그를 보고 있으니 타르라크도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쳐왔다. 어쩐지 민망해져 그냥 가볍게 웃고는 인사했다.

“그럼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으면 또 올게요.”

나는 그렇게 인사한 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크리스텔과 시드 스넷타를 빠져나왔다. 우리가 구조물을 통해 나왔을 땐, 이미 별이 물러가고 아침해가 뜨고 있었다.

뜨는 해를 보니 마음이 괜히 어지러웠다. 귀걸이를 줍는 것으로 시작한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이어졌을까. 마족들의 에린 침략이야 역사적으로 몇번이고 있었지만 나에겐 처음인 일이다. 게다가 이 사정을 아는 사람도 소수.

책임의 무게는 나눌수록 가벼워진다. 반대로 혼자 떠안을수록 무거워지고. 그러니 내 마음이 심란할 수 밖에.

크리스텔은 던바튼으로 돌아가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티르 코네일에서 가볍게 할 일을 찾았다. 병아리를 공격하는 여우를 쫓아내거나, 거미줄을 모아 실을 잣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부러 무언가에 집중했다.

할만한 일을 다 하고나서 하늘을 보니 약속 시간이 조금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터덜터덜 티르코네일 주변을 산책했다. 마침 여관을 지나다보니 노라의 콧노래가 들려왔다. 나는 그녀의 허밍에 맞춰 조금 낮은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어라, 솔라구나.”

나를 알아채고 돌아본 노라가 말갛게 웃었다. 에린에 처음 온 나에게 휴식을 취하는 법을 알려준 노라는 그 이후 자주 만나 친한 사이가 되었다. 노라도, 나도,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해서 통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음~”

“왜?”

“저번이랑 다르게 표정이 안 좋은데? 잠 못잤어?”

“그런가?”

내가 얼굴을 만지고 있으려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노라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온 노라의 품에는 작은 향초가 들려있었다.

“짠, 비싸서 엄두도 못냈는데 얼마 전에 피르아스 아저씨께서 선물로 주셨지. 이걸 불에 태우면 거기서 나오는 향이 좋다고 하더라고. 이거 네게 줄게.”

나는 향초를 반쯤 받아든채 노라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그럼. 예전에 날 도와준 답례라고 생각해.”

예전이라면…, 확실히 노라가 급하게 필요한 물품을 구해줬던 적이 있었다.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나는 그제야 향초를 완전히 내 품으로 가져왔다.

“고마워.”

“뭘. 원래 선의는 선의가 되어 돌아오는 법이잖아.”

“그거 참 근사한 말이네.”

“후후…. 어머, 벌써 해가 지고 있네. 난 이만 정리하고 저녁 준비 해야겠다.”

“그래, 맛있게 먹어!”

노라가 여관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천천히 던바튼으로 향했다. 티르 코네일의 둔덕을 감싼 마을 집 굴뚝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역시 무서운 일따위는 모르는 양 평화로운 곳이다. 내가 처음 에린으로 왔을때 마주한 곳이니 어쩌면 고향이라 볼 수도 있고.

이곳엔 나를 도와준 이들이 참 많다. 던컨 촌장님, 엔델리온 사제님, 노라, 등등…. 모두가 내게 대가없이 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내가 사는 방식은 그들이 도화지에 그려준 그림과 같다. 그건 분명히 나를 향한 선의였다.

내가 지금 던바튼으로 가는 이 걸음과, 앞으로 할 일 또한 그렇다.

그래서 무섭지만 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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