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를 사랑하는 한

톨비밀레 MF│G21~G25 O │ ?

02년산 브라더 복합기가 덜덜거리며 복사용지를 뱉어낸 지 5분째 되었다. 한 번에 대량으로 복사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계가 일하는 동안 사람은 바보가 되어 멍하니 뱉어내는 종이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참여하지도 않는 임원진 세미나에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내는 노동은 언제나 말단의 역할이었으니. 기계에게 반복 노동을 맡기고 인간은 멍때리는 게 오히려 정신 건강에는 좋을지 모르겠다.

“시엘 씨, 복사 언제 끝나요?”

종종 걸음으로 다가온 동료 한 명이 그녀의 어깨에 턱하니 얼굴을 올리며 물었다. 워낙 스킨십이 헤픈 사람이라 이정도 접촉은 별 거 아니었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동료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하고, 다시 복합기로 시선을 돌렸다.

“20장 남았어요.”

“그럼 곧 끝나네? 대기 타고 있어야겠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몫의 복사할 데이터를 가지러 돌아갔다. 어깨의 무게감이 사라져도 시엘은 묵묵히 종이를 뱉어내는 고철덩어리를 응시할 뿐이었다. 지독하게 무료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이제 기계가 다 뱉어낸 종이들을 하나하나 스테이플러로 찍고 분류하기만 해도 퇴근시간에 가까워질 것이다. 거래처 미팅에 30분 일찍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부장에게 밉보인 이상 며칠은 이러고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애인에게 차인 것 같다며 이미 부서 내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다. 갈 곳 잃은 분노를 감당해야 할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운이 나쁘게도.

이유 없는 미움에는 그냥저냥 익숙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었다.

“아마 시엘 씨한테는 애인이 있어서 더 그런 거 아닐까?”

어느 새 다시 등 뒤로 다가온 동료가 대뜸 그런 소릴 내뱉는다.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시엘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간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이런 일 부쩍 시엘 씨한테만 시키는 거, 아무리 봐도 그거 때문에 배알 꼴린 것 같거든요. 미팅은 핑계인 거 솔직히 지부 사람들 다 알지.”

“…….”

“왜, 저번에 회사 앞으로 데리러 온 남자가 애인 맞죠? 금발.”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게,”

“어머, 아니에요?”

“…맞아요.”

“부럽다~ 퇴근 시간 맞춰서 차 끌고 회사 앞으로 마중 오는 애인이라니, 할리퀸 드라마같아.”

‘심지어 그 차도 신형 캐딜락 아니었어요?’ 하는 물음에는 ‘저도 잘 몰라요.’ 라는 심심한 대답이 나왔다. 가진 자를 향한 분노지. 차이는 건 이유가 있다니까요. 상대만 바뀔 뿐 본부장을 향한 한결같은 의견이 오늘도 계속되었다. 동료의 수다를 들어주면서도 시엘은 속으로 직전의 대화를 의미없이 곱씹고 있었다.

뭔가 입 속에서 걸리면서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 뭘까. 다 녹은 사탕 조각이 입 안에 남아있는 듯 이 텁텁하고 찝찝한 감각은.

삐익, 복사가 완료되었다는 알람이 울렸다. 생각은 거기서 멈춘다.


“후…….”

또 무슨 심술이 돋았는지 본부장으로부터 서류 표지를 완전히 새로 만들고 새 필기구도 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행히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는지 동료들이 퇴근 전 급하게 필기구 거래처를 물어다 줘서 괜찮은 품질의 잉크펜을 200자루 공수해두는 데에 성공했다. 만년필을 준비하라고는 안 했고, 볼펜을 준비 안 한 걸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걸 만약 트집잡는다면 시엘은 그렇게 대꾸할 생각이었다. 히스테리에 일일이 대꾸할 성의는 없지만, 구체적으로 걸고 넘어질 때 대답할 성의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표지를 인원수만큼 또 프린팅하고 철심을 박는 게 더 오래 걸렸다. 도와주겠다는 동료를 한사코 거절하고 시엘은 묵묵히 서류에 스테이플러를 박았다. 반복 작업은 가급적 혼자 하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그 여자 성격상 반드시 도와준 사람에게도 패널티를 줄 게 뻔했다. 귀찮은 일을 두 배로 늘리기 싫었다.

마지막 서류를 스테이플러로 찝고 시엘은 긴 숨을 내뱉었다. 책상 위 시계가 어느새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본래 퇴근 시간은 5시인데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끝난 셈이었다. 펜 구입처를 찾지 못했으면 내일 아침까지도 뛰어다니느라 정신없었을 터였다. 서류의 산을 세미나실에 옮겨둔 뒤 그녀는 그제야 퇴근을 준비했다. 텅 빈 사무실의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단속은 어차피 경비가 하니까 그녀가 신경 쓸 건 없었다.

“이제 나오십니까?”

로비로 나와 회전문을 지나자마자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시엘은 드물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체 발광이라도 하듯 반짝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연한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다정함이 한아름 담겼다. 퍽 자연스럽게 다가온 모양새에 시엘도 잠시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다가,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설마 기다렸어요…?”

“당신의 동료들이 전해주더군요, 늦게 나올 거라고요.”

로비 앞에서 마주쳤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적어도 두 시간은 기다렸다는 의미가 된다. 상상도 못한 미련함에 여간해서는 무던한 시엘도 얼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미리…연락하지 그랬어요. 추웠을 텐데.”

“근처 카페에서 기다렸습니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나기도 했고…놀래켜주고 싶어서요.”

“차는요…?”

“경비원 분께 부탁해서 잠시 주차했어요.”

건물 주차장은 예외없이 외부인 주차 금지인데 경비원을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걸까?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항상 상상 이상의 수완을 발휘하고,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렇구나, 하는 수밖에.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남자는 시엘의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대는 동작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늦었으니 저녁은 만들어 먹죠. 어때요?”

‘아마 시엘 씨한테는 애인이 있어서 더 그런 거 아닐까?’

갑자기 왜 그 말이 지금 머릿속을 울리고 가는 건지 모르겠다.

머릿속을 치고 올라오는 이상한 느낌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눈앞의 다정한 눈빛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고서 주차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아직까지는.


냉장고를 채워넣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로 들어가기 전 근처 마트에 들렀다.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아도 꽤나 집요하게 시선이 따라붙는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심미안이 없고 눈치를 그닥 보지 않는 시엘도 충분히 알 만한 정도였다. 하긴 맨해튼 최고급 식료품점에서만 쇼핑할 것 같은 남자가 일반 공용 주차장에 캐딜락을 대고,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팔에 끼고서 월마트를 누비는 모습은 제법 진귀한 풍경이다.

“면은 어떤 걸로 살까요?”

그리고 지금은 본인이 만인의 구경 거리가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에는 아랑곳않는지 느긋하게 파스타의 면 종류나 고르는 중이었다. 무엇이든 아무래도 좋은 입장이었지만, 그는 한사코 시엘의 대답을 바라는 듯 보였다. 이런 점이 여러모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이런 점이.

“링귀니로 사요.”

“그러죠. 아스파라거스는 있습니까?”

“…아뇨.”

“아, 아니면 양배추를 넣을까요? 전에 본 중국식 레시피가 꽤 괜찮아 보였거든요.”

바구니에 링귀니 면을 툭 던져넣은 그가 빙그레 웃으며 채소 코너로 그녀를 이끌며 걷기 시작했다. 바구니에는 파스타 면, 소고기 팩, 당근, 감자 몇 개, 그리고 식빵 한 봉지와 우유 일 리터 팩이 담겨있었다. 내일 아침까지 한꺼번에 사두자는 남자의 제안이다.

그건, 내일 아침까지 그가 곁에 있다는 의미다.

“…….”

또다. 목에 뭔가 걸리는 듯한 이 느낌.

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기만 하는 순간.

“…니까?”

“…네?”

“새우랑 베이컨 중에 어떤 게 더 취향이십니까?”

그리고 그럴 때마다 딴 생각으로부터 끄집어내는 현실의 목소리에, 결국 이어가던 생각 자체를 놓아버린다. 찝찝함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남자는 파스타에 넣을 재료를 묻고 있는 듯 했다.

“새우요.”

“취향이 겹쳐서 좋군요. 그럼 칵테일 새우로 가져가죠.”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냉동 새우 한 팩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필요한 재료는 얼추 담겼다.

“해산물은 혹시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진 않는데…안 먹은 지 좀 됐네요.”

“하긴, 뉴욕에 있으면 제대로 된 건 먹기 힘들죠.”

신선한 조개가 있었다면 봉골레를 했을 텐데 아쉽다는 말이 이어졌다. 더 담을 건 없는지 남자도 장바구니를 든 채 온갖 코너를 그저 보기만 하며 스쳐갔다. 뒤따르던 시엘도 딱히 더 채워가야 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남자의 칫솔이 집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왠지 기억이 모호했다. 그러나 이 타이밍에 묻는 건 어쩐지 굉장히 이상한 질문이 될 것 같아 삼켰다.

“회사에 일이 많습니까?”

계산을 마치고 차에 나란히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던 도중 남자가 던진 질문에 시엘은 덤덤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바쁠 시기는 아닌데, 나한테 일이 몰려와서 그래요.”

“본부장이 당신을 미워한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다 알고 물은 건가? 시엘이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자, 그도 능청맞게 어깨만 으쓱이며 시동을 걸 뿐이다.

“로비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만큼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요.”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

“하지만 지금 주된 피해자는 당신인 것 같던데요.”

“다시 애인 생길 때까지만 참으면 돼요.”

아직까지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냥 성가신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자기보다 더 시달린 사람들이 줄을 섰으니 아마 조만간 본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 어느 쪽이든 시엘에게는 관심 밖의 이야기였다.

덤덤한 대답을 뒤로하고 안전벨트를 잠그니, 옆에서 한숨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거에는 좀 화를 내셨으면 좋겠는데요.”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지만 비좁은 차 안에서는 충분히 들릴 음량이다. 시엘이 남자를 돌아보자 지체없이 시선이 교차한다. 어쩐지 쓰게 웃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여태까지 시종일관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함유하고 있던 미소와는 또 사뭇 달랐다. 무엇이 안타깝거나 언짢은 사람처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깊이가 생겼다. 어쩐지 피하고 싶어지는 눈. 시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기다릴 거면 연락을 하세요.”

“제 말의 요점은 그게 아닌데 말이죠.”

남자의 목소리에 다시금 부드러움이 돌아왔다. 다소 어이없다는 듯 실웃음을 흘린 그가 손을 뻗어 시엘의 뒷통수를 붙잡는다. 부드럽게 끌어당긴 직후 어렵지 않게 입술이 맞닿았다. 새가 부리로 쪼듯이 가볍게, 떨어진 찰나에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겹쳐진 뒤 순식간에 떨어진다. 극히 익숙한 움직임에 시엘은 반응할 틈도 없었다.

“……!!”

그녀가 제대로 반응한 건 마지막 입맞춤 직후 입술을 핥는 혀의 감촉을 느꼈을 때였다. 크게 움찔한 순간 남자는 얍삽하게 떨어져 주었다. 이제 출발할 거라는 듯 운전대까지 잡으며.

“나머지는 집에 가서 할까요?”

“……”

…어처구니 없는 말에는 대꾸도 안 했다.


요리하겠다는 시엘을 한사코 거절한 남자는 실로 능숙하게 부엌을 점령했다. 내 집인데. 시엘이 그러든 말든 앞치마까지 가져간 남자는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녀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치울 것도 없는 방을 정리했다.

욕실에 꽂혀있는 칫솔이 두 개인 것을 보고 잠시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휘발시켰다.

“……맛있네요.”

“다행이군요.”

중화식으로 볶았다는 파스타는 생각보다도 맛있었다. 심플한 감상에도 남자는 진심으로 기쁜 듯 만면에 미소를 올렸다. 태양이라도 떠오른 듯 찬란한 웃음을 빤히 보다 시엘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링귀니에는 굴소스가 별로 안 어울리지 않을까 했는데, 후추만 들어가면 의외로 뭐든 다 괜찮게 느껴졌다. 오히려 페페론치노가 덜 들어가는 쪽이 입맛에 맞는 듯 했다.

남자가 준비한 식사는 깔끔하고 정갈했다. 입가심으로 한 접시 준비한 로메인 샐러드도 맛있었다.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소고기는 여기에 살짝 구워 올려주었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늦게 퇴근하여 늦게 챙긴 저녁 식사였지만 어느 때보다도 제대로 챙긴 느낌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까지도 남자가 본인의 몫으로 가져갔다. 자연스레 식탁 정리만 시엘의 몫이 되었다. 식사 준비 중 생긴 쓰레기는 남자가 이미 틈틈이 치워 손댈 게 없었다. 어지간히도 완벽한 행동에 시엘은 그냥 포기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끝없던 물소리도 끊어지니 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사이 남자는 시엘에게 탄산수를 내밀었다.

“고된 날에는 오히려 술을 안 마시는 게 좋습니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각자 탄산수를 한 병 씩 든 채였다. 시엘이 말없이 받아든 사이 남자는 자연스레 리모콘을 집어들어 TV의 전원을 켰다. 이미 하루의 뉴스는 다 지나가고 심야 시간대의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 시엘은 처음 보는 드라마였다.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했다.

“새 시즌으로 방송하나보네요. 등장인물이 바뀐 걸 보니.”

“그래요?”

“안 보셨습니까? 꽤 인기 있었는데.”

“…이 시간에 TV를 잘 안 봐서요.”

매스미디어에 깊이 중독된 현대인 사이에서도 유별나게 중독과 거리가 먼 삶을 살긴 했다. 회사에서도 오히려 ‘드라마를 안 보는 별종’이라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기도 했고. (‘그럼 도대체 집에서 뭐 해요?!’ 라는 말에는 핸드폰을 보다 잔다는 말로 납득시켰다.) 시엘이 감흥없이 탄산수만 홀짝이고 있으니 옆에서 작게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악마들이 인간 틈새에 섞여 살기 시작한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대천사가 보다못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정체를 숨기고 사회생활을 하다가…인간 애인에게 대천사라는 걸 들켜서 시작되는 로맨틱 코미디물이에요.”

“다 보셨어요…?”

“저희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거든요.”

시엘의 회사에서 이 드라마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인기작이라면 한 번쯤은 입에 오르내렸을 텐데. 정작 그녀가 제목을 모르니 들었어도 잊어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중간부터 전개가 시리어스하고 무겁게 뒤바뀌어서 말이 많았습니다.”

“어땠길래…”

“그 인간 애인이 악마에게 영혼을 강탈당했거든요. 살려줄 줄 알았는데 그대로 장례식까지 치르고 에피소드를 끝내버렸어요. 로맨틱 코미디의 아이덴티티는 그녀의 존재 그 자체였어서, 그 장르의 생명까지도 끝나버렸고요.”

남자는 무심하게 설명하며 조용히 탄산수를 홀짝였다. TV에서는 드라마의 오프닝이 막 재생되고 있었다. 시엘은 말없이 그 화면을 응시했다.

“대천사가 본분을 잊고 상실감에 몸부림치다가…문제의 악마를 퇴마하고, 대천사의 직위가 박탈당하는 걸로 드라마 시즌이 끝났습니다. 황당하다면 황당한 결말인지라 저도 아직 기억이 선명하네요.”

“새 시즌이 나오는 걸 보면 인기는 많았나 보죠.”

“하하,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 신이라는 소재는 항상 인간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니까요.”

잠시, 탄산수를 마시다 사레가 들릴 뻔 했다.

“…네?”

“아무튼, 주인공이 아예 바뀌었네요. 천사는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 뉴욕 증권가에서 하루종일 발로 뛰어다니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회인. 기존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개가 이어졌지만 작중 회사의 이름이나 구성원 등은 전 시즌과 동일하게 나와 같은 세계관임을 끊임없이 암시했다. 군중 사이의 사람들이 사이사이 악마로 변하는 연출은 이 드라마의 아이덴티티였다.

그러나 그 어떤 내용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

시엘은 남자에게 다시 말을 걸고 싶었다. 직전의 발언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나 무엇에 대해 묻겠느냐고 하면, 거기서부터 말문이 턱 막혀버린다.

소통의 불협화음은 비단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매순간, 하루종일 벽에 가로막힌 듯 전체적인 흐름을 끊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분명히 부정하거나 정정할 수 없다. 무엇이 분명한 건지 스스로도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렷한 현실 속에 서 있음에도 안개에 휩싸인듯한 위화감은, 많은 것을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아무 확신도 갖지 못하게 만든다.

“…….”

시엘의 시선은 남자에게로 다시 굴러간다.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습관이며 타인을 위한 가장도 섞여있음을 안다. 시선을 느낀 듯 푸른 눈이 이쪽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가 짙어졌다.

끼익, 작은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다정함을 한아름 안고서.

“잘까요? 피곤했을 텐데.”

매사 무감한 그녀도 신호를 못 알아들을 만큼의 바보는 아니다. 얼굴 위로 다가온 그림자가 짙어졌다. 소파 위에 올려둔 손 위로 남자의 손이 올라오며 열과 무게를 더하고, 동시에 대답할 틈도 없이 입술이 틀어막혔다. 대가없이 흩뿌려지는 달콤함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줌과 동시에 그녀를 안개 속에서 목적없이 계속 걷게 만든다. 마치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아…….”

소파 위로 등부터 무너지며 TV 소리가 멀어진다. 예고된 열기가 단전에서부터 올라와 온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가빠지는 호흡까지도 남자의 입에 가로막혀 사라진다. 손끝이 저릿해지는 열과 감각에 서서히 파묻히면서도 시엘은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오늘, 그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는 걸.


맨 어깨를 스치는 찬 공기에 느릿하게 감각이 돌아온다. 눈을 떠도 아직 날은 밝지 않아 어슴푸레한 어둠이 시야를 채운다. 중간부터 침실로 옮겨졌다는 건 기억하지만 그 뒤부터는 거의 까마득했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 남자가 곤히 잠들어있었다.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완벽에 가까운 조상(造像)을 응시하던 시엘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새벽의 공기가 차가웠지만 바닥에 굴러다니던 셔츠 하나를 주워 대충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남자의 것이었다.

거실의 풍경은 어제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TV는 들어오면서 그가 대신 꺼준 듯 했다. 미처 치우지 못한 탄산수 병만 소파 옆 테이블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커튼을 내린 베란다로 다가가 틈새로 보이는 풍경을 엿본다. 새벽 네시 쯤 되었을까. 브루클린의 홈타운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각이다. 물론 뉴욕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기에 지금부터가 하루의 시작인 사람도 있고, 지금이 하루의 마무리인 사람들도 있겠지만…이 근방은 대체로 이 시간대에는 조용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머무르는 아파트는 15층이라 어지간한 소음이 닿기 힘든 높이였다. 날이 추워서 해가 뜨기에도 이르다. 곤히 잠든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가 커튼을 도로 닫았다. 부엌으로 걸어가, 집에 들어온 중 처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전날 그가 성의를 다해 준비한 식재료들은 당일날 거의 다 써서, 심심한 것들이 굴러다니는 삭막한 냉장고만 남았다. 오늘 아침을 맞이했을 때 그가 약속한 재료는 구석에 조용히 잠들어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 걸까. 멍하니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중 문득 바로 눈에 들어온 것에 손을 뻗었다. 손에 쥐어들고 그대로 문을 닫는다.

타이밍 좋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주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잠에서 깨어난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제법 또렷했다. 시엘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바지만 걸친 차림새지만 나름 말끔한 얼굴이었다. 평소보다 앞으로 쏟아진 앞머리를 쓸어 넘긴 그는 시엘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무표정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눈동자와,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것까지도. 어둠에 적응한 시야는 또렷하게 모든 것을 인식했다.

“…….”

그의 얼굴에는 예의상 깔았던 미소는 더 이상 없다. 다만 어딘가 씁쓸한 웃음이 살풋 고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안개가 한 꺼풀 걷힌 것 같았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두려울만큼 형태가 잡히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갑작스럽게 또렷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놀라울만치 침착했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에 그의 형상이 또렷하게 담겼다.

“오늘은 따온 게 아니지만.”

한 발짝 다가가 거리를 좁혔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들고 있던 것을 내밀어 그의 손에 올려두었다. 서로의 손 끝이 닿는 느낌이 무엇보다도 가장 익숙했다. 이 온기는 분명히 현실의 소유다.

“…그래도 줄게요.”

새빨갛게 익은 사과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그는 그것을 신호라고 판단한다.

느릿하게, 그러나 서서히 많은 것들이 그저 색채가 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과 사과만이 온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쓴웃음과 함께 눈을 감는 남자의 얼굴조차도 아름다웠다. 시엘은 그 수많은 다정함보다도 지금의 얼굴이 기껍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는…

“…하루면 족했던 걸까요?”

수호자의 얼굴이.

“내가 빨리 깨어났을 뿐이에요.”

“불쾌하셨을까요.”

사방의 색채가 섞여들어 더는 처음의 풍경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물처럼 녹아내리며 점점 아예 다른 풍경을 조립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만이 아직 처음과 같았다. 마치 이 모습일 때 나눌 수 있는 대화로는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불쾌했느냐고. 시엘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 톨비쉬는 그조차도 예상했다. 그가 쓴웃음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

.

.

“놀라게 해 드려서 미안합니다.”

수호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사과한다. 엷은 웃음 끝에는 씁쓸함이 담겼다. 어느 새 시엘의 얼굴에는 특유의 무감함만이 남아있다. 그가 이유를 설명하리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침묵과 기다림이 깔렸다.

“균열의 해소를 위해 많은 곳을 돌아다니던 중, 가능성의 세계를 몇 번인가 스쳐갔습니다. 본디 나에게 있어 주신의 영향력을 벗어난 곳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스쳐가도 그저 그 뿐이죠. 다만….”

색채는 점점 검게 물들어갔다. 발을 디디고 선 공간의 높이가 구분가지 않는 무질서 안에 담긴 듯 했다. 발 아래로 사라지는 색채를 바라보며 톨비쉬는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형태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를 떠올렸습니다. 세계를 위해 스스로의 수많은 것을 직접 버리고 이 자리에 남은 당신이, 그 많은 것들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

“그런 당신과 내가, 수호자가 아닌 다른 형태로 만나는 가능성이란…어찌나 궁금해지던지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가 발견한 가능성은 작은 평행선을 새로이 창조했다. 찰나에 지나지 않는 한계를 가진 세계였지만 직접 확인해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로지 그녀로 인해 발생한, 처음으로 주신도, 세계도 생각하지 않은 호기심에 수호자는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에 많은 것을 끌고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세계에 필요한 구성은 오로지 그녀와 그 둘이면 되었다.

“우리가 그런 세계에서 만났더라면, 이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그걸 생각하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만. 의외로 꽤 가까운 곳에서 소재를 얻었습니다.”

톨비쉬의 얼굴에 익숙한 장난기가 떠올랐다.

“나는 살아 평생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본 적 없는 것들인지라, 알터가 좋아하는 소설들을 참고로 내 나름 최선을 다해 세계에 맞춰 표현해 보았는데…의도대로 당신에게 전해졌을지 궁금하군요.”

“아.”

그 말과 동시에, 언젠가 성소에서 그 어린 기사단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따금 그의 독서 목록에 끼어있다던 연애소설에 대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떠나 그 나이대의 소년들도 잘 읽지 않을 책을 손에 쥐고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알터의 모습이 생소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잘 안 읽을 책이라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그 나이대의 청년답게 눈을 빛내던 게 선연했던 탓이다. 다만 어쨌든, 톨비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알터는…그, 모르죠?”

“그렇겠죠. 아벨린도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그렇겠네요….”

밀레시안이 언제 어디서 교황청에 대놓고 무어라 물어봤는지도 다 아는 기사단인데 기사단원이 뭘 사서 읽었는지를 모를 리가 없긴 했다. 읽은 것 자체가 문제삼을 일도 아니긴 하지만, 이번에는 알터에게 제법 민망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

“당신이 빨리 알아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내내 그런 기색을 보이기도 했지만…결국에는 나를 망설이면서도 받아들이기에, 괜찮은 걸까 감히 생각도 했었습니다.”

어느덧 어제까지 보았던 남자의 모습은 없다. 갑옷을 걸치지만 않았을 뿐, 하얀 셔츠에 붉은 튜닉을 걸친 익숙한 이의 모습이 보인다. 눈높이를 맞추고 싶었던 그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톨비쉬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쥐었다. 어쩐지, 여기서 대답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가 먼저 고해하였기에.

“톨비쉬도 숨길 마음이 별로 없어 보였는데요.”

“그랬나요?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그랬어요. 하지만…….”

아무리 인간인양 스스로를 감추고, 책 속의 그들이 그러듯 흉내를 내도 결국 어느 지점에서 그들은 인간과는 분명히 분리되었다. 세계를 헤매던 이방인과 수호자가 공유하는 정서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어떠한 세계에서든, 어떠한 형태로든 경험해보지 못한 ‘평범함’이 그들에게는 조금도 평범하지 않았으므로. 시엘은 그 세계에서도 겉도는 존재였고, 톨비쉬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아무 것도 몰랐거든요.”

“이런.”

남자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남자를 마주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정보들. 그건 의도적으로 누락한 게 아닐 터였다. 그 스스로도 똑바로 끼워맞춰보지 못했을 뿐이다. 톨비쉬는 드물게도 머쓱하게 웃었다.

“실수했군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정보값만 있으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그걸 그가 정말 몰라서 누락했을까. 시엘은 감히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 역시도 그저 역할에만 몰두했을지 모른다. 주신의 뜻도, 나를 위해서도 아닌 호기심에서 시작된 이 사소하고도 멍청한 역할극에 뛰어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세계와 차원에 대해 이해하고 영겁에 가까온 삶을 살며 세상에 자신을 맞춰온 사람이지 않은가. 하지만 되물어봐도 별 소용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정말로, 그저 감정 자체에 몰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당신은 어땠습니까, 시엘.”

부름에 응답하듯 수호자를 향하는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갑기만 하다. 많은 것을 깎아내고 스스로 버리며 텅 비길 택한 눈이다. 처음 제대로 그녀를 마주했을 때 그를 의심의 길로 빠트린 눈임과 동시에,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반드시 그 곁을 지키리라 맹세하게 만든 눈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 자체는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명히 구분되는 지점은 있었다. 사소한 잡담에 무심하면서도 곧잘 어울려주는 점이 그랬고, 생각 이상으로 표정의 변화가 다양했던 점이 그랬다. ‘덜어내지 않은’ 감정은 분명 둔갑을 했을지언정 살아있었다. 그게 정말 사소한 수준의 차이점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그녀라면 볼 수 없었을 찰나라는 것 또한 명백했다. 그 사소함이 보이고, 볼 수 있었다는 지점에서 당초의 목적은 어쩌면 달성한 셈이었다.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기에 아쉬울 정도로.

“…신기했어요. 그런 평화는.”

그녀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평화로우며, 그런 개개인의 평화에 특별한 대가가 필요하지 않은 세계였다. 그 세계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라고는 상사의 괴롭힘 때문에 미뤄지는 본인의 퇴근 시간이나 그날 저녁 거리, 즐겨보는 드라마의 전개가 좋은지 나쁜지 정도였다. 평화의 유지는 한 명이 아닌 많은 이들이 동시에 짊어진 문제였다. 본래의 세계보다는 훨씬 복잡한 체계와 인과관계가 존재했으나 사람들의 생각은 보다 단순하게 느껴졌다. 신에게 기댈 일이 없는, 당연한 평화를 누리는 삶은 그토록 고요했다.

“그대로 안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잠깐 들었네요.”

그래서 한 번이나마 그런 세계를 경험한 영혼은 조금 더 솔직하게 진심을 말한다. 밀려오는 위화감을 거부하고 괴롭힘을 견디면서도 그냥 그런 회사생활을 견디며, 퇴근하면 조건 없이 무한한 연인의 사랑을 받고, 재미없는 드라마를 보며 시시덕거리다 나란히 잠드는 밤. 밀레시안으로 존재하던 최초의 기억에서도 꿈꿔본 적 없던 평범하고도 찬란한 삶이었다. 이런 삶의 형태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겪어본 영혼은 신선하고 잔잔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력이 조금만 더 위태로웠다면, 달콤한 덫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톨비쉬도 그 뜻으로 이해한 듯 눈썹을 내렸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뇨…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다만…”

어느 덧 등에 짊어진 검의 무게를 느낀다. 현실은 느릿하고도 분명하게 가까워진다.

“당신이 그런 역할을 택했다는 게 조금 의외였달까…….”

“그건…인간에게는 보편적인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래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세상을 바꾸는 서사시는 어떠한 문화에서든 아주 일반적인 소재죠. 세상을 위해 연인을 죽이는 것 또한.”

“…….”

그 드라마처럼요. 톨비쉬의 미소는 잔잔하게 어둠 속을 부유했다.

사랑이라는 두 글자 안에 담겨있는 무게와 형태는 사람에 따라 상이했으나 그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정서가 있다. 그들은 그 형태에서 벗어난 이레귤러였으며, 그 짧은 시간동안 어설프게나마 흉내내었을 뿐이다. 그런 형태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르는구나, 또 한 번의 깨달음은 뒤늦게 가져간 채로.

휘발된 낭만 끝에 남은 것은 그저 거품이 되어 사라진 꿈이었고 미련조차 없이 깨끗이 사라졌다. 어차피 그 모든 감성은 잠시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그녀가 이해한 이상 아쉬움이란 없다. 내 것이 아닌 감정에 미련이 남을 리가 없었다.

“그래요, 궁금증은 해결되었으니…돌아갈까요.”

우리의 믿음이 있는 곳으로. 수호자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별을 향해 걸었다. 빛가루가 점멸하며 점차 그녀가 아는 수호자의 형태로 변화한다. 거대한 날개가 깃털을 휘날리며 두 사람을 감싸안았다.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온기였다. 시야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나리라는 예고임을 직감한다.

비록 그녀는 아직 두려움에 외면하고 버려둔 검을 잊지 못했고, 또 다른 어둠이 드리워지는 순간 또 한 번 전장으로 앞서 나아가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죽은 불씨처럼 사그라들고 허망히 흩어지는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 믿을 수 있는 건 첫번째 검이 그 곁에 단단히 꽂혀있기 때문이며, 피바다 속에서도 싹튼 생명과 꺾이지 않은 나무들이 자라나 믿음 아래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숲과 검을 버려두고 떠날 수 없었다. 별이 사랑하는 세계에는 그 모든 것이 함께하기에, 고통의 연옥에서 발버둥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이곳이어야만 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이 세계를……”

눈을 감아버리기 전, 톨비쉬가 무어라 속삭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멀리 들려온다. 뒷말은 몰려오는 수마에 녹아내려 듣지 못한 채로 밀려나는 파도가 된다. 되묻지 못했으니 돌아오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 언젠가 기진맥진하게 기절했던 날처럼 몸이 무너진다. 단단한 팔이 붙드는 것이 느껴졌다. 차양을 드리우듯 감싼 날개로부터 깃털이 흩날리며 그저 잠들어도 괜찮노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

수호자는 다시 온전한 형태를 이루어 새벽별을 맞이한다.

…해가 떠오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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