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일방적 인지 ; 03

카즈윈은 이번엔 좀 더 높은 곳을 택했다. 그는 게이트 건물의 기상천외한 곳을 잘 알았다. 예를 들면 아직 보수공사가 끝나지 않은 서까래 위, 나무 기둥을 엉성하게 괴어 놓은 반쯤 허물어진 벽돌벽 근처 같은 장소. 그곳엔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았고, 그의 조용한 휴식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카즈윈은 한쪽 다리를 허공에 쓱 늘어트리고 천천히 흔들었다. 오늘은 훈련이 없었고, 그는 정식 기사들이 없는 게이트를 지키는 역할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가 게이트를 지키고 있지는 않았지만, 엄밀하게 땡땡이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교대자가 제때 안 와서 부득이하게 자리가 빈 것뿐이지. 그는 그래도 게이트의 안전을 위해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둥지를 틀고 앉아 때때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뛰어내리기 위해 그의 발아래에 짚 더미가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올라온 차였다. 그는 손을 포개어 베개 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견습 기사들 몇몇이 정식 기사가 없는 사이에 저들끼리 목검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과 장난은 고사하고 함께 말을 섞기도 귀찮아하는 쪽이었고, 그들이 그러고 있으면 목가를 긁으며 슬쩍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래서 그는 금세 흥미를 잃고 창백한 눈동자를 굴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이 그를 향해 너도 땡땡이치는 중이니? 하고 눈을 찡긋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눈썹을 실룩거리고 눈을 감았다.

감긴 눈 아래로는 최근 배웠던 훈련의 내용과 보고서, 책의 줄거리 따위가 바쁘게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동화는 엉터리 같단 말이야. 그는 짧은 편린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훈련의 강도는 제 또래 애들에게나 괜찮지 더 어린 애들에게는 무리했던 것 같다거나, 어려운 마법 수식 같은 것을 생각하던 그는 가장 최근에 읽었던 보고서의 내용에 멈춰 섰다.

보고서는 언제나 그랬듯 썩 특이한 내용은 쓰여있지 않았다. 잘 쳐 줘 봤자 마족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거나, 마족을 해치우면 자꾸만 금화가 떨어진다거나 하는 내용이 삼분지 이쯤 되었다. 카즈윈은 태평스럽게, 뭐, 길 가다 과자라도 사 먹고 싶은 모양이지, 라고 생각했다. 보고서의 다음 내용은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랬다. ‘이전 여신을 구하고 낙원을 강림시키고자 했던 세 용사의 발자취를 어떤 밀레시안 하나가 쫓아가고 있다. 어쩌면 개입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주의하여 지켜볼 예정.’

카즈윈은 아래쪽에서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잠시 생각을 끊었다. 그가 유사시에 뛰어내리려던 짚 더미가 풀풀 날리고,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 누가 내기에서 졌거나 힘자랑의 결과물인 것 같았다. 그가 도로 편하게 드러누웠다.

전설의 세 용사... 였던가? 그냥 세 용사였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보면 하여간 그에게 그닥 중요하지는 않았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폈다. 빈틈없이 그리브의 끈을 묶어 둔 한쪽 발이 허공에서 느리게 달랑거렸다. 그들의 호칭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들이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났다. 그들은 여신을 구하고 티르 나 노이를 이 땅에 강림시키겠다며 모험의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지금 그의 나이보다도 훨씬 어렸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모두가 그들을 ‘용사’라고 부르고 있기는 했다. 글쎄, 어린 나이에 이상을 품고 낙원을 찾으러 간 용기는 높이 살 만한 것 같긴 했다. 카즈윈은 게이트의 입구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직도 교대자가 오지 않았다. 소년의 입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용사들의 길을 밀레시안이 다시 되짚어 걷고 있다면 조금 다른 일이 일어날까? 그는 한가롭게 예상했다. 밀레시안은 죽지 않는다. 정확히 죽음을 겪었다 살아나는 건지, 아예 죽음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건지는 카즈윈도 잘 몰랐다. 하지만 어쨌거나 세 용사처럼 행적이 묘연해질 확률은 낮지 않겠는가? 죽지 않는다는 건 최악의 상황을 제외하면 언제나 귀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는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끼며 눈가를 비볐다. 밑에서는 짚 더미의 복수를 하겠다며 게이트 전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카즈윈은 훈련이 끝나고 도대체 어디서 저런 체력이 나는지 궁금했지만, 딱히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랬다가는 귀찮게 붙잡히게 될 게 뻔했다.

그 대신 카즈윈은 하던 생각을 마저 이어갔다. 그는 ‘이번의 밀레시안’이 이전 여신의 꿈을 꾸었다던 보고서 속의 밀레시안과 같은 사람인지 궁금했다. 여신의 부름이 꿈으로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분명 같은 사람일 거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에 가깝긴 했지만, 어떤 소식들의 반복적이거나 연결되는 경향성은 늘 호기심에 불을 지피지 않던가? 카즈윈은 이제 아예 길게 드러누워 생각했다. 아마 밀레시안이라면 신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죽지 않고 영원히 싸울 수 있는 병사를 어느 신이 탐내지 않을까. 소년은 아래에서 들리는 소란을 자체적으로 음소거시킨 뒤 작게 하품했다.

밀레시안에 대한 그의 생각은 상당히 거친 편이었다. 별에서 온 여행자라고 부르는 것이야 들었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도 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불멸, 늙지 않는 육체, 함께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을 느낄 수 없는 존재들. 그렇기에 별생각 없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권력을 잡거나 사람을 해칠까 봐 경계한다지만 그는 주신의 안배하심을 믿었다. 주신께서 어떻게든 그들을 쓰시려고 관망하시는 거겠지. 사실, 반은 신앙심이었고 반은 아무 생각 없는 거긴 했다.

그의 직감이 맞다면, ‘그’ 밀레시안은 꽤 특이한 길을 걷고 있었다. 사소한 소식에 들려오는 밀레시안들과는 걸음의 궤적 자체가 약간 달랐다. 그도 느낄 수 있었고, 아마 그보다 더 윗선의 기사들은 더 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카즈윈은 발을 흔들던 것을 멈췄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고유한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이 올까? 아니면 그조차 끝까지 ‘밀레시안’이라고 이름 붙여질까. 그는 산들바람이 스치는 잠시 동안 궁금해했다.

 


베르다미어의 하루는 바쁘기 짝이 없었다. 아니, 타르라크인지 타르타르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더니 이 작은 마을 안에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몰랐다. 그는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녔고, 손에서는 흙과 닭 냄새가 났다. 사과나무를 두들기느라 손이 벌겋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는 하루가 끝나면 헉헉거리며 광장에 드러누웠고, 다른 밀레시안들이 그걸 보고 이상하게 생긴 로브를 친절하게 덮어주었다. 필요 없어!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끙끙거리며 일어나 배 위에 덮여 있던 로브를 돌돌 말아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그의 손등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아무튼 그래서 타르타르, 아니 라크라크, 아니 타르라크가 뭐라고? 그는 묵직한 다리를 억지로 질질 끌고 갔다.

 

“안녕하세요, 스튜어트 선생님.”

“아, 베르다미어 씨. 또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셨군요.”

“좀 냄새나죠. 알아요.”

“아하하,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요.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아, 사실 마을에 왔을 때부터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 생각나서요.”

“편하게 물어보세요.”

“그, 사라진 세 전사? ... 용사? 하여간 그들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거든요. 혹시 아는 게 있으세요?”

 

던바튼의 마법 선생 스튜어트는 흐릿한 안경알 뒤로 눈을 크게 떴다. 그로서도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티르 나 노이에 다녀왔다던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 말인가요?”

“네, 그거요. 티르 코네일에서 수소문해봤는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었어요.”

“음... 그 전설의 진위여부를 논할 때 정말 많은 학자가 논쟁을 벌였어요. 그들이 정말 티르 나 노이, 낙원에 다녀왔는가에 대해서.”

 

베르다미어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다녀왔으면 다녀온 거지 뭘 또 논쟁을 하지?

 

“하하, 음, 결국 결론은 헛소문에 불과하다, 였지만요.”

“... 그럼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나요?”

 

그의 눈썹이 축 처졌다. 스튜어트는 소리 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저처럼 전설을 믿는 쪽이라면 좀 더 열의를 갖고 찾아보게 되거든요. 자, 이거 받으세요.”

 

베르다미어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받고 눈을 깜박였다. 목걸이? 스튜어트의 손이 다시 다가와 목걸이를 두 개로 쪼갰다. 아니, 베르다미어의 눈에나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 그냥 뚜껑을 열었다.

 

“... 이게 뭐예요?”

“로켓이에요. 속에 그림 같은 걸 넣는 장신구죠.”

“흐음.”

 

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로켓 속의 그림을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게 뭐?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스튜어트가 말을 이어갔다.

 

“이래 봬도 이건 사실 세 전사 중에서 뛰어난 마법사로 알려진 타르라크의 유품이에요. 그림이 보이시죠? 그 소년이 바로 그 사람이랍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아마 누나 정도?”

“오.”

 

근데 그걸 왜 선생님이 가지고 있어요? 라는 눈빛을 보내기도 전에 스튜어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놀라운 일은 이제부터죠. 이건 물건을 가졌던 사람의 과거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메모리얼 아이템이에요.”

“죽은 사람의 과거는 별로 안 궁금할 것 같은데요.”

“어허, 베르다미어 씨가 먼저 궁금해하셨잖아요? 자자, 받으세요.”

 

그는 꺼림한 표정으로 로켓을 손에 쥐었다. 스튜어트는 자신과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환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타르라크는 생전에 티르 나 노이의 강림의 비밀을 쥔 여신을 구출하는 걸 일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이에요. 그의 강한 염원과 기억이 로켓에 남아 있어요.”

“저주받는 거 아니에요? 저 이거 별로...”

“자! 알비 던전 앞에 있는 여신의 제단에 이 아이템을 바쳐보세요. 다만 동료들이 필요할 거니까 주의하시고요.”

 

삿되어 보이는 물건을 주면서 없는 친구까지 부르라니. 베르다미어는 눈을 잔뜩 흘겼지만 결국 한숨을 쉬었다. 털끝만한 단서라도 좋으니 일단 알아내긴 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뭐라도 알아내게 되면 좋겠네요.”

“할 수 있으실 거에요. 혹시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되면 저한테도 좀 알려주세요.”

 

네에, 하고 질질 끌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베르다미어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법 교실을 나왔다. 들고나오긴 했는데, 가방에 넣기 싫다. 강한 염원과 기억? 그런 거 들고 다니다가 뭔가 이상한 게 묻을까 봐 걱정이었다. 티르 코네일 묘지도 으스스해서 별로 안 좋아했는데. 그는 검지와 엄지로 로켓을 집어서 영혼석 옆에 슬쩍 넣어두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오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부탁할게, 나오.

던바튼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티르 코네일로 돌아가게 생겼다. 그는 다시 한숨을 푹 쉬고, 가방을 제대로 메었다. 이렇게 걸어 다니다간 조만간 다리가 튼튼해질 것이다.

 


카즈윈은 결국 짚 더미로 떨어져서 게이트 아래로 내려왔다. 딱히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고, 그게 빠르고 안전하고 덜 잔소리를 듣는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랄까. 그는 임무에서 돌아온 담당 기사의 잔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어가던 도중, 게이트 한 쪽이 왁자지껄해졌다.

 

“그거 들었어?”

“뭐?”

“누가 티르 나 노이로 갔대.”

“뭐어? 아니, 그런 게 실존하기는 해?”

“나도 우리 오빠한테 졸라서 들은 거다 뭐. 너 루나사 무시하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치만 진짜 거기로 간 거 맞아?”

“몰라? 그러겠다고 하고 갔다잖아. 진짜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지.”

“얼씨구, 그럼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냐?”

“아닐 수도 있긴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를걸?”

“어떻게 확신해?”

 

카즈윈은 슬슬 재잘거림에 귀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그들은 원한다면 하루 종일 떠들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러기 전에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가 뒷목을 문지르며 좀 더 조용한 곳을 찾으려는 때, 그의 발길을 불러세우는 말이 들렸다.

 

“이번에 간 건 밀레시안이래. 그러면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어? 티르 나 노이의 풀떼기라도 들고 올지 누가 알아?”

 

카즈윈은 고개를 느리게 기울였다. 그의 어깨가 미미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직감은 또다시 분명 ‘그’ 밀레시안이라고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그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괜히 발치에 있는 돌멩이를 툭 찼다. 아이들은 이제 저들끼리 히낄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등을 돌려 숙소로 저벅저벅 걸었다.

티르 나 노이. 소문과 책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아무런 고통도 죽음도 없는 낙원, 주신께서 약속한 땅. 그러나 카즈윈은 그 말에 별 감흥이 없었다. 아무 괴로움 없는 땅을 평생 그리면서 사느니 눈앞에 있는 목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나무로 된 숙소의 문을 열었다. 정겨운 삐걱거리는 소리가 양손을 들고 그를 환영했다. 그는 견습 기사복의 망토를 벗어 걸어두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번에 간 건 밀레시안이래. 그러면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어?’라는 동료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다는 말이 있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카즈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꿈벅거렸다.

만약 그 밀레시안이 돌아오게 된다면, 그는 낙원에 대해 이야기할까? 과연 낙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배반하는 것일까?

카즈윈은 조금쯤 궁금해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선생님들은 나무 위나 게이트 건물 주변을 찾아볼 것이었으므로 그의 숙소로 찾아올 확률은 낮았다. 잠자기에 좋은 때였다.

 


베르다미어는 티르 코네일에 돌아오자마자 마을 순회를 돌아야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어떻게 잘 지냈냐, 어쩌다 얼굴이 반쪽이 된 거냐,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검 좀 휘둘러봐라, 마법은 배웠냐, 어떻게 지냈길래 근육만 늘었냐, 그러지 말고 앉아서 저녁 좀 먹어라, 나한테 가져간 금화 갚아라(어쭈?), 온 김에 수리 좀 해라(싫어요.), 나 대신 양 좀 쳐라(내가 왜?), 그쪽 아르바이트는 안 힘드냐... 등등. 그는 던전에 가기도 전에 기력이 쪽 빠져서 여관에 드러누워 있었다. 피르아스는 내키는 만큼 돈을 내지 않고 여관에 머물러도 된다고 했지만, 베르다미어는 그러려고 내가 뼈빠지게 돈 번 줄 아냐는 생각을 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주기만 하고 왜 받질 않는 거야?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여관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덮었지만 잠은 안 오고 생각만 많아졌다. 귀걸이를 찾으려다가 다른 마을도 가보고, 또 돌아와도 보고. 이상하고 삿된 무언가를 떠맡기도 하고. 분명 이러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시작은 흐려지고 현재만 선명하다. 그는 로켓을 집어 들어 슬쩍 살펴보았다. 초상화가 너무 작아서 대충 이 깨알이 눈이고 저 깨알이 입이구나, 정도만 겨우 헤아렸지만, 둘의 사이가 각별한 것 정도는 알아채기 쉬웠다. 안 그랬으면 초상화고 뭐고 없었겠지. 베르다미어는 입술을 비죽이고 로켓을 도로 닫아 넣어 두었다.

세 용사와 여신에 대해 좀 알아보고 다니자니 영웅 놀이를 하러 다니는 거냐느니 하는 소리도 들었다. 왜? 그들이 낙원을 되찾겠다고 여신을 구하려다 돌아오지 못해서? 아니면 그냥 허무맹랑한 전설을 쫓아다니니까? 그는 다시 입술을 삐쭉 내민다. 여신의 꿈을 꿨다니까 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개꿈이라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다. 내 말은 뭐 장난인가? 물 열일곱 번쯤 뜨다 손이 미끄러졌다고 하면 그건 잘 믿어주면서. 그는 불만스럽게 발장난을 쳤다.

그는 영웅의 길이네 뭐니 하는 거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성당 뒤뜰 암탉의 깃털 수가 더 관심 주제일 만큼, 영웅이네 전설 속의 보물이네 낙원이네 하는 건 정말이지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귀걸이도 그렇다. 누가 도와달라고 하니까 도와준 것뿐이고, 촌장님이 말씀하시니까 궁금해서 가본 것뿐이다. 여신도 똑같다. 도와달라고 하니까, 길이 있다면 도와주려고 하는 거였다. 그는 보물이고 명예고 영웅의 이름이고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게 관심이 있었으면 옛날 옛적에 퍼거스 아저씨의 대장간을 탈탈 털어서 여행을 떠났겠지. 그는 티르 코네일이 좋았고, 거길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해본 적 없었다. 바깥에 궁금한 게 생기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살았을 것이다.

 

“영웅이 그렇게 좋나?”

 

그가 혼잣말했다. 힘들 것 같은데. 맨날 사람들 부탁 들어주고 위험한 데 막 들어가고, 물어뜯기고 베이고 온갖 시련과 고통은 다 당하는데 정작 받는 보상은 별로 없고. 누가 시련 달래지도 않았는데 맨날 시련받고. 이거 그냥 아르바이트 뺑뺑이의 고도 발전 버전 아니야? 작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통통 굴러다녔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렸다. 내일 할 일이 많았다. 던전도 가야 했고, 케이틴의 점심 식사 초대도 가야 했고, 레이널드 선생님의 “그동안 얼마나 늘었나 좀 봄세!” 교습도 가야 했고, 다 같이 망가진 풍차 고치는 거 구경도 해야 했다. 그야말로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랐다. 그는 티르 코네일의 정겨운 풍경과 사람들을 사랑했다. 사랑하긴 했는데, 이건 좀 그렇지 않나? 역시 몸이 떨어지면 더 애틋해지는 걸까. 지나가던 밀레시안들에게 주워들은 말을 되새기던 베르다미어가 다시 똑바로 누웠다.

이것저것 다 차치하고서라도, 여신이 그렇게 도움을 요청할 지경이라면 세상이 위험하다는 뜻 아닌가? 그러면 티르 코네일도 무사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베르다미어는 바로 그것 때문에 여신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마음도 좀 있었다. 그가 가보지 못한 마을이야 그의 소관이 아니었고, 던바튼도 정을 붙였다기엔 아직 좀 어색했다. 하지만 티르 코네일은 누가 말하던 고향과 가까운 감각이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다.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지. 고향이 위험해지는 걸 보고만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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