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과 바다

일방적 인지 ; 02

나무 인형에 목검이 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냈다. 베르다미어의 앞에 있는 나무 인형은 묶어둔 짚이 너덜거려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인형의 몰골은 어디서 많이 두들겨 맞았군, 하는 생각을 겨우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인형이 얼마나 가엾은 모습으로 서 있거나 말거나, 그는 숨을 들이켜고 다시 목검을 휘두르며 생각한다. ‘정확한 자세’가 정확히 뭘까? 그는 레이널드의 “정확한 자세로 휘두르는 검술의 중요성 강의”를 세 시간 동안 듣고 나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휘두르는 검의 궤도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정확히’ 검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래서 강의 후 또 세 시간 동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자세만 바르게 유지하면 되는 건가? 다시 딱, 하고 목검이 나무 인형을 강타했다. 세 시간동안 그대로 서서 검을 휘두른 덕분에 가엾은 나무 인형만 넝마가 되었다. 던컨이 하나로 묶어준 머리카락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그의 검술 선생인 레이널드가 물 한 병을 가지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잘 되어가나?”

“아직 잘 모르겠어요.”

 

베르다미어는 터지기 직전에 있는 나무 인형의 머리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이미 지푸라기 몇 개가 찢어진 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널드는 껄껄 웃으며 물병을 건넸다.

 

“세 시간 내내 이러고 있었지 않나.”

“허공에 검을 휘두른 자국이 보이면 좀 나아질 것 같은데요.”

 

그는 툴툴거리며 단숨에 물병을 반쯤 비웠다. 베르다미어는 손등으로 입술에 남아있는 물방울을 닦았다. 그는 레이널드에게 물병을 돌려주면서 궁금한 얼굴로 묻는다.

 

“선생님은 어떻게 익혔어요? 그, 정확한 자세와 정확한 각도 같은 거.”

 

레이널드는 물병의 뚜껑을 단단히 닫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과거에 어땠더라’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역시 연습이 가장 중요하지.”

“흠.”

“매일매일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몸에 익을 거네. 어디 한번 오늘은 자네가 얼마나 익혔나 볼까? 한번 휘둘러 보게.”

 

베르다미어는 주춤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배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감각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정확한 자세를 하려고 노력하며 검을 휘둘렀다. 던컨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자네는 아직 배우는 단계잖나.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게.’ 베르다미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그냥... 익숙해지지 못한 거다. 아무튼 그렇다! 그는 시선을 받는 데에 너무 약했다. 딱,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세 시간 동안 그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나무 인형이 이럴 거면 차라리 죽여줘... 라고 속삭이는 듯했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레이널드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는걸? 잘했네. 팔에 좀 더 여유를 주고 검을 더 들면 좋겠군.”

“정말요?”

“그럼, 내 눈을 의심하는 건가? 자, 인제 그 정도만 하게나. 촌장님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계시네.”

“아.”

 

베르다미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떠나야 하는 날이었다. 던컨이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테고, 촌장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턱 아래로 희미하게 방울진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생각했다. 그동안 베르다미어는 많이 자랐고 많은 일들을 했다. 여행을 떠나기 좋은 시기였다. 그는 이제 늑대를 기절시킬 수 있을 정도로 검술을 익혔다. 게다가 이제는 어디 가서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다니지는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같은 행동을 하느라 굳은 몸을 쭉 폈다. 초저녁의 서늘한 바람이 이마를 식히는 감촉이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곳곳마다 저녁 준비하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그 역시 따뜻한 식사를 하러 돌아가야 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봄세.”

 

그는 검술 선생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마을의 정겨운 흙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티르 코네일의 한가로운 풍경이 점차 엷은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는 이 시간을 특히 좋아했다. 머나먼 산맥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차가운 바람이 오는 길에 냉기를 뱉어두고 서늘한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이마를 쓸어주는 시간이었다. 나무의 그림자 너머로 달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조금 더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그가 촌장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반기는 건 고소한 옥수수수프 냄새였다. 베르다미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수프 냄새가 어찌나 맛있던지 다녀왔어요, 하는 인사 대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맛있겠다.”

“왔는가? 어서 앉게.”

“네.”

 

베르다미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상한 고양이-베르다미어는 그냥 그 존재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고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는 왼손으로 대충 고양이의 귀 뒤편을 긁어주며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수프에 숟가락을 푹 담갔다. 막 끓여 내놓은 옥수수수프는 훈훈하고 따뜻한 김을 내고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수프를 몇 그릇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숟가락에 넘치도록 수프를 떠올린 그가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수저를 입에 넣었다. 우유를 듬뿍 넣어 끓인 수프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냈고, 그는 행복한 소리를 내며 식사를 이어갔다.

 

“입에는 맞는가?”

“엄청요.”

 

던컨이 따뜻하게 웃었다. 이 집의 식사 시간은 언제나 이런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자네가 떠나는 날이로군.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나?”

“음, 그건 모르겠어요.”

 

베르다미어는 집 한쪽에 놓여있는 커다란 가방을 곁눈질했다. 실상 그가 챙긴 것들이 아니라 마을에서 이것도 가져가라, 저것도 가져가라면서 챙겨준 것들이 잔뜩 있었다. 퍼거스가 특별히 무료 공급해주겠다며 종류별로 챙겨준 검과 말콤의 류트, 케이틴의 말린 여행 음식, 딜리스가 아플 땐 참지 말고 약을 먹으라며 건넨 30 포션 여러 개, 트레보가 직접 쓴 야생 생존기, 노라와 피르아스의 따뜻한 로브, 데이안의 채집용 단검, 알리사의 금화 조금-알리사가 생색을 어찌나 내었는지-, 엔델리온과 메이븐의 축복의 포션 10개, 라사와 레이널드의 책 몇 권, 그리고 나오의 영혼석까지. 베르다미어는 이럴 거면 가방이 두 개여야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던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군.”

“아주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들 무슨 안 볼 사람들처럼.”

“허허, 다 자네 걱정해서 주는 거라네. 자네가 워낙 마을 사람들과 친했어야지.”

“그래도요. 저걸 다 언제 써요?”

“쓰다 보면 다 쓰게 된다네.”

 

베르다미어는 조금 더 꿍얼거리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케이틴이 직접 구웠을 게 틀림없는 부드러운 빵을 따뜻한 수프에 촉촉하게 적셔 입에 넣으면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그는 ‘식사한다’라는 행위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티르 코네일에서의 식사는 항상 따스하고 즐거웠다. 그는 여행을 떠나고 나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뱃속을 데워 주는 음식들이 꽤 그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참, 그리고...”

“네?”

“내가 이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나?”

 

그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던컨이 못 말린다는 듯 한숨처럼 웃었다. 노인의 자상한 목소리가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위를 덮었다.

 

“자네의 목숨 이야기 말이네.”

 

베르다미어는 머리에 불이 켜진 듯이 눈을 깜박였다. 길고 길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가 만신창이인 채로 귀걸이를 들고 돌아와서 힐러의 집에 반쯤 감금당했을 무렵이다. 던컨은 그를 앉혀 두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자네가 죽지 않는다고 해서 기꺼이 죽어서는 안 되네, 베르다미어.’

 

그는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죽지 않는데 왜 목숨을 소모해서는 안 되는가? 다시 살아나고, 상처나 흉터 하나 없이 재생할 수 있는데. 필요한 게 있다면 그 방법도 쓸만하지 않는가? 던컨은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눈치챘다는 듯이 다시 이야기했다.

 

‘자네의 목숨은 우리의 목숨만큼 무겁기 때문이라네. 부디 스스로 그 무게를 가볍게 만들지 말게.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베르다미어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미묘한 표정으로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으면 따뜻하고 주름진 손이 그의 손을 잡아 왔다. 던컨은 이제 간절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자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길수록, 자네를 걱정하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플 걸세. 최소한 그들을 위해서라도 쉽게 생명을 버리지 말게. 알아들었는가?’

 

베르다미어는 촌장의 부드럽고 깊은, 염려로 가득한 눈을 바라보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에 그는 너무 어렸다.

던컨은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베르다미어는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기억해요. 매일 이야기하셨잖아요.”

“그래, 내가 말했던 걸 자네가 여행을 떠나서도 잊지 말아 주게나.”

“노력해볼게요.”

 

베르다미어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거나 확신하지 못할 때 모호하게 대답하는 버릇이 있었다. 죽어도 거짓말을 잘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던컨은 걱정스러운 미소를 띠었지만, 그를 다그치지는 않았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던컨은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뗐다.

 

“자네의 여행이 무사하길 바라네.”

“괜찮을 거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네, 베르다미어. 자네가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이 여행이 녹록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네.”

 

던컨은 회상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몸이 겨우 다 나은 그가 레이널드와 트레보를 대동하고 시드 스넷타를 다녀와서 말한 이름이 어찌나 놀라웠는지. 촌장이 잊었다고 생각한 그리운 이름들을 다시 한 번 되뇌일 무렵, 베르다미어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들이 사라진 세 용사이기 때문에요?”

 

던컨은 눈을 뜨고 천천히 순진한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더해서 자네가 꾼 꿈 때문에도 그렇다네.”

 

베르다미어는 대충은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사라진 세 용사가 무엇을 시도했고,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는 던컨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빈 수프 그릇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제가 그들처럼 될까 봐요?”

“그렇다네.”

 

던컨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촌장은 나이가 많았고, 그만큼 걱정도 많았다. 베르다미어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작은 손을 노인의 손등 위에 올려 서투르게 도닥였다.

 

“괜찮을 거예요.”

 

그는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법에 서툴렀다. 그걸 모두 알고 있는 촌장은 그저 따뜻하게 웃었다. 어린 여행자가 최초의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이 천천히 저물고 있었다.

 

던컨을 도와 먹은 것을 모두 치우고, 다정한 밤 인사와 함께 베르다미어는 침대에 들어갔다. 안락하고 편안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이런 걸 다 두고 여행을 떠나는 게 괜찮은 생각일까? 모두가 말하듯이 그는 아직 어렸고, 세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어쩌면 안주하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더 안전하고 좋은 선택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별의 여행자였다.

별은 한 곳에 붙박여 있지 않는다.

베르다미어는 천장을 보며 몇 번 깜박거리다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베르다미어는 자신을 배웅하겠다고 나온 사람들의 수를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심상에 젖어 있느라고 베르다미어의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퍼거스가 수염을 축축하게 적셨다. 던컨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잘 다녀오게, 베르다미어.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서 머물러도 좋다네.”

 

베르다미어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다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가방 안에는 마을 사람들의 애정과 염려가 넘치도록 담겨 있었다.

 

“다녀올게요.”

 

여행자는 길고 긴 여행의 첫발을 떼었다.

 


카즈윈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는 언제나, 거의 모든 훈련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손쉽게 이번의 훈련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크로스보우로 세 개의 과녁을 짧은 시간 안에 모두 맞춘다거나. 그는 거의 항상 훈련을 마치고 나서 홀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견습 기사들 사이에서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유명했으므로 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그의 동료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었다. 끽 해봤자 또 어디서 자고 있겠지, 정도의 의견을 나눌 뿐이었다. 지금도 그는 소리 없이 자리를 비우려고 하고 있었다. 담당자의 눈을 피하는 것쯤은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인 피네의 눈을 피하는 건, 좀 어려웠다. 몇 발자국을 터덜터덜 걷던 그의 앞에 깨끗한 녹색 눈이 나타났다.

 

“카즈윈.”

“.......”

“또 도망가려는 거지?”

“..............”

 

그는 늘 그랬듯이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피네는 그게 긍정인지 부정인지 귀신같이 알아듣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카즈윈에게 한 번도 진심으로 화낸 적이 없었으므로 별로 무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안 돼, 훈련이 끝나고 제대로 결과가 어떤지 들어야지.”

“...... 완벽하게 했어......”

 

그는 겨우겨우 느리게 대답했다. 그나마 상대가 피네기 때문에 나오는 대답이었다. 피네는 그의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기 위해 과녁 쪽으로 걸어갔고, 카즈윈은 그 틈에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는 피네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거기 버티고 서 있지는 못했다.

소년은 게이트를 빠져나와서 몇 걸음 걸어갔다. 벽돌로 지어진 게이트의 건물과 다른, 풀이 자란 흙이 그의 발아래에 부드럽게 밟혔다. 카즈윈은 한쪽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어느 정도 크게 들릴 때까지 걸어갔다. 누군가 그를 부르거나 시끄럽게 떠들어도 폭포 소리가 충분히 덮을 정도까지. 그리고 적당한 위치가 되었을 때, 그는 근처의 나무 위로 훌쩍 올라갔다. 낮잠이 필요했다. 사실 필요했던 건지 그냥 그러고 싶었던 건지 모호했다. 소년은 적당히 크고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청회색 눈동자가 아발론 게이트 특유의 반짝이는 나뭇잎을 한참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다.

그리고 소년은 곧바로 잠들지 않고, 조용히 자신이 최근 읽었던 보고서를 복기해본다. 에린은 알다시피 평화로운 곳이었고, 알반 기사단이 모습을 감춘 뒤로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없었다. 소년이 알기로는 그랬다. 견습 기사에 불과한 그가 무슨 큰일이 있었다고 한들 알 길은 없었지만 말이다. 카즈윈의 발끝이 작게 흔들렸다. 애초에 그는 작은 소식들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럴 만한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자세히 기억하는 건 귀찮았다. 더 중요한 훈련 내용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작은 소식들에도 일종의 경향성이나 방향은 있는 법이다.

그는 밀레시안이라는 존재에 미약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불멸의 존재, 에린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족보다 많은 머릿수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지배하거나 점령하지 않는 종족. 그들은 작은 소식들에 종종 등장했다. 보통은 우스운 일이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우리 에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에 참여하려다 수상한 이단자의 물건을 발견했다거나, 물을 뜨는 데에 열두 번쯤 실패한 밀레시안이–카즈윈은 그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홧김에 물속에 들어갔다가 오염된 시체를 발견하고 신고를 하는 등의 작은 일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보고서에 ‘밀레시안’이라고 서술되었다. 이즈음에서 카즈윈은 사소한 의문을 가졌다.

그들은 왜 고유의 이름이 쓰이지 않는가? 어째서 그들은 그들의 종족 명으로 대변되는가? 폭포 소리가 점차 그의 귓가에서 멀어졌다. 나른한 낮잠이 그에게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본 밀레시안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잠들었다.

 

물론, 그게 오래가지는 않았다. 피네는 나무 위에 올라갈 능력은 약간 부족했지만, 훈련 담당자를 불러올 능력은 차고 넘쳤다. 카즈윈은 반강제로 끌려 내려와서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피네의 명랑한 목소리가 ‘다음 훈련해야지! 얼른 와!’라고 하는 걸 들으며 질질 끌리는 걸음으로 게이트로 돌아갔다.

그가 자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거의 잊어버렸다.

 


베르다미어는 벌목 캠프의 짜증 나는 나무꾼을 되돌아보며 역시 정강이를 차 줘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여행은 수월한 편이었고, 위험한 몬스터도 비교적 덜 만났지만, 사람이 문제였다. 마을을 막 나서려는 데 이상한 말투로 편지를 보내지 않나, 갑자기 나무를 패 오라지 않나. 베르다미어는 그때 트레이시를 보면서 ‘너도 장작처럼 만들어 줄까?’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티르 코네일 사람들의 체면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베르다미어는 나무꾼의 요청을 대충 들어준 후 두갈드 아일의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구리들이 네 발을 찹찹거리며 돌아다니고, 이상한 모양으로 솟아 있는 언덕도 있었다. 그는 가야 할 곳이 명확한 여행자였지만 가끔 그런 것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에게는 모든 게 처음이었고, 신기했다. 티르 코네일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하는 햇빛도 처음이었고, 두갈드 아일의 나무가 무성한 숲도, 나무꾼들이 베어 놓아 둥치만 남은 나무들도 처음이었다. 벌목 캠프의 닭들은 티르 코네일의 닭들처럼 그에게 안겨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따뜻하고 얌전했다. 베르다미어는 해가 지면 길 중간에 앉아 케이틴에게 받은 빵과 우유를 먹으며 머리 위로 흘러가는 두 개의 달을 바라보았다. 때때로는 길에서 쉬어갈 때 말콤에게 받은 류트를 쳐 보기도 했다. 아주 기초적인 것만 배워서 대단한 곡을 치지는 못하지만, 콧노래와 함께하면 그럴싸한 곡조처럼 들렸다. 그는 몸을 가볍게 흔들거리며 홀로 웃었다. 이 여행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갈드 아일 아래쪽의 거대한 나무에 도착할 무렵, 그는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어가며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양들을 바라봤다. 저 애들은 주인이 없나, 헤아리는 찰나,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휙 돌렸다.

 

“...”

 

아무도 없었다. 풀이 피어난 들판 위에 화사하게 내리 쬐는 햇빛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찼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지금 신경이 예민한가?

그리고 두 번째. 베르다미어는 아예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매끈한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그는 주변을 자세히 둘러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진짜? 베르다미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몇 번 흔들고, 지도를 꺼내 가야 하는 도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던바튼은 여기서 멀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목적지가 바로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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