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팬
에이스 트라폴라 드림
* 24년도 에이스 생일 기념 연성
9월 22일 오후. 모든 수업이 끝나고 종례까지 마친 교실 안.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렌은 제 앞에 불쑥 들어온 에이스의 얼굴에 멈칫했다.
“아이렌, 내일 무슨 날인지 알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와 들뜬 열기로 가득하다.
새삼스럽게 상대가 참으로 귀엽다는 생각이 든 아이렌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 채 대꾸했다.
“네 생일?”
“역시 알고 있구나~!”
“아니, 그거야 일주일 전부터 이야기했으니까.”
“그래도 혹시 까먹을 수도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제가 설마 같은 반 친구의 생일을 까먹겠나. 관심 없는 이의 생일이라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매일 얼굴 보는 이의 생일도 까먹을 만큼 제 기억력이 나쁘진 않은데.
‘뭐, 그만큼 들뜬 거겠지.’ 아이렌은 그렇게 생각할 뿐 더 따지고 들진 않았다. 원래 사람이 불안하거나 기대가 되면 당연한 것도 몇 번이나 확인하지 않던가.
그러나 이 행동이 다른 이의 눈에는 유난으로 느껴진 걸까. 듀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세상에 생일은 자기만 있는 줄 알겠네.”
여기서 대꾸하면 또 말싸움으로 이어지겠지만, 좋은 날을 앞두고 기분이 들뜬 에이스는 반격하지 않았다. 대신 챙길 짐도 없어 이미 자리에서 빠져나온 그림이 에이스에게 말을 걸며 침을 꼴깍 삼켜댔다.
“내일 생일 파티에 맛있는 거 나오냣?”
아, 이 녀석은 역시 마수가 아니라 음식물 흡입기 같은 게 아닐까.
참으로 한결같은 질문에 어깨 힘이 빠진 에이스가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그림. 넌 그런 것밖에 관심 없어?”
“헹, 이 몸이 축하해 주러 가는데. 당연히 맛있는 게 있어야지!”
“선물은 샀고?”
“이 몸의 축하 자체가 선물이지!”
저 건방진 뻔뻔함 또한 한결같다. 에이스는 평소와 다름없는 그림의 발언을 당연하게 흘려 넘겼지만, 아이렌은 감독생으로서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모양이었다.
“에이스, 그림은 방에 가둬놓고 올까?”
“후낫! 무, 무슨 무서운 소리냐. 꼬붕!”
“선물도 안 준 손님이 음식을 다 쓸어 먹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농담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아니면 진짜 가둬놓고 올 작정으로 꺼낸 말인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아이렌의 표정에 장난을 치기도 힘들어진 에이스는 진지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간 방문을 부수고 탈출할 거 같으니, 관두자.”
“음. 옳은 말이야.”
역시 농담이었던 건가. 아이렌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을 기다리는 소년들 곁에 섰다.
바로 옆으로 다가온 아이렌을 힐끔 올려다본 그림은 여전히 조금 긴장감이 남은 표정으로 입을 놀렸다.
“그러고 보니 꼬붕. 에이스 생일 선물로 정말 그걸 줄 거냣? 내 생각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
그 물음엔 악의가 없었지만, 아이렌은 어떠한 위협을 느낀 걸까.
깜짝 놀라 얼굴이 희게 질린 그는 얼른 몸을 숙여 그림의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방에 가둬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 그림.”
“읍, 읍읍!”
“하, 내가 마법사였다면 입 다물게 하는 마법은 꼭 배웠을 텐데.”
제가 준비한 선물 내용이 당사자에게 유출되는 게 그리 싫은 걸까. 아이렌은 불가능한 일까지 언급하며 한숨 쉰다.
상당히 격렬한 반응에 도리어 호기심이 생긴 에이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슬쩍 물었다.
“무슨 선물이길래 그래?”
당사자가 궁금해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다행히 에이스에겐 화내지 않았다.
여전히 그림의 입을 막은 채 몸을 일으킨 아이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그건 내일 알게 될 거야. 기대하고 있어, 에이스.”
“헤에. 기대해도 되는 거 맞지?”
“그럼.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해둘게. 아마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선물일 거야.”
아이렌은 기본적으로 쉽게 확신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의 입에서 저리 단호하게 ‘확실하게 말해둔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래서야 기대를 안 할 수 없지 않나.
“그럼 난 먼저 갈게. 오늘 동아리 활동이 있어서.”
“자, 잠깐! 난 왜 데리고 가는 거냐, 꼬붕?!”
“네가 말할 거 같아서. 적어도 데리고 나가야 안심이 된다고 할까.”
아무리 파트너로서 같은 공간 안에서 먹고 자는 사이라도 그림을 믿을 순 없는 모양이다. 단호하게 불신을 표한 아이렌은 그림을 고쳐 안고 먼저 밖으로 나섰다.
“내일 봐, 에이스. 듀스.”
성큼성큼 바삐 나아가는 발걸음이 바쁘다. 저건 절대 동아리 활동에 늦을까 봐 서두르는 게 아니라, 최대한 그림을 에이스와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서두르는 거겠지.
뛰어가는 거나 다름없는 빠른 걸음을 가만히 바라보던 듀스는 저 또한 궁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뭘 준비한 걸까?”
“저렇게 입단속을 하는 거라면, 여러모로 대단한 거 같긴 한데…….”
아아. 저렇게까지 숨긴다면 얼른 알고 싶어지는데.
마음속 한구석에 청개구리가 앉아있는 에이스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그날 밤.
몰래 방을 빠져나와 고물 기숙사로 와버린 에이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결국 와버리고 말았네.’
원래는 올 생각이 없었다, 같은. 그런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아이렌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림이 자신을 찾아와 ‘내가 문 열어줄 테니, 밤에 오라고!’라 말했을 때부터, 줄곧 달이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일찍 자야 하니, 몰래 확인만 하고 와야지.’
어차피 몇 시간 뒷면 제 생일인데 조금 먼저 안다고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나. 이미 뭔가 준비했다는 걸 아는 이상, 깜짝 선물 같은 것은 물 건너갔으니 미리 보여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나.
그런 변명과 함께 현관문을 두드린 에이스는 조용히 물었다.
“그림, 있어?”
이 시간을 기다린 건 그림 또한 마찬가지인지,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경첩 소리도 들리지 않게 스르륵 문을 연 그림은 경계심 가득한 몸짓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짜 왔냐고.”
“그거야, 네가 오라고 했잖아?”
“흥! 어쨌든 네 발로 찾아온 거니, 이 몸의 책임은 아니라고! 알겠냣?”
결국 그게 중요한 거였군. 에이스는 속이 훤히 보이는 그림의 말에 한쪽 입꼬리만 쑥 올렸다. 어떻게든 아이렌의 선물은 알리고 싶지만, ‘나는 잘못 없다’라고 말할 구실은 필요한 거 아니겠나.
“그래서, 내 선물은 어디 있어?”
“쉿. 이리 따라오라고.”
불이 거의 다 꺼져 어두운 복도를 앞장서는 그림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에이스는 저 혼자 소리를 낼 수는 없었기에, 발뒤꿈치를 든 채 공범자의 뒤를 따라갔다.
서둘러 나아가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이렌의 방 앞.
아무도 없는 내부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무엇이 있는지 훤히 보였다.
“저기, 책상 위에 있는 저거라고.”
그림은 직접 들어가지 않고 문턱에 서서 북슬북슬한 앞발을 뻗었다. 에이스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상대를 내버려 둔 채, 용감하게 선물 앞으로 다가갔다.
공책들과 필기구가 어질러져 있는 책상 구석. 붉은색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눈에 띄는 포장지를 두른 상자는 납작하고 작았다.
‘이미 포장까지 다 끝내놨네?’
이렇게 작은 상자 안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걸까. 설마, 반지나 목걸이라도 들어있는 건가.
상자를 가볍게 쥐고 흔들어 본 에이스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운 무게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이렌은 어디 있어?”
“지금 씻고 있다고.”
“뭐?!”
아니, 어쩐지 안 보인다 싶더니. 어쩐지 들어선 안 될 정보를 들어버린 거 같다.
에이스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렌의 촉촉하게 젖은 머리와 피부를 떠올리고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 언제 씻으러 들어갔는데.”
“으음, 좀 된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꼬붕은 오래 씻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
저 말이 사실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고 여유롭게 굴 수는 없다.
포장된 상자의 형태를 찬찬히 살핀 에이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 정도 포장이면 몰래 뜯어보고 원상복구 할 수 있다. 마침 테이프도 눈에 보이는 곳에 있으니, 여차하면 새로 포장할 수도 있겠고.
뒷수습 방법까지 확인한 에이스는 어느새 제 옆까지 다가온 그림과 눈을 맞추었다.
“내가 별로 안 좋아할 거 같다고 했지?”
“음. 솔직히 시시하지 않나 싶다고.”
“네가 받아도 별로인 정도야?”
“윽, 절대로 싫다고! 물론 이 몸의 사진으로 만든 거라면 가지고 싶긴 하지만. 네 건 필요 없어!”
“사진?”
갑자기 웬 사진인가. 이 상자는 사진이 들어가기엔 좀 작아 보이는데. 굳이 따지자면 폴라로이드 사진 정도는 들어가겠다만……. 그걸 생일 선물로 줄 이유가 있을까.
“에이스?”
그때. 긴장이 풀려 편히 대화하던 한 사람과 한 마리는 반갑지 않은 목소리의 등장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잠옷 차림으로 문 앞에 선 아이렌이었다.
“아, 아이렌?!”
“힉!”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눈을 깜빡이던 아이렌이 상황 파악을 끝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금방 험악하게 구겨진 아이렌은 물기를 머금은 수건을 냅다 그림을 향해 던졌다.
“그림, 너!”
“후낫!”
민첩하게 공격을 피한 그림은 저 멀리 방구석으로 도망가더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꼬, 꼬붕! 날 죽일 셈이냐고!”
“죽일 거였다면 에이스부터 쫓아냈겠지. 목격자가 생기잖아.”
“히익!”
어딘가 요점이 엇나간 대답에서 진지하게 위협을 느낀 그림은 아이렌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열린 문으로 냅다 뛰어갔다.
바람처럼 빠르게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간 그림은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지만, 아이렌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기어이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화가 난 것과 별개로, 애초에 그림을 잡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미, 미안. 아이렌.”
얼떨결에 혼자 남은 에이스는 제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직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뺨을 문지르던 아이렌은 한숨을 푹 쉬더니 온화한 말투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
공격적이지 않은 목소리에 슬쩍 눈치를 본 그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에이스의 대답에 한결 표정이 부드러워진 아이렌은 제가 던졌던 수건을 주워들고 웃었다.
“뭐, 곧 네 생일이니까 그냥 열어봐도 되지 않으려나.”
“어?”
“하루 먼저 주는 셈 치지 뭐.”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 혹시 화가 났는데, 억지로 억누르며 허락하는 건 아닐까?
에이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이렌을 마주 보았지만, 희미한 비누 향을 풍기는 흰 얼굴에는 꿍꿍이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그럼 열어본다?”
하긴, 아이렌이 옥타비넬의 선배들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괜히 비꼬겠나.
의심을 거둔 에이스는 서둘러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었다.
“엑.”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한 에이스는 얼빠진 얼굴로 아이렌과 선물을 번갈아 보았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작은 플라스틱 카드 4개. 그리고 그 얇은 플라스틱 카드에 인쇄되어 있는 건……. 놀랍게도 자신의 사진이었다.
“이, 이게 뭐야?”
“포토카드.”
“……내 얼굴이 있는데?”
“잘 나온 사진으로만 골랐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뭐라 할 말이 없어진 그는 제 포토카드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카드에 담겨있는 건 언제 어디서 찍은 건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사진들이었지만, 에이스는 괜히 제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전에 다 같이 카페 갔을 때, 내가 아이돌 포토카드로 인증샷 찍는 거 보고 너도 뭔가 내밀고 싶어 했잖아? 그래서 하나 만들었지.”
“아니, 나는 아이돌이 아닌데.”
“글쎄다. 내 생각에는 지금 데뷔해도 팬이 한가득 생길 거 같은데.”
“그거,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소리야?”
“아니. 진심인데? 에이스 잘생겼잖아. 성격도 좋고. 노래랑 춤도 꽤 하고.”
저 말.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콩깍지 쩐다!’라면서 웃지 않았으려나.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칭찬에 얼굴이 붉어진 에이스는 괜히 얄궂은 소리를 해보았다.
“그럼, 아이렌도 내 팬이 되어 줄 거야?”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걸까.
에이스의 반응을 살피며 빙긋 웃던 아이렌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푸핫!’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난 이미 지금도 에이스 팬인데? 그러니 이런 것도 만들었지.”
“…….”
그래. 내가 이 애를 말로 이기려고 한 게 잘못이지.
이제는 귀 끝까지 빨개진 에이스는 한숨만 푹 쉬다가 포토카드를 상자 속에 도로 봉인했다.
“이 포토카드, 여분도 있어?”
“많이 뽑으면 할인되어서 사진 하나당 5장씩 뽑았어.”
“허? 그럼 4세트나 더 있단 거야?”
“응. 한 세트 빼곤 다 줄게. 남은 세 세트는 에이스네 부모님이랑 형에게 보내줘. 좋아하시지 않을까?”
아니. 부모님은 몰라도, 형이면 바로 분리수거 할 거 같은데.
옛날부터 한 생각이지만, 아이렌은 제 형을 너무 좋은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닐까. 어디서부터 혈육의 실체를 알려 줘야 할지 알 수 없어 한숨만 쉬는 에이스의 얼굴엔 난감함이 가득했다.
그 난처함의 원인을 알 리 없는 아이렌은, 에이스가 뜯은 포장지를 정리해 버리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참고로 선물이 하나 더 있어. 체리로 설탕 절임을 좀 만들었거든. 가져가.”
“앗. 맛있겠다! 고마워, 아이렌!”
“어라. 이걸 더 기뻐하는 거야? 실망인걸.”
저렇게 장난스럽게 말하는 걸 보아 정말 실망한 건 아니겠지만, 솔직히 저쪽을 더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제가 자기애가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런 포토카드를 어디다 쓰라고.
에이스는 열이 오른 양뺨을 손등으로 훔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본인 사진으로 만들어주지.’
그거라면 체리 설탕 절임 같은 건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아했을 텐데. 하지만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아이렌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진심을 말할 수 없는 에이스는 화면에 담아 둘 수 없는 옆얼굴을 망막에 새기기 위해 열심히 상대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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